아빠가 생각나는 책 BEST 4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안녕하세요. 책식주의입니다.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은 엄마에게 느끼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조금 멀리 느껴지기도 하면서도, 떠올리면 애틋하고 서글퍼지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요. 오늘은 ‘아버지’, ‘아빠’가 떠오르는 책 네 권을 준비했습니다.
01. 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이 책은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필립 로스의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필립 로스는 『네메시스』를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기에 이번 작품이 더욱 반갑게 느껴집니다. 마치 서태지 컴백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필립 로스의 아버지 허먼 로스는 어느 날 거울 속에서 얼굴 반쪽이 내려앉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합니다. 가벼운 안면 마비 증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뇌종양으로 밝혀지죠. 이때부터 필립 로스는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게 됩니다.
허먼 로스는 지독하게 절약하고, 고집 세고 가부장적인, 마치 ‘한국의 아버지’하면 떠오르는 우리들 어린 시절의 아버지 같은 사람입니다. 그토록 강건했던 허먼 역시 나이가 들고 병에 걸리고 나서는, 아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가 되죠.
“나는 안에 있어도 괜찮아.”
그 순간 나는 아버지에게 네 단어, 그전에는 평생 아버지에게 해본 적이 없는 네 단어를 내뱉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스웨터를 입고 운동화를 신으세요.” (…)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아버지는 그렇게 한다. 한 시대의 끝이고 다른 시대의 새벽이다.
이 책의 매력은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지만, 그것을 어둡고 처절하게 그리지만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간간이 유쾌한 에피소드가 끼어들어 무거운 소재를 중화해준 덕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감정의 과잉도 낭비도 없는 필립 로스의 덤덤한 필체 때문일 것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어색하고 데면데면한 ‘현실 아들’이라 더욱 크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필립 로스의 감정도 변곡을 그립니다. 특히, 아버지가 욕실에서 실례를 하고는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난장판이 된 욕실을 수습하던 모습은 그에게 인생 최초로 느껴보는 모종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버지의 똥을 치우는 일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며 비로소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존재에게서 미워할 모든 것을 갖추고 사랑할 모든 것을 갖춘 바로 그런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유산이었다. 그것을 치우는 것이 다른 뭔가를 상징해서가 아니라 상징하지 않았기 때문, 살아낸 현실 그 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나의 유산이었다. 돈이 아니라, 성구함이 아니라, 면도용 컵이 아니라, 똥이.
에세이라는 장르가 예의 그렇듯, 소설 같은 극적인 사건이나 반전은 없습니다. 작가 역시, 작정하고 독자를 슬프게 만들려 하지도 눈물을 짜내려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 형용할 수 없는 먹먹함과 진한 여운이 남습니다. 이것이 필립 로스라는 작가의 힘인가 봅니다.
아버지의 유산
저자 필립 로스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7.11.30.
02. 허삼관 매혈기 (위화)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들도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중국의 국민 작가 위화의 장편 소설로, 대륙을 넘어 전 세계에서 극찬을 받은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허삼관>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죠.
웃음으로 시작하지만 끝날 무렵엔 눈물이 핑- 돕니다. 제목 그대로 허삼관이라는 사람이 피를 파는(買血) 이야기입니다. 일찌감치, 피를 팔면 한 번에 큰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허삼관은 가족들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피를 팔아 위기를 모면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허삼관이 이렇게 부성애 넘치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지나치게 몰인격적인 모습을 보여서 처음엔 책을 덮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허삼관이 점차 가족을 위해서라면 죽음의 위험도 불사할 수 있는 한 명의 ‘아버지’가 되어가죠.
영화 '허삼관' 스틸 이미지 |
위화 특유의 재치 있고 해학이 넘치는 필체 덕에 시종일관 폭소하지만 실없이 웃기기만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문화혁명’이라는 중국의 시대적 배경에서, 한 명의 가장이 가족을 등에 지고 처절하게 걸어나가는 모습에는 결코 웃을 수가 없습니다. 온몸에 온기가 빠져나가고 사지가 후들거릴 때까지 피를 뽑는 허삼관의 모습과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죠.
일락이가 방 철장의 아들 머리를 박살냈을 때 피를 팔러 갔었지. 그 임 뚱땡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피를 팔았었고, 그런 뚱뚱한 여자를 위해서조차 흔쾌히 피를 팔다니. 피가 땀처럼 더우면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식구들이 57일간 죽을 마신다고 또 피를 팔았고, 앞으로 또 팔겠다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디나…. 이 고생은 언제야 끝이 나나.
나이가 들고는 자식들도 자리를 잡고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굳이 피를 팔지 않아도 되는데, 늙은이의 피는 쓸 데가 없어서 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을 무용하다고 느끼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정년퇴직, 혹은 그전에 일을 그만두고 무력함을 느끼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죠.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요?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작품이 걸작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 소설을 읽으면 돼지간볶음이 그렇게 먹어보고 싶습니다. 따뜻하게 데운 황주 한 잔도….
허삼관 매혈기
저자 위화
출판 푸른숲
발매 2007.06.28.
03. 플라이, 대디, 플라이 (가네시로 카즈키)
세 번째로 소개해드릴 책은 만화적 색채의 표지로 서점 매대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플라이, 대디 플라이』입니다. 소설의 내용도 표지를 쏙 빼닮았습니다. 워낙 코믹하고 극적이라 꼭 만화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회사원 하지메는 딸바보입니다. 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가해자는 권투선수인 고등학생 이시하라입니다. 그는 행실이 불량한 데다가 소위 ‘금수저’라 무서울 게 없습니다.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 이시하라에게 하지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딸은 그때부터 하지메를 외면합니다.
딸의 외면에 충격을 받은 하지메는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시하라에게 설욕을 하고자 복수를 계획합니다. 무작정 부엌칼을 들고 이시하라를 찾아 뛰쳐나가지만 옆 학교를 잘못 찾아가 허탕을 치죠. 그런데 전화위복으로 그곳에서 무림의 고수, 재일교포 박순신을 만나게 됩니다. 딸을 위해 회사 휴직까지 하고 박순신에게 특훈을 받는 하지메는 과연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영화 '플라이 대디' 스틸컷 |
이 작품의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는 재일교포인데요, 소설 속 박순신은 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박순신이 속한 ‘더좀비스’라는 아웃사이더 그룹을 통해 소수 민족을 소외시키는 일본 사회의 병리 현상을 비틀어 꼬집습니다. 물리적 힘도, 사회적 힘도 없는 아버지가 딸을 위해 싸우는 눈물겨운 부성애를 전면에 내세우며, 힘없는 자들을 소외시키는 부조리한 사회에 항변하는 것이죠. 가네시로 가즈키만의 유쾌하고 밝은 스토리텔링으로요.
작품이 시사하는 문제점을 잠시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단숨에,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소설입니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
저자 가네시로 카즈키
출판 북폴리오
발매 2006.02.10.
04. 달려라 아비 (김애란)
이번에는 한국 작품을 소개해드릴게요. 『달려라 아비』는 김애란 작가의 초기 단편 소설집입니다. 이 책이 발간되었을 때 작가 나이 만 25살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아버지’입니다.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작품에 아버지가 출현합니다. 가출한 아버지, 참견하는 아버지, 어색한 아버지, 나를 버린 아버지, 나를 모른 척하는 아버지 등 다양한 모습으로요.
저는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라는 작품이 특별히 인상 깊었는데요, 밤만 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통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오래전 연을 끊은 아버지가 잠시 집에 머물겠다고 찾아옵니다. 안 그래도 불면증인데 아버지가 늦게까지 TV를 보는 통에 잠에 드는 것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TV만 아니면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홧김에 TV 유선을 끊어버립니다. 그 옛날 아버지가 가족들과 연을 끊어버린 것처럼 말이죠.
그녀는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돌아오자마자 유선을 끊은 것에 대해 죽도록 후회했다. 리모컨을 만지는 아버지의 당혹스러운 표정은 고사하고, 갑자기 아버지와 ‘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어색함. 그 침묵. 저 알 수 없는 표정. (…) 그녀는 약 한 시간 동안 아버지와의 숨막히는 어색함이 불편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버지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버지들은 이런 때 어떤 말을 했던가’를.
이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는 그녀의 집을 떠납니다. TV도 없고 아버지도 없으니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유독 더 깊은 불면에 뒤척이다가 새벽 늦게야 잠에 듭니다. 아득하게 깊은 잠, 그녀는 아버지 꿈을 꿉니다. 아버지와 놀이터에서 행복하게 놀던 어린 시절 꿈을요.
이 작품을 비롯해서 이 책에는 많은 아버지들이 나오지만, 행복한 아버지의 모습은 좀처럼 찾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부재하고, 외면하고, 불편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아버지라는 대상보다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 그 관계로부터 받은 영향(대개는 트라우마)에 집중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주인공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궁금해하고, 신경 씁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아버지’란, 어쩐지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가닿고 싶은 존재가 아닐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달려라, 아비
저자 김애란
출판 창비
발매 2005.11.29.
아빠 생각나는 저녁이네요. 또 좋은 북큐레이션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