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외설, 그 끊임없는 줄타기
지난봄, 페이스북은 19세기의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명화 때문에 프랑스 법정에 섰다. 파리의 고등학교 교사 뒤랑-바이사는 2011년에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1866)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페이스북은 그의 계정을 일방적으로 폐쇄했다.
이에 교사는 페이스북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5년이 지난 지금 소송이 인정되어 재판이 열린 것이다. 한국에서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소속 박경신 위원이 같은 해에 자신의 블로그에 쿠르베의 같은 작품을 올려 논란이 된 바 있다.
귀스타브 쿠르베, '세상의 기원', 1886 @flickr |
문제가 된 작품 <세상의 기원>은 여성의 생식기와 체모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그림 속 여성은 얼굴이 이불로 가려진 채 누워있어 관람자는 관음증적 시선으로 작품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에로틱한 그림을 수집하던 파리 주재 터키 대사의 요청에 의해 1866년 그려진 것으로, 추후에 이 작품을 소장했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 그림을 다른 그림으로 가려놓고 있다가 지인들에게만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라캉의 사망 이후 이 작품을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게 되면서부터다.
<세상의 기원>은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음부와 가슴이 부각된 채 무방비 상태로 누워있는 여성의 이미지는 성적 충동을 유발하는 포르노그래피의 언어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품이 프랑스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누구나 감상할 수 있다니 의아하지 않은가? 흔히 예술과 외설을 구별하는 기준을 노출의 정도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경계는 작가의 주제의식으로 갈린다. 이 작품이 미술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wikipedia |
사실주의 미술을 이끌었던 쿠르베는 단순히 선정적인 장면을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기존의 누드화가 대상을 이상적으로 미화시킨 것에 반발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새로운 누드화를 제시한 것이다.
작품에 붙인 <세상의 기원>이라는 신성하고 거창한 제목은 적나라한 이미지와 어긋나며 기성 미술계를 조롱하는 셈이다. 이는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매춘부의 모습에 <올랭피아>(원제목은 <고양이와 함께 한 비너스>였다)라는 신화적 내용이 함축된 단어를 제목으로 쓰며 ‘비너스’로 신격화되었던 여성의 누드화에 반발했던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와도 상통한다.
에곤 쉴레, '검은 스타킹을 신은 여인', 1913 @wikimedia |
쿠르베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여전히 예술과 외설의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고, 더 다양한 작품들이 그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여고생의 음부를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을 전시했던 한 작가는 전시 중간에 막을 내린 채 소송에 시달리다가 31점의 작품이 압류 소각되기도 했고, 일본의 여성작가는 자신의 질 모양을 3D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이메일로 보냈다가 전자 음란물 유포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이러한 작품들에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 중에는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이나 수용하기 어려운 어린이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과 외설은 구분되어야 한다.
다만, 예술과 외설의 기준은 주제의식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는지에 따라 변할 수 있다. 한때 불온하다는 이유로 소각되었던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작품도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죽음과 고통이라는 주제의식이 드러나면서 후대에 와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그 기준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늘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끊임없는 줄타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픈갤러리 홍지혜 디렉터&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