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 다큐가 기획의도와 달리 실제로 보여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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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다큐플렉스', 지난해 세상 떠난 가수 겸 배우 설리 삶 다뤄
생전 대중이 원하는 '여성 연예인다운' 모습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당한 비난받아
f(x)로 데뷔, 연기자 활동과 솔로 앨범 발매, 방송과 SNS로 '자기다움' 표현하고 넓혀가
재능과 주관 가진, 자유로움 원했던 아티스트라는 점 조명했지만
열애 상대 최자 관련 의도적 편집, 일기장 공개 등 자극적 요소가 더 두드러져
'왜 설리가 불편하셨나요?'라는 제목 내걸었으나, 방송이 더 불편했다는 시청자 반응 봇물
이모현 PD, 방송 후 언론 인터뷰로 최자 향한 악플 자제 요청 등 사태 수습 나섰으나 역부족
지난 10일 방송한 MBC '다큐플렉스' 2회 '왜 설리가 불편하셨나요?' (사진='다큐플렉스' 캡처) |
10일 방송한 MBC '다큐플렉스'의 제목은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이하 '다큐플렉스')였다. 생전 수많은 악성 글과 댓글, 이를 더 멀리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힘을 가진 기사에 시달린 고인의 삶을 돌아본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본방송 전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25살, 짧지만 강렬했던 이슈메이커 설리. 그녀가 우리 사회에 던지고 간 메시지와 감춰진 진실들을 '다큐플렉스'에서 최초 공개한다", "설리를 상품으로 소비했던 언론, 악성 댓글로 농락했던 네티즌. 그리고 그것을 방관하던 우리가 오늘 밤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방송되기 전에도 염려의 목소리는 있었다. 아직 1주기도 되지 않은 만큼 시기가 빠르기도 하고,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시작한다고 해도, 방송 방향성에 따라 얼마든지 고인의 삶이 들쑤셔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주관 있는 아티스트이자 한 개인으로서의 설리를 재조명하고 고인의 뜻을 그르치지 않게 전하느냐, 다소 자극적인 요소나 편집, 연출로 새로운 논란의 불씨를 댕기느냐. 많은 이들이 '다큐플렉스'에게 기대한 건 당연히 전자였을 것이다.
'다큐플렉스'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이혼 가정에서 자라 일찍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설리의 유년기부터 연습생 시절을 거쳐 아이돌로 데뷔한 청소년기, 연애를 공개하고 경제적 독립을 선언한 스무 살 이후를 시간순으로 보여줬다. 특출한 외모, 스타성, 밝은 성격으로 타인을 기분 좋게 하는 존재였다는 주변인의 말, 배우와 아이돌로 보여준 끼, 설리가 방송이나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했던 말, 설리가 겪은 일이 나타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큐플렉스'는 설리와 최자의 공개 연애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단순히 분량만 문제는 아니었다. "열애설 나기 전까지는 온 가족이 다 행복하고 좋았어요"라거나 "갑자기 13살이나 많은 남자친구가 나타났다는 건 갑자기 계단을 너무 많이 상승한 거예요. 노는 문화, 술 문화, 음식 문화, 대화의 패턴,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중간 과정이 다 없어" 등 설리와 최자의 연애를 극심하게 반대했던 설리 어머니 김수정씨 발언을 앞뒤에 배치해 극적인 효과를 냈다.
'다큐플렉스'에서는 설리의 어머니 김수정 씨가 최초로 카메라 앞에 서서 고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진='다큐플렉스' 캡처) |
최자와 설리를 연결해 질문하는 타 예능 방송 화면과, '하지만 이제 나 지쳤어/네가 만든 내게 난 숨이 막혀 오는데/넌 점점 더 내게 바라는 게 많아졌어'라는 다이나믹듀오의 '죽일 놈' 뮤직비디오 최자 파트가 나왔다. 설리가 과거 자해를 했다는 이야기 후에는 "아마 그게 둘 사이에서는 거의 마지막이지 않았나 싶어요. 마지막 어떤 발악이었겠죠, 본인(설리)만의 발악"이라는 어머니 김씨의 설명이 뒤따랐고, 사람에게 상처받았다는 설리의 인터뷰가 차례로 등장했다.
잘 지내던 시절이 있었는데, 엄마가 반대하는 연애를 했고, 공개 연애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 외로움과 괴로움을 더 민감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흐름. 결별 후 SNS를 통해 자유분방하고 독특한 언행을 자주 했다는 점, 집에 가 보니 약봉지가 너무 많았더라는 어머니 김씨 발언, 정신과 상담 치료를 계속 받았다는 소속사 관계자 설명. '다큐플렉스'는 설리 고통의 핵심이 결국 열애와 결별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펼친 셈이다. 가족의 발언이라 해도 어떤 내용과 뉘앙스를 살리느냐에 따라 각인되는 부분이 달라지기에, 제작진의 편집과 연출은 조심스럽고 세심해야 했다.
이모현 PD는 방송 후 10개 넘는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최자 역시 피해자이기에 최자에 대해 나쁘게 기사가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설리와 최자 연애를 반대했다는 김 씨가 딸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 준 최자에게 고마움을 표한 부분은, 설리의 '연애'가 아니라 전체적인 '일대기'를 다루는 프로그램 취지상 편집했다고 설명했다. 최자에게 비난이 쏟아진 게 시청자 '오해'의 결과라면, 그 부분은 최소한 시청자의 '오해'를 방지할 수 있게 빠지지 말았어야 할 내용이었다.
또한 이 PD는 △여성 아이돌을 보는 대중과 언론의 감수성이 낮은 상황에서 △설리는 우리나라 여성 아이돌 생태계에서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의미 있는 존재였고 △설리를 통해 여성 아이돌을 보는 편견이 깨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다큐플렉스'는 설리 죽음에 다면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말하는 프로그램이라고도 해명했다.
설리는 2005년 드라마 '서동요'로 얼굴을 알렸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으며 16살에 걸그룹 f(x)로 데뷔했다. (사진='다큐플렉스' 캡처) |
이 PD의 해명에도 일리는 있다. '다큐플렉스'는 너무 어린 시절부터 연습생 생활을 해 외로움을 탔다는 고인의 발언, 조회수를 위해 설리의 SNS를 끊임없이 기사화한 언론, 댓글과 클릭수를 겨냥해 메인에 노출한 포털, 노골적이고 모욕적인 악성 댓글 범람 등 설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면을 두루 다루고자 한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이돌 육성 과정의 그늘, '여성 연예인'에 더 엄격한 잣대, 가십을 기반으로 한 저널리즘 문제는 말 그대로 '흔적'만 있었다. 아무리 소속사가 신경 써서 보살피고 관리한다고 해도 너무 어린 시절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연습생 시스템'이 놓치는 빈틈이 존재하며, "모두가 그냥 도움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란 소녀시대 티파니 영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는 한 개인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피할 수 없는 그늘이자 극복해야 할 과제다. 이는 짧게 언급되는 데 그쳤고, 더 깊이 있는 이야기로 뻗어 나가지 못했다.
설리를 괴롭힌 무분별하고 과도한 비난은 어떤가.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악성 댓글을 단 일부 악플러만 잘못한 일일까. 설리가 인스타그램에 뭘 올리고, 라이브 방송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발 빠르게 기사화해 더 널리 알려 화제에 오를 판을 열어 준 언론 역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자성해야 할 부분이다. "저한테만 유독 색안경 끼고 보시는 분들이 많아서 속상"했다는 설리가 "시청자"에 앞서 "저 좀 예뻐해 주세요"라고 부탁한 대상은 "기자님들"이었다.
썼다 하면 클릭 수가 보장된다는 이유로 설리와 그의 SNS를 '활용'해 온 혐의에서 자유로운 매체와 기자가 얼마나 될까. 그러나 '안 그런 데가 어딨어? 모두의 잘못이야'라며 과거를 뭉개고 합리화하는 데 급급한 것과, '앞으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지' 하고 저널리즘 윤리를 지키는 기사를 쓰려고 노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사진='다큐플렉스' 캡처) |
'다큐플렉스'는 설리의 일상을 실시간 중계하면서 별 아닌 일을 '논란'으로 키운 언론과 비슷한 태도를 노출했다. "연애 당시 SNS 영상과 사진들로 논란을 일으킨 설리", "노브라 사진들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설리"라는 자막을 내보내, 부정적으로 이슈화된 까닭을 설리 본인에게서 찾는 듯했다. 자사 예능에서 갓 스무 살이 된 설리를 초대하고는 성적 은유를 언급해 난처하게 만든 점이나, 자사 뉴스 프로그램에서 설리가 연장자인 연기자에게 'OO 씨'라고 한 것을 논란이라고 보도한 점을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
설리는 '여성 아이돌'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타깃이 돼 더 많은 무례한 공격을 감수해야 했지만, 적어도 '다큐플렉스'에서 이 지점은 메인이 아니었다. 각자 고유한 개성을 지닌 개인도 결국 사회의 구성원이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에서 영향을 받으며, 특히 여성 아이돌에게 기대하는 '덕목'을 위반했을 때 더 잔인한 결과가 돌아온다는 점을 짚어내는 데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여성 연예인, 여성 아이돌에게 요구하는 '대중의 기대'라는 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모순적이며 개인의 자유를 옭아매는지 지적하는 데도 실패했다.
대신 '다큐플렉스'는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표현을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구실로 설리의 SNS 영상을 자주 등장시켰다. 입 안에 크림을 머금은 동영상, 최자와 다정한 모습으로 찍힌 사진, 노브라 사진 여러 장을 보여준 후 "이 사진"이, "제 연애"가, "노브라"가 "불편하셨나요?"라고 물었다.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것에 주목해 어머니 김씨 발언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설리가 생전에 쓴 일기장을 최초 공개했다. 일기장 공개가 고인이 원한 일이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내밀한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의 후폭풍을 고려했어야 한다.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자체 최고 시청률 경신']이라는 보도자료를 내는 것이 적절했는지도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하고.
방송 후 최자의 친구이자 동료인 개코는 '다큐플렉스'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설리 친구들과 가족은 서로 SNS로 폭로와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의도치 않았다 해도 '다큐플렉스'가 남긴 결과 중 하나다. "수많은 오해 속에서 설리를 재조명"한다는 선한 기획의도는 방송 후 인터뷰가 아니라 방송 자체에 더 정확히 담겼어야만 했다.
'다시, 보기'는 CBS노컷뉴스 문화·연예 기자들이 이슈에 한 걸음 더 다가가 현상 너머 본질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발빠른 미리 보기만큼이나, 놓치고 지나친 것들을 돌아보는 일은 우리 시대의 간절한 요청입니다. '다시, 보기'에 담긴 쉼표의 가치를 잊지 않겠습니다. [편집자주]
(사진='다큐플렉스' 캡처) |
CBS노컷뉴스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