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신격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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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서울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 올라가려면 줄을 서야 한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향해 천천히 진행하다 보면 벽면에 전시된 롯데월드타워와 관련 기록물과 어록을 보게 된다. 그 어록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언제까지 외국 관광객에게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다. 세계적 명성을 가진 건축물이 있어야만 관심을 끌 수 있다."
롯데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1921~2020)이 롯데월드타워 건설을 결정하며 한 말이다. 이 말은 내게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충격을 주었다.
2016년 이전까지 외국 국빈이나 세계적 명사가 서울을 방문하면 다음날 조간신문에 이들이 경복궁 근정전을 둘러보는 사진이 실리곤 했다. 우리는 이들이 의례적으로 던지는 "궁전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곤 했다.
신격호는 달랐다.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왕궁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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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이해하는 데는 50년 걸려"
나는 지난 16년간 49명의 천재를 연구하면서 그들의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천재는 보통 사람이 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 성취물로 인해 후대 사람들은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2016년에 완공된 롯데월드타워는 123층에 555m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 높이다. 서울스카이를 처음 가보는 사람은 누구나 고민한다. 입장료가 너무 비싼 거 같아서다. 그러나 일단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내리기만 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본 서울은 서울이 아니었구나, 한강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전망대에서 센강을 내려다볼 때 느끼는 감흥과 다르지 않다. 이미 롯데월드타워는 불과 4년 만에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전망대 유리창 턱은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벤치가 되었다.
롯데월드타워는 신격호의 30년 숙원사업이었다. 건립 과정에서 여러 번 난관에 부닥쳐 좌초될 뻔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험담과 몰이해에 시달려야 했던가. 서울스카이에서 한 시간만 머물면 깨닫는다. 그간의 시비(是非)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를. 에펠 역시 센강 옆에 에펠탑을 세울 때 비슷한 시련을 겪었다. 범재들이 천재의 비전과 언어를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사람은 그 시대보다 항상 50년을 앞서간다"고 앙리 마티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롯데 창업주 신격호의 존재를 이병철과 정주영보다 먼저 알았다. 1982년 1월~2월이었다. 나는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롯데리아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를 보고 호기심에 지원했다. 용산구 청파동 근처의 롯데삼강 사옥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았다.
어떤 직원이 교육 시간에 신격호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신격호 회장이 청년 시절 일본에서 고생할 때 읽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감동을 하여 여주인공의 이름을 회사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난생처음 들어본 이야기였다.
내가 2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한 곳은 소공동 롯데백화점 지하 분수광장의 롯데리아 1호점이었다. 시급(時給)은 남자 650원, 여자 550원. 2개월 동안 햄버거를 굽고 프렌치프라이를 튀기고 밀크셰이크를 만들었다. 알바는 2개월로 끝났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여주인공 '롯데' 이야기는 뇌리에 남았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괴테의 사랑, 불멸이 되다
그로부터 35년. 2017년 가을, 나는 추석연휴에 휴가를 붙여 '독일이 사랑한 천재들' 취재여행에 나섰다. 나는 괴테의 발걸음을 따라 프랑크푸르트, 스트라스부르, 라이프치히, 베츨라, 바이마르, 에어푸르트, 예나 등을 취재했다. 독일 취재에서 가장 설렜던 순간은 괴테에게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한 장소를 찾아가던 때였다.
알려진대로, 프랑크푸르트 출신인 괴테(1749~1832)는 스트라스부르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아버지의 권유로 베츨라의 제국법원에서 판사 시보를 한다. 괴테는 그 법원에서 알게된 부프 판사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의 집을 자주 드나들다가 딸 샤를로테(Charlotte, 일본식 표기 '샤롯데')에 연정을 품게 된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정혼자가 있던 샤를로테는 괴테의 구애를 거부한다. 실연의 아픔으로 한동안 괴로워하던 괴테는 가까스로 마음을 정리한다. 그러던 어느 날 괴테는 친구 예루살렘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 나머지 권총 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다. 괴테는 자신의 경험과 친구의 비극을 섞어 소설로 쓰기로 한다. 프랑크푸르트 집으로 돌아와 1774년 1월부터 14주 만에 써낸 소설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괴테 나이 스물다섯 때다.
베츨라(Wetzlar)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다. 라이카 카메라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기차역에서 내린 나는 시간 절약을 위해 택시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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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 하우스로 가주세요."
택시는 낯선 도시의 다리를 건너고 언덕길을 꼬불꼬불 돌아 10여분만에 오래된 집 앞에 섰다.
'Lottehaus. 이 집에 샤를로테 부프가 살았다.'
독일 여자 이름인 '샤를로테'는 일상에서는 줄여서 '로테'로 부른다.
부프 판사는 슬하에 자녀를 16명을 두었다. 그중 영아기를 넘겨 생존한 자녀가 10명이었다.
300년이 넘은 로테하우스는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입장료 3유로를 내고 로테하우스로 들어가면서 사랑에 빠진 남자를 생각했다. 청년 괴테는 이 집 문을 열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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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테 초상화가 걸려있는 방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샤를로테의 금발머리카락이었다. 샤를로테가 살던 집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니 샤를로테의 실체가 느껴졌다. 스물네 살 남자가 사랑했던 여인이 이 공간에 살았다. 괴테가 이 여인을 연모하지 않았더라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태어나지 못했다.
또 다른 방에는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출간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판본을 전시중이다. 200종은 넘어 보였다. 한국어 판본도 두 권 보였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18세기 판본들이었다. 성인 손바닥만 한 판형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어판도 10여종이 있었다. 역시 손바닥만 했다.
누렇게 빛바랜 일본어 판본을 살펴보다가 갑자기 '쿵'하는 느낌이 왔다. 도쿄에서 낯에 일하고 밤에 대학을 다니던 식민지 청년 신격호가 읽은 책이 저들과 비슷한 책이었겠지.
1774년 출간된 이 소설은 유럽 대륙을 휩쓰는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괴테는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주인공의 극단적인 행동을 따라하는 젊은이들이 속출하면서 '베르테르 효과'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25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작품은 여전히 세계의 베스트셀러다.
경남도립종축장에서 양을 키우던 청년이 1942년 단 돈 83엔을 들고 현해탄을 건너지 않았다면 과연 괴테를 만날 수 있었을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작가를 꿈꿨지만 생존을 위해 문학을 포기해야 했던 청춘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질렀다. 얼마나 많은 일본 청년들이 이 소설을 읽었겠는가. 이 소설을 읽지 않고 청춘의 바다를 항해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샤를로테(일본식 표기 샤롯데)'를 훗날 회사명으로 쓰겠다고 가슴에 품은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롯데는 껌으로 성장했다. '입속의 연인', 롯데 껌 광고 문구다. 껌 광고 카피 중 이것을 능가하는 것은 아마 나오기 힘들 것이다. 이 광고 카피는 신격호 작품이다.
롯데월드타워 앞에는 괴테 상(像)이 세워져 있다. 베를린 티에르 정원에 있는 괴테상과 똑같은 것이다.
괴테는 베츨라에서 사랑을 했고, 프랑크푸르트에서 그 사랑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신격호는 도쿄에서 이 소설에 감동했고, 서울에 123층 슈퍼타워를 남겼다.
신격호는 이렇게 독일의 정신 괴테와 우리를 잇고 있다. 천재는 아무도 못 보는 표적을 맞히는 사람이라고 갈파한 이는 쇼펜하우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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