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아래 전단지 돌리고 전신주 오르고…고달픈 혹서기 노동자
34도 육박하는 폭염에도 휴식 취하지 못해
정부 '열사병 안전수칙' 배포했지만 현장서 무용지물
전국 모든 내륙 지역에 폭염특보(경보·주의보)가 내린 2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인형탈을 쓴 아르바이트생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폭염 경보는 하루 최고 기온이 35도, 폭염 주의보는 33도 이상인 날이 이틀 이상 계속될 것으로 전망될 때 발령된다. 2018.7.20/뉴스1 © News1 박지수 기자 |
20일을 기준으로 9일째 한반도 전역에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름철 뜨거운 열기에 노출된 채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열사병 등 각종 온열질환에 걸릴 가능성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케이블·인터넷 설치기사들의 경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혹은 더 오랜 시간 동안 줄곧 바깥에 머물러야 한다. 대체로 뙤약볕 아래서 전신주를 오르내리며 실외 작업을 하는 것이 설치기사들의 일이다.
정부가 지난해 5월 야외 노동자들에게 물과 그늘, 휴식을 꼭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열사병 안전수칙'을 배포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설치기사들은 폭염 속에서 근무해야만 할 때도 현장 관리자들의 선의에 기대거나 직접 건강을 챙겨야만 한다.
최낙규 KTS 좋은일터 만들기 운동본부장은 "KT 본사에서 오후 1시쯤부터 폭염특보가 내려지면 작업을 지양하라고는 하지만, 지사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등의 행동 요령은 전혀 내려오지 않는다"며 "물을 잘 챙겨 마시라는 식으로만 책임을 현장 직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 본부장은 "지역 관리자들이 괜찮은 사람들이면 신경써서 챙겨 주기도 하지만 전사적인 차원의 폭염 대책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며 "지금 근무하는 사무실은 팀장이 법인카드로 물을 사서 냉장고에 얼려 놓는 등 신경을 쓰는 편이라 사정이 좀 낫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23명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7명분의 아이스박스만 지급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설치기사 1인당 하루 7~8가구 정도를 방문해 작업을 해야 하지만, 할당량을 마쳐야만 하기 때문에 휴식이나 작업 시간 단축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 본부장은 "더울 때는 실내에서 쉬라고는 하지만 주어진 작업량은 늘 같다"며 "혹서기에는 방문 가구 수를 5~6가구로 줄여주는 등의 조치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학비노조)은 2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학교 급식실에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 적용할 것을 시도교육청에 요구했다다. 2018.6.20/뉴스1 © News1 윤다정 기자 |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더위까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사로 일하는 노동자들은 위험한 노동환경에 살인적인 더위라는 이중고를 감당해야 한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학비노조)에 따르면 조리 노동자들의 한여름 체감온도는 70도를 육박한다. 위생모, 팔토시, 고무장갑, 앞치마, 장화, 마스크 등을 전부 갖추고 불을 가까이하며 일하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기 일쑤다.
휴식을 취할 공간도 마땅치 않다. 대체로 탈의실을 겸하고 있는 휴게실은 근무 인원을 수용하기에 작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2명이 일하는 급식실의 휴게실 면적이 약 10㎡(3평)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환기시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더위는 물론 호흡기 질환에 그대로 노출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박화자 학비노조 경기지부 부지부장은 "어느 학교는 후드 공절기를 틀면 다른 곳에서 에어컨을 틀 수 없고 전기가 많이 든다며 켜 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꼬집었다.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70대 여성 A씨가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주고 있다. 이날 서울의 낮 최고 기온은 34.2도를 기록했다. © News1 |
많은 직장인들이 오가는 사무단지와 일대의 식당가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는 중·노년 여성들에게도 더위는 힘에 부친다. 대부분이 열기와 햇볕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을 직접 준비해야만 한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경보가 발효된 20일 낮 12시쯤, 70대 여성 A씨가 서울 광화문 인근의 사무단지에서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돌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오렌지색 선캡과 팔토시, 품이 넓은 긴 옷으로 무장한 A씨의 얼굴에서 선크림과 섞인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흘러내리길 반복했다. 바삐 움직이는 A씨의 가방은 빈 물병 하나와 채워진 물병 하나, 거의 비워져 가는 음료수병 하나로 꽉 차 있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1시30분까지 전단지를 돌리고 A씨가 하루에 받는 일당은 2만원 정도. 하루에 300~400장 정도의 전단지를 돌리고 나면 A씨의 일도 끝난다. 짧은 시간이지만 연일 살인적인 무더위가 이어지는 요즘 같은 때에는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A씨는 "젊을 때부터 하던 일이기도 하고, 집에만 있으면 우울증이 생길 것 같아 나와서 일을 하는 게 낫다"면서도 "오늘은 이상하게 어지럼증이 느껴진다. 오래 서 있다 보면 아찔할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서울=뉴스1) 윤다정 기자 mau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