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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턱시도와 바지를 입히다...'생 로랑'의 브랜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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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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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로랑'의 로고/사진=Saint Laurent 제공

[MHN 문화뉴스 이수현 기자] 생 로랑(Saint Laurent)은 1961년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프랑스 파리에서 론칭한 패션 브랜드로서, 2012년 '이브 생 로랑'에서 '생 로랑'으로 브랜드명을 변경했다.



생 로랑은 1960년대의 일반적 패션 형태였던 고급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로 브랜드를 시작했으나 1966년에 기성복 전문 브랜드 '리브 고시'를 선보이며 우아한 것이 전부였던 당시 패션에 젊은 스트리트 감성을 도입했다. 생 로랑은 여성을 성차별로부터 해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르 스모킹', 예술을 패션에 도입한 대표적 사례인 '몬드리안 컬렉션' 등을 선보이며 크리스찬 디올, 코코 샤넬과 함께 20세기 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자 브랜드가 되었다.


'이브 생 로랑'이 탄생하기 까지

-꿈을 키웠던 '이브 생 로랑'의 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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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생 로랑의 어린 시절/사진=Saint Laurent 제공

1936년 8월 1일, 이브 생 로랑은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 오랑에서 태어났다. 그림 그리기, 글쓰기, 영화 등에 관심이 많았던 이브 생 로랑은 11세였던 1947년, 크리스티앙 베라르(Christian Berard, 디자이너, 화가)가 디자인한 작은 정원, 침실, 샹들리에 등으로 구성된 무대 세트와 섬세한 고전 의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브 생 로랑은 이 연극 무대와 의상을 직접 만들어보며 창작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브 생 로랑은 17세가 되던 1953년, 그동안 작업한 코트, 드레스, 수트 등의 디자인 스케치를 국제양모사무국의 디자인 콘테스트에 제출했다. 이브 생 로랑은 이 대회에서 3등을 차지해 부모님과 함께 파리에 시상을 하러 갔는데 당시 '보그' 프랑스판의 편집장인 미셸 드 브루노프를 만나게 되었다. 이브 생 로랑의 재능을 눈여겨본 미셸 드 브루노프는 이후 이브 생 로랑에게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되었다.



1955년 이브 생 로랑은 미셸 드 브루노프에게 자신의 새로운 스케치를 보여주었고 미셸 드 브루노프는 이 스케치가 아직 발표도 하지 않은 크리스찬 디올 가을, 겨울 컬렉션의 A라인 스커트와 비슷하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아 즉시 이브 생 로랑을 크리스찬 디올에게 보냈다.



-패션계에 첫 발을 내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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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생 로랑/사진=Saint Laurent 제공

크리스찬 디올은 이브 생 로랑의 스케치를 보고 그 자리에서 이브 생 로랑을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채용했다. 1957년 10월,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사망했고 1957년 11월 15일, 이브 생 로랑이 21세의 나이로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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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생 로랑은 디올의 첫 번째 컬렉션에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펼치지만 점차 디올의 주 고객인 보수적인 상류층 중년들이 추구하는 보수적인 패션에 지루함을 느낀다. 그래서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이고 다소 개방적인 패션 디자인을 선보이게 된다. 젊은 사람들은 그의 디자인을 좋아했지만 디올의 주 고객들은 이브 생 로랑이 제안한 디자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생 로랑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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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디올의 소유주였던 마르셀 부삭은 그에게 군입대를 권하게 된다. 이브 생 로랑은 군입대를 하지만 3주 만에 신경 쇠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사이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가 뽑혀 디올에서 해고되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좌절감과 우울에 빠져있던 이브 생 로랑을 도와주었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연인 피에르 베르제이다. 피에르 베르제의 도움으로 인해 1961년 이브 생 로랑의 이름을 내걸은 '이브 생 로랑' 브랜드를 론칭할 수 있었다.



이것이 생 로랑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패션계에 새로운 역사를 쓰다

-예술과 패션의 만남



1966년 이브 생 로랑은 니키 드 생 팔르와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팝아트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빨간 입술, 알록달록한 심장, 원색의 해와 달, 여성의 몸 등의 그림을 넣은 드레스는 니키 드 생 팔르의 조형작품 '블랙 비너스'와 앤디 워홀의 판화 시리즈를 떠오르게 했다. 1969년, 이브 생 로랑은 조각가 클로드 라란느와 협업하여 조젯 크레이프 소재로 만든 우아한 롱 드레스에 청동으로 형태를 딴 가슴 혹은 허리 조각 작품을 옷에 달았다. 이는 옷으로 감춰져야 하는 신체 부위가 조각을 통해 오히려 강조됨으로써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1979년 가을, 겨울 시즌에 이브 생 로랑은 파블로 피카소 오마주 컬렉션을 선보였고 연이어 1980년 기욤 아폴리네트와 장 콕도, 1981년 앙리 마티스와 페르낭 레제, 1987년 데이비드 호크니, 1988년 조르주 브라크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컬렉션에 도입했다. 특히 1988년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넣은 재킷은 자수의 대가인 장 프랑수아 르사주와 협업하여 만들었는데, 해바라기 문양에 35만개의 스팽글과 10만 개의 자개가 들어갔으며 수를 놓는 데 600여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브 생 로랑의 행보는 마크 제이콥스 등의 후배 디자이너들이 예술 작품을 도입해 컬렉션을 만들도록 영감을 주었다.



- 이국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



어린 시절을 남아프리카 오랑에서 보낸 이브 생 로랑은 아프리카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1967년 봄, 여름 컬렉션에서 이브 생 로랑은 아프리카의 밤바라 부족의 예술 작품과 민속 의상에서 영감을 받은 아프리칸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브 생 로랑은 아프리칸 컬렉션을 통해 오트 쿠튀르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소재인 조개껍데기, 나무 구슬, 동물의 이빨 모양 비즈 등을 사용했다.



더 나아가 1973년, 이브 생 로랑은 아프리카계 이만, 아시아계 티나 초우 등 다양한 문화적 백그라운드를 가진 모델을 기용하기도 했다. 고고한 오트 쿠튀르 무대에 흑인 모델을 세운 것은 이브 생 로랑이 최초였다.



1976년 이브 생 로랑은 오트 쿠튀르와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을 통해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에서 영감을 받아 러시안 룩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는 큰 호평을 받았고 이브 생 로랑도 자신의 컬렉션 중 이를 최고로 뽑았다고 한다.



1977년 7월에는 18세기 중국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선보이며 에스닉한 컬렉션 시리즈를 이어갔고, 이브 생 로랑의 영향으로 패션계에는 이국 취향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 여성 해방의 상징 시스루(See Through)



1967년, 페미니스트들은 브래지어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속옷을 태워 버리자고 주장하며 여성 인권 신장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브 생 로랑은 더 나아가 1968년 1월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로 가슴이 다 비쳐 보이는 파격적인 시스루 룩을 선보였는데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여성 해방의 상징처럼 여기며 환영했다. 당시 매우 과감한 디자인이었던 시스루 룩은 훗날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고 2010년을 전후해서는 연예인 뿐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매우 유행하여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옷이 되었다.


패션 이상의 가치를 보여주다

-르 스모킹 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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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생 로랑은 자신의 브랜드에서 훨씬 더 자유롭게 그의 혁신적인 패션디자인을 펼쳐나갔다. 대표적으로 '르 스모킹 룩'이 있다. 르 스모킹은 턱시도의 프랑스 이름으로 그 당시 남성들이 담배 냄새가 몸에 베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흡연실에서 입던 옷이었다. 이 옷을 여성에게 어울리도록 재탄생시켰고 편안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패션으로 승화시켰다.



당시 공공장소에서 바지를 입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시선이 많았는데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 룩'으로 인해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여성 패션에 최초로 바지 정장을 도입하여 '여성에게 자유를 입힌 패션 혁명가'라는 타이틀도 얻게 되었다.



- 사하린느 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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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는 아프리카 작업복에서 영감을 받고 '사파리 재킷'을 만들어 '사하린느 룩'을 탄생시킨다. 사하린느는 사하라 사막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긴 부츠로 여성미를 강조하고 작업복이 지니고 있는 특성인 활동성과 자유로움도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패션으로 혁명적인 여성룩을 제안한다.



이 밖에도 선원들의 재킷, 어부의 방수복 등 남성들이 주로 입었던 옷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여성을 위한 옷으로 재탄생시켜 패션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 몬드리안 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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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혁신적인 여성룩 이외에도 이브 생 로랑이 최초로 시도했던 패션이 있다. 바로 1965년 선보인 '몬드리안 룩'이다. 1965년 이브 생 로랑은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몬드리안 드레스를 선보였다. 몬드리안 드레스는 피에트 몬드리안의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과 같은 작품의 조형적인 컬러 블록을 프린트로 옮겨놓은 것으로 '하퍼스 바자' 1965년 9월호는 이 컬렉션을 '미래의 드레스 - 빳빳한 흰 저지 소재로 뚜렷하게 특징지어져 있고, 체형을 멋지게 나타내도록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드레스'라고 평했다.



몬드리안 드레스는 패션 잡지 역사상 가장 많이 촬영된 옷으로 기록되었고, 이브 생 로랑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확실히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패션계 최초로 예술작품과 패션을 접목시킨 사례이다. 이를 시작으로 피카소, 앤디워홀, 반 고흐 등의 다양한 컬렉션을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몬드리안 룩은 패션 사전에 등재될 만큼 영향력이 대단했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나는 여성이 내 옷 안에서 좀더 당당해지길 원한다'"



이브 생 로랑은 기성복 라인인 리브 고시 컬렉션을 통해 고상한 하이 패션과 대중적인 스트리트 패션의 높은 벽을 허물었다. 이브 생 로랑에게 패션이란 고상한 귀부인도 자유분방한 스트리트 패션을 입을 수 있고 반대로 자유분방한 소녀도 멋진 슈트를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브 생 로랑은 르 스모킹을 통해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팬츠 슈트를 여성도 입을 수 있도록 했고, 시스루 룩을 통해 감춰야 했던 여성의 신체를 드러냄으로써 여성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이브 생 로랑은 패션계에서 '진정으로 여성을 위로하는 옷을 만들었다'고 평가 받는다.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디 슬리먼'과 '안토니 바카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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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슬리먼 /사진=Saint Laurent 제공

이브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톰 포드에 이어 2005년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스테파노 필라티가 맡아 2012년까지 브랜드를 이끌었다. 아르마니 남성복과 미우 미우에서 경력을 쌓은 스테파노 필라티는 특유의 클래식한 감성과 이브 생 로랑을 예우하는 태도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다.



2012년 3월, 전 디올 옴므의 디자이너로 유명한 에디 슬리먼이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되었다. 이와 함께 브랜드명이 이브 생 로랑에서 생 로랑 파리(Saint Laurent Paris)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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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에디 슬리먼과의 4년간 인연을 뒤로하고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베르수스 베르사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소니 바카렐로가 생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안소니 바카렐로는 '상업적으로 제일 성공한 디자이너 10'에 꼽힐 만큼 이브 생 로랑의 뒷자리를 이어갈 충분한 실력이 있는 디자이너로 인정 받고 있다.



현재 생 로랑은 안소니 바카렐로의 디렉팅 아래 브랜드의 근간이 되는 모토와 헤리티지를 새롭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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