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에 갇혀버린 드라마
박상완의 드라마 공작소
<으라차차 와이키키 시즌 2>, <녹두꽃>
얼마 전 열렸던 제55회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의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눈이 부시게>를 필두로
그렇지만 모든 텔레비전드라마의 기획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은 작품성과 대중성 어느 한쪽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잊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종영한 <열혈사제> 같은 작품의 성과는 곱씹어봐야 할 부분이 많다. 사회의 부조리를 말하되 어쭙잖은 폼을 잡는 대신 B급 코미디 정서로 일관한 이 작품은 차별화된 기획의 좋은 사례다.
이와 비교했을 때 <으라차차 와이키키 시즌 2>는 안이한 기획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018년에 방송되었던 시즌 1은 그야말로 제대로 웃겼다. 그 웃음 속에는 20대 청춘들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담겨 있었고 그래서 시청자는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더불어 시즌 1은 텔레비전드라마에서 한동안 잠잠했던 시트콤의 부활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 2가 선사하는 웃음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아마도 이 불편함은 작품에 깔려있는 청춘에 대한 시선 때문인 듯싶다.
캐릭터의 설정과 관계, 에피소드의 구성 등 시즌 2는 시즌 1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면서 더 큰 웃음을 시도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시즌 2의 인물들은 전작과 달리 잘나갔던 과거가 있다는 것이다. 이준기(이이경)는 꽤 주목받는 연기자였고, 차우식(김선호)은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한 적이 있으며, 국기봉(신현수)은 봉황대기 최우수 선수 출신이다. 한수영(문가영)은 부잣집 딸이었고, 김정은(안소희)은 배우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차유리(김예원)는 호텔 셰프 출신이다. 전작이 특별히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청춘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였다면, 시즌 2는 찬란했던 과거와 사뭇 다른 남루한 현재를 살고 있는 청춘들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노력하는 이야기다.
별 것 아닌 것아 보이는 이 작은 차이는 시즌 1과 시즌 2를 결정적으로 구별 짓는다. 시즌 1은 희망이 잘 보이지 않음에도 노력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웃프지만 공감할 만한 부분이 존재했다. 반면 시즌 2는 잘나갔던 과거를 희망으로 삼은 인물들이 노력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안쓰러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전작이 사실은 꿈을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느낌이라면, 시즌 2는 꿈의 실현불가능성을 애써 망각하고 어떻게든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고단한 삶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실제 현실에서의 희망 유무와는 별개로 이러한 구도가 만들어진 이유는 결국 청춘에 대한 관점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세계의 속성을 본능적으로 파악한다. 젊은 세대일수록 그것은 더욱 민감하다. 경제적 양극화로 대표되는 변화의 불가능성이 현실화된 세계를 실제 청춘들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예전처럼 대기업에 들어가고 외제차를 몰며 강남에 아파트를 사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들은 꽤 많이 줄어들었다. 희망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중시한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게는 무기력해보이고,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때로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먼 미래가 아닌 현재를, 이루지 못할 그때가 아닌 매일 매일의 행복을 위해 산다.
이러한 세태를 캐치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을 재연하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을 그리는 것은 기성세대가 바라는 청춘의 상을 투영시킨 결과에 불과하다. 그들이 보기에 미래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청춘은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끊임없이 앞을 향해서만 달려온 이들이 만들어버린 것이 현재의 한국사회라고 했을 때, 질주를 포기하고 멈춰선 이들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청춘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청춘에 대한 꼰대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으라차차 와이키키 시즌 2>의 자승자박 기획은 <녹두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과 전봉준을 다루되 그것을 영웅 서사로 풀지 않고 가상의 형제 주인공을 내세워 가족사와 결합시킨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가족과 역사를 결합시켜 거대 담론 속 개인, 세계사적 개인으로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하는 방식은 매우 강력한 몰입을 일으킨다.
헌데 혁명을 둘러싼 인물들이 혁명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서 몰입 이후의 상황이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동학농민운동은 신분/종교/경제/국가 등 매우 다양한 맥락이 뒤얽혀있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잡한 맥락을 모두 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극적 상상력이 요구되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지나치게 전경화된 나머지 정작 중요한 혁명 담론은 저만치 뒤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전봉준(최무성)이 백이강(조정석)을 살려주는 상황은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라는 이유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아버지의 악행을 보고 자랐음에도 모른 척하고, 그럼에도 굶어죽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고, 하지만 봉기한 백성들을 진압하기 위해 나서는 백이현(윤시윤)은 일관된 행동원리를 찾아보기 힘든 분열적 인물이다. 송자인(한예리) 역시 상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랑에 빠진 여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이질적으로 결합해 모순적인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백가(박혁권)만이 멀쩡한 극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보여주는 것은 혁명을 이용하는 가족이기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물론 이것이 혁명이라는 거대 담론을 둘러싼 아전투구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계산된 것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그만큼 시청자에게 피로감만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녹두꽃>은 혁명의 본질에서 벗어난 외피가 너무 많다. 혁명은 불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태우거나, 다 태우지 못한 채 소화되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불길을 당기는 트리거가 분노라는 점이다. 뭔가가 나의 삶을 훼손하고 있는 상황에서 참고 참았던 분노가 폭발해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 혁명이다. 혁명으로서 동학농민운동의 분노는 무엇인가. 굶어죽는 농민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여기에 무언가 거창한 것이 덧씌워지는 순간 이 본질은 훼손되고 혁명은 지적유희에 불과해진다. 그런 점에서 전봉준을 영웅화하지 않고 뭔가 색다른 이야기로 꾸며보고자 하는 시도는 오히려 독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은 영웅화되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인물이다.
한국 판타지 소설 중 최고봉인 이영도 작가의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저기에 X 같은 새끼들이 있어서” 칼을 들었다고. 물론 이 말은 극한의 전쟁 상황에서 나온 말이어서 <녹두꽃>과는 다소 맥락이 다르기는 하지만 혁명의 본질인 분노, 그것의 순수성과 파괴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곱씹어볼만 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3년 전 촛불혁명을 떠올려보자. 시국에 편승하려는 여야의 가당찮은 정치적 미사여구들은 광장의 시민들에게 거부되고 퇴출되지 않았던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분노, 그것이 혁명의 본질이라 했을 때 생존의 문제에서부터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혁명이라 해도 부족함이 전혀 없다.
<녹두꽃>은 이러한 동학농민혁명 자체를 그리기보다 그것을 통해 현재를 말하고 싶어 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재적 재해석이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다. 다만 현재를 말하고 싶었다면 굳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특별하면서도 자주 다뤄지지 않았던 사건을 가져올 필요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2019년은 촛불혁명 이후의 시대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훼손한 수많은 적폐 세력에 대한 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혁명의 지속, 혹은 미완에 대한 자성이 필요한 현 시점에서 <녹두꽃>의 혁명에 대한 지적 유희는 이분법적 편 가르기를 통해 늘 프레임에서 비껴가는 그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드라마 <으라차차 와이키키 시즌 2>, <녹두꽃>별점 점수 동일
별점 |
대중성 |
★★★★☆ 8 |
평균 |
최종 별점 |
작품성 |
★★★★☆ 7 |
7.5 |
8.0 |
박상완(드라마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