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하고 아름다운 신(身)을 가진 도깨비들 위하여
강희철의 문화 시론
오랜 만에 쓰는 글이지만, 역시나 ‘시론’을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영화나 소설보다 더한 이 공포스런 현실에 제대로 실천적인 저항도 못해 봤는데, 스스로를 블랙리스트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통해 삶을 차디차게 보게 해주니 말이다.
요즘 현실에서 갑자기 새삼스럽게 시선이 집중되는 나쁜 도깨비들이 많다. 20년간 개인재산을 억 단위에서 조 단위의 돈을 불려내는 삼성 대기업 부사장이라는 남성 도깨비와 대통령도 좌지우지하며 나라의 통치까지 대신 했던 여성 도깨비가 얼마나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드라마 같은 삶이 가능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욕심만 부풀리는 공포스런 도깨비들이 현실에 있는 까닭에 오히려 드라마는 따뜻한 환타지로 도깨비의 또 다른 이면들을 그려내고 있다고 본다. 도깨비란 존재를 역사적으로 탐색해보면 단순한 요괴가 아니라 농경중심의 사회에서 한 마을의 농사를 돕던 풍요의 신, 대지의 신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성적이면서 태양신으로 보이는 계열과 다르게 음성적 기운을 가지며 주로 밤에 능력을 발휘하는 달과 물, 대지를 아우르는 신으로 그려진다.
예를 들어, 요즘 TVN에서 방영하는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라는 드라마를 보면, 그러한 주술적 환타지를 현대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주인공인 도깨비는 음성적 신의 형상으로 그려지기에 달을 슈퍼문으로 만들고, 비를 내리며, 갑자기 꽃이 만개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도깨비만 보더라도 현실적 맥락과 연결된 ‘신(神)’의 이미지를 어떻게 살펴볼 것인가의 문제에서 현실과 환타지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이 신의 형상이 악한 신이든 착한 신이든 우리 공동체의 문제와 관련되어서 형상화된 신이라는 점에서 이는 하나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뉴스나 드라마를 통해 등장한 이 막강한 도깨비들이 사후나 전생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염려하는 것과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그려내고 있는 ‘지금-여기’의 문제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억압적이고 공포스런 현실을 그려내는 몬스터 같은 도깨비들과 드라마와 같이 전생과 사후의 문제로 연결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도깨비들의 놀이에 너무 ‘현혹’되지 말자. 스스로가 현실의 도깨비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면 미래를 그려내는 환상적 놀이가 괴물같은 존재나 드라마 속 존재들만 벌이는 주술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연이어 온 대지(광장)의 촛불들은 무서운 밤을 같이 헤치며 풍요롭고 찬란한 도깨비불들로 우리의 참담한 몸들이 아름답게 누릴 미래를 그려내고 있으니.
강희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