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애도하는 방법
영화 <애나벨>(2017)과 <장산범>(2017)
올해 여름 기다리던 공포 영화 두 편이 개봉했다. 예전에는 여름이면 공포 영화가 많이 개봉하였는데 요즘은 액션 영화가 주류를 이루는 것 같다. 아쉬운 마음으로 여름의 마지막을 보내던 차에 필자는 최근 개봉한 <애나벨>과 <장상범>이라는 두 영화를 연달아 보았다. 흥미롭게도 두 영화의 공통점은 죽은 아이를 애도하는 부부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래서 두 영화에서 애도의 과정이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형식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 <애나벨>의 경우 사무엘 멀린스 부부는 죽은 딸을 되찾기 위해 인형 속에 딸의 형상을 한 다른 존재를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그들은 죽은 자신의 딸이 돌아왔다는 기쁨 속에 휩싸이지만 곧 후회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스러운 ‘꿀벌’이라고 생각했던 딸이 알고 보니 악령이었기 때문이다. 악령은 서서히 자라나 사무엘 멀린스 부부의 집 전체를 장악한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의 도움으로 악령을 봉인한다. 12년 후 고아원의 소녀와 수녀가 사무엘 멀린스 부부의 집에 이사를 온다. 문제는 이때부터 애나벨의 봉인이 풀리고 악령은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위협하며 영혼을 빼앗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사무엘 멀린스 부부는 살해당하고 고아원의 소녀들과 수녀는 천신만고 끝에 집을 탈출한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던 사무엘 멀린스 부부는 12년 동안 악령이 봉인되어있던 집을 왜 떠나지 않았을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자신들의 집을 떠나지 않았을까? 또한 굳이 인형을 봉인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태워서 없애버리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필자의 관점에서 인형이 세상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무엘 멀린스 부부가 마지막까지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무엘 멀린스 부부는 12년 후에도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실상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들의 딸이 악령이라고 해도 그녀의 흔적을 세상에서 지우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애나벨 인형에 봉인된 악령은 사무엘 멀린스 부부의 집착이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구현된 경우이다. 그들의 집착이 깊어질수록 악령은 타인의 영혼을 흡수하며 자라나는데 이것은 사무엘 멀린스 부부의 애도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표지인 셈이다.
공포 영화는 사운드와 시각적 장치의 일치와 불일치를 통해 ‘공포’라는 감각을 생산한다. 사운드와 시각의 일치와 불일치를 잘 활용할수록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것의 낯설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사운드는 관객에게 어떠한 대상을 시각적으로 인지하기 전에 먼저 대비하라고 예고하거나 혹은 특정한 감정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사운드는 배경효과가 아니라 영화의 감각을 구체적으로 생산하는 장치이다.
예컨대 어두운 문 밖을 향해 장난감 총을 쏜다고 해보자. 처음에 규칙적으로 들리던 총탄의 소리가 어느 순간 들리지 않으면 우리는 문 밖에 어떤 미지의 존재가 있음을 예감하게 된다. 그리고 관객은 상상력을 동원하며 미지의 대상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즉 사운드와 시각적 이미지의 불일치는 일상적인 것의 낯설음을 생산한다. 어쩌면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며 우리는 사물 그 자체의 존재가 주는 공포를 맛본다.
영화 <애나벨>은 사운드와 시각적 이미지의 조화가 잘 분배되어 있다. 괴기스러운 괴물이나 혹은 악령의 모습을 재현하기 보다는 미지의 존재를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사운드와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일상적인 것의 낯설음을 환기한다. 영화는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인간의 감각적 확신을 교란한다.
영화 <장산범>은 실종된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희연 부부의 슬픔을 다룬다. 장산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희연의 내면세계가 드러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영화의 소재인 장산범은 일종의 맥거핀이다. 장산범이란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하여 사람을 유혹하여 사냥하는 범의 생김을 한 귀신이다. 부산 지역의 민담 속에 나오는 귀신인데, 영화는 장산범이라는 매개를 활용하여 희연의 내면에 감춰진 집착과 슬픔을 드러내고자 한다.
영화는 내러티브와 인물 설정에 있어서 한계를 노출한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시어머니라는 존재이다. 영화 속에서 시어머니는 존재감이 없다. 보이지 않는 장산범의 실체를 관객들에게 인지시키기 위한 희생자의 역할에 한정된다. 그리고 희연 부부의 딸 준희가 작품에 등장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우연히 산에서 만난 여자애가 희연 부부의 딸 준희와 이름과 목소리가 닮았다는 설정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인상이다. 장산범이라는 존재의 주의를 환기하는 목적으로 보이는데 이후 준희라는 존재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서 시어머니와 준희는 영화적 설정을 위해 등장하는 것이 분명한데 불명확한 인물들의 성격은 이야기의 구성에 있어서 느슨하다는 인상을 준다. 영화에서 살아있는 인물의 역할을 하는 것은 희연과 장산범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여자애 밖에 없다. 희연이 집 주변을 배회하던 무당으로부터 장산범과 관련한 진실을 알고 남편을 구하기 위해 여자애와 장산범이 살고 있는 동굴로 들어가는 장면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영화는 마지막 결말의 한 장면을 위해 영화의 대부분의 시간을 희생시킨다. 장산범과의 대결이 끝나고 동굴에서 남편 민호와 함께 도망친 희연이 뒤에서 자기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스스로 목소리의 실체를 알면서도 되돌아가는 설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만약 희연이 남편과 함께 장산범의 동굴을 빠져나갔다면 그녀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끝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희연이 동굴 속으로 아들의 목소리를 쫓아 돌아감으로써 애도는 실패한다.
영화 <애나벨>와 <장산범>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도가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 <애나벨>은 죽은 자식을 잃은 상실감으로 시작된 애도가 결국 집착의 방식으로 전환됨으로써 가져오는 비극적 결말을 이야기한다. 반면 <장산범>은 애도가 실패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모성애에 주목한다. <장산범>은 아이를 향한 모성의 집착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자기희생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본다.
가치와 취향의 문제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 <장산범>에서 모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기존의 사회적 가족 관계 모델의 토대인 모성의 자기희생과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왜 모성은 항상 이해하지 못할 선택을 하고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것으로 그려져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필자는 영화 속에서 희연의 선택에 의문이 남는다. 희연은 왜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특히 동굴 밖에 남겨진 준희에 대해 왜 고려하지 않을까? 영화의 결말은 명료하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어렵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장산범>은 공포영화의 형식을 취하지만 대중적인 가족드라마의 가치관을 따른다. 가족의 사랑 그리고 자식을 향한 모성애라는 관습적인 가치에 기초한다. 영화는 신선한 소재를 취했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사운드를 활용한 공포라는 프레임에 기초하여 홍보하고 있지만 사운드가 생산할 수 있는 공포와 긴장감이 떨어진다. 더욱이 결말은 관객들의 감정에 호소한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은 소재이지 사운드가 주는 공포가 아니다. 사운드와 시각적 이미지의 일치와 불일치가 주는 낯선 감각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느냐 하는 것이 공포 영화의 묘미이다.
심우일(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