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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억하고 말할 것인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불수의근과 수의근이 있는 것처럼, 기억에도 불수의적 기억과 수의적 기억이 있다. 자신의 모든 근육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생각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심근이나 내장근 같은 불수의근이 있지 않은가. 기억도 마찬가지다. 베르그송은 의식하지 않은 채 돌발적으로 찾아오는 기억이 진정한 것이라고 말했고, 프루스트는 그러한 기억―마들렌 과자에 의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썼지만, 그러한 개별적 기억만이 우리가 살아온 시간과 그 위에 새겨진 의미로서의 기억 전부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5월 광주의 기억은 그렇게 불쑥, 찾아오지 않는다. 벌써 한 세대 이상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우리의 제일 관심사는 언제나 ‘개인’에 머무른다.

 

또한 80년대 초반을 살았으되 그 기억은 별반 없는 내게 그것은 ‘공동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동의 기억은 이때 불수의근의 사전적 뜻, ‘의지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근육’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되고 의도되며, 선별되고 관리된다. 5·18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안타깝게도 5·18광주사태가 5·18민중항쟁·민주화운동으로 재호명되고, 폭도가 시민군으로 재정의되는, 공동의 기억이 수정되고 변형되는 과정일 뿐이니, 국가가 독점하고 주도하는 것은 경제와 복지정책만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5·18은 박제된 사어만은 아니다. 한강의 여섯 번째 장편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보자.

어떻게 기억하고 말할 것인가

『소년이 온다』는 34년 전 5월의 광주를 ‘기억’하게 하는, 그 온당한 기억의 제의를 위해 지금 여기에로 ‘오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기억인가. 아니,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소년이 온다』는 5·18이란 무엇인가, 내지 왜 일어났는가라고 묻지 않고, 5·18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라고 묻는다. 망각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의도의 산물이기도 하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것이 인간 아닐까. 망각은 기억이 그러하듯 능동적인 프로세스다.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기억, 잊지 말아야 할 기억도 있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져도 트라우마는 남고, 교련복을 입고 도청에 남았던 열다섯 살의 동호는 우리에게 ‘다시’ 온다.

 

『소년이 온다』는 5·18의 현장을 재구성하거나 그 역사적 의미를 점검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동호와 정태가 화자로 제시되는 1,2장을 제외하고는 5년 후(3장), 10년 후(4장), 20년 후(5장), 30년 후(6장), 현재(에필로그)의 시간적 구성을 취함으로써 과거보다는 오늘을 다룬다. 『소년이 온다』는 요컨대 ‘5월’이 ‘오늘날’에 이어지고, ‘광주’가 ‘대한민국’에 이르는 사후의 의미를 추체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점차 외면되고 망각되어, 사라지고 말 위험으로부터 초혼이라도 하듯, 증언과 고발을 넘어 있다. 밀란 쿤데라는 어디선가 “권력에 대항하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적었다. ‘기억’한다는 것, 무언가를 잊지 않는 ‘행위’와 잊지 않겠다는 ‘결의’에는 그렇게 저항과 투쟁의 의미가 새겨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기억함으로써 ‘싸운다’.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

5월항쟁은 그렇다면 어떤 기억인가. 그것은 특히 강하고 집합적이고 숭고한 어떤 것으로서, 어찌 보면 우리시대의 기본 멘탈과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심상구조는 흔히 순응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파편적이지 않던가. 이에 비해 『소년이 온다』는 강렬한 공동의 기억, 숭고하면서 야만적이고, 또 참혹한 동시에 위대한 과거를 소환함으로써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동호와 동호를 ‘너’라고 부르는 이들의 기억을 따라가는 일은 슬픔과 아픔 이전에, 다음과 같이 그 자체로 불편하다.

그 순간 왜 분수대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짧게 감은 눈꺼풀 속에서 유월의 분수대가 눈부신 물줄기를 뿜었다. (…중략…) 책가방을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훔치며 전화기에 동전을 넣었다. 114 버튼을 누르고 다시 기다렸다. 도청 민원실 부탁합니다. (…중략…)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어떻게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69쪽)

방학하는 날까지 그녀는 날마다 정류장 옆 공중전화 부스에서 도청 민원실에 전화를 걸었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손바닥에서 배어나온 땀으로 수화기가 끈적끈적 했다. (…중략…) 그만 전화해요, 학생. 학생 같은데 맞지요.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97쪽)

“분수대 앞에 던져진 주검들”(97)이 치워지고, 그 자리에서는 다시 물이 나온다. 한 달 만에 분수가 다시 가동되는 것을 못견뎌하는 ‘은숙’은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말 그대로 불편하게 전해준다. 예문에서처럼 주검들이 사라진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듯 재개되는 일상은, 간발의 차이로 주검이 되지 않는 자에게 형벌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렇다면 5월의 기억이 망각된 자리, 혹은 더러 폄훼되고 왜곡되어 오도된 자리에서는 또 어떠한가. 더 이상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통각의 맹점처럼 우리의 공통감각이 무뎌지고 녹슬어 갈 때, 소년은 또 다시 우리에게 ‘온다’.

 

어떻게 기억하고 말할 것인가

『소년이 온다』는 그러나 광주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 타자의 자의적 폭력을 또렷이 응시할 뿐 아니라(출판사 직원이 된 은숙의 뺨 일곱 대를 잊기 위한 일종의 의식을 보라),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에서처럼 알 수 없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묻는다.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206쪽)는 것처럼 특별하게 잔인한 폭력이 있는가, 라고 소설은 묻는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회귀함으로써, 야만성과 위대함의 양면을 지닌 인간의 조건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소년이 온다』는 5·18에 대한 정당한 성찰의 하나일 뿐 아니라, 폭력과 존엄의 사건이 동시 발생하는 인간에 대한 온당한 성찰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지만 ‘5·18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내지 ‘(5·18에 대한) 어떤 소설이 가능한가’와 관련해, 좀 더 생각해볼 문제들이 있다. <꽃잎><화려한 휴가>를 비롯해 이미 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있어왔다. 『소년이 온다』는 어떤가. 5·18이 아니더라도 참혹한 일을 다루고 비극에 대해 말하는 작품을 읽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그것이 혹시 잔혹함과 악행을 전면화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만)을 중점화하지 하지(는) 않는가. 혹은 희생의 숭고함과 정신의 위대함을 목적지로 하지 않는 서사, 피해자-가해자의 상투적 구도가 반복되지 않는 인물의 관계, 가학-피학의 전형적인 감정구조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가.

 

원 사건이 끔찍이 악하기에 그렇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비극적 서사에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을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다만, 잔혹한 탄압과 숭고한 항쟁의 구도 내지 선과 악의 이분법적 분할과 그 대치는 이미 되풀이되어 온 만큼 지나친 기시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소설은 원래 총체적 인식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스스로 미지의 길을 떠나는 존재가 아니던가. 이 대목에서 ‘새로운’ 5·18 소설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가만히 물어본다.

 

박진영(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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