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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팔아요

김혜연의 이미지를 파는 편의점

조치언 감독의 <약장수> (2015)

<약장수>는 제목 그대로 노인들에게 ‘약을 파는’ 사기꾼 이야기다. 옛날에는 이름모를 만병통치약이지만 요새는 팔아먹는 제품 종류가 다양해졌다. 오메가 쓰리 샴푸, 춘천옥 장판, 다람쥐 마사지기, 오징어 먹물 염색약... 홍보관에서 사기꾼들은 매일같이 노래 부르고 춤 추고 놀아주고 선물을 안겨주며 두터운 ‘라뽀’를 형성한 다음, 거부하지 못하는 타이밍을 잡아 몇백만 원어치의 물건을 팔아먹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약장수>의 조치언 감독은 분명 해당 업종(?)에서 일해봤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 정도 이야기가 나올 수가 있을까.

<약장수>에는 여러 가지 부모 자식 관계가 나온다. 일단 검사 아들과 홀어머니 옥님(이주실) 엄마가 있다. 옥님은 장한 어머니상을 받은 모범적인 어머니이다. 그리고 홍보관에서 벌어지는 유사 엄마-아들 관계가 있다. 물건을 파는 약장수들은 홍보관에 모여드는 할머니들과 유사 엄마-아들 관계를 형성한다. 이 관계가 단단해질수록 약을 팔아치울 확률이 높아진다. 그 안에 세 번째 관계, 주인공 일범(김인권)과 옥님 엄마가 있다. 딸과 엄마의 관계도 있다. 옥님 엄마는 각각 부자 며느리와 미용사 딸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한다. 영화에서 비중은 적지만 이들은 아들-남편의 출세를 위해 희생되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옥님은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주실이라는 베테랑 연극 배우가 필요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일범과 일범의 아픈 아기가 있다. 도대체 약장수가 왜 약을 팔아대겠는가. 이들도 집에 가면 돈에 쫓기는 가장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처음 보는 노인들에게 엄마 엄마 불러대며 약을 파는 것이다. 겉으로는 온갖 애교를 떨어대지만 집에 가면 이들도 엄연한 부모이다. 자식도 따지고 보면 부모라는 것, 그렇기에 삶을 위해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 한국의 노인들은 자주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 눈앞의 자식이 마냥 어린 아기인 것 같다. 그런 자식이 늘 곁에 붙어앉아 재롱을 부리며 용돈을 졸랐으면 좋겠다. 이 소원이 한국의 독특한 부모 자식 관계를 만드는 깊숙한 원동력이다. 약장수들은 그 원동력을 이윤으로 바꾸는 것 뿐이다.

여기 와서 우울증 고친 엄마들 많아!

홍보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일범은 노인들을 등쳐먹는다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에 정을 붙이게 된다. 외로운 동네 할머니들과 밥도 먹고 놀다가 자연스레 마음이 풀어진 결과이다. 박철민이 연기하는 철중 팀장은 “우리가 오전 두 시간 오후 두 시간 놀아준다. 요즘 하루에 네 시간씩 놀아주는 자식이 어딨어? 일 년에 두 시간도 안될 거다. 여기 와서 우울증 고친 엄마들 많~아. 물건이 비싸다고? 우리 아니면 중소기업들이 어디서 물건을 팔아? 우리가 대한민국 유통 책임져 주는 거야.”라며 그럴싸한 대의명분을 붙여준다. 이 말에 위로받던 일범의 마음은 반품 물건을 때려부수는 망치에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사랑을 팔아요

겉으로 보면 이 영화는 부모를 내팽개친 자식들과 빈자리를 메워주는 약장수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 부분만 다뤘다면 <약장수>는 홍보관에서 팔아대는 싸구려 만병통치약 같은 영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냉랭하다면 분명 이유가 있다. <약장수>는 그 이유를 찾아내어 여기저기에 배치해 두었다. 따져보자. 옥님의 잘난 검사 아들은 왜 엄마를 홀로 내팽개쳐 두었을까? 영화 속에서 옥님은 젊은 나이에 혼자 몸으로 아들을 검사로 출세시켰다. 그 과정은 아마도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어린 아들이 조금이라도 놀고 싶어하면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여느 엄마들이 그렇듯 자신을 위해 출세해야 하고 그러자면 하고 싶은 걸 제쳐두고 공부하라며 다그쳤을 것이다. 옥님의 착한 아들은 불쌍한 어머니를 위해 자기의 욕망을 억누르고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 검사가 되었다. 옥님과 아들이 출세할 때까지, 과연 다정한 말 한 마디 오간 적이 있었을까. 노래라도 부를라치면 그 시간에 공부를 하라고 다그쳤을 게 뻔하다.


그 와중에 옥님의 딸은 집안의 곁가지로 밀려났다. 옥님은 딸에게 분명 미안해한다. 일범에게 검사 아들 자랑이 아니라 딸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그 증거이다. 하지만 돈이 급하면 딸에게 손벌리는 습관은 고치지 못했다. 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딸을 착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된 – 역시 부모가 된 미용사 딸도 자식을 키우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올케를 통해 엄마에게 항의한다. 자신을 더 이상 착취하지 말아달라고.

나는 부자 며느리가 옥님에게 전화하는 장면을 보면서 궁금했다. 이 여자는 왜 옥님의 아들과 결혼했을까?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면 결코 상대 부모에게 거칠게 굴지 못한다. 하위 계층에 대해 섬세한 뒷배경을 배치한 조치언 감독도 이 부분에 대해 해명이 없다. 부유한 여성들에 대한 편견이 집약된 상투적인 장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동원하자면, 아마 이 부자 며느리는 친정에 떠밀려 결혼했을 것이다. 사윗감을 부모 멋대로 고르는 버릇은 한국 사회 어느 집이나 도찐개찐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위해 딸을 희생하는 버릇도 비슷할 게다. 하물며 검사 사윗감을 들이는 부잣집이야 말해 무엇하랴. 부자 며느리 입장에서 보면 사랑해서 결혼한 남편도 아니고, 그 남편은 시어머니와 영 어색하고 불편하다. 시누이도 시어머니에 불만이 있다. 그 사이에 며느리가 어설프게 끼어들다간 깨지기 딱 좋다. 조용히 돈 쥐어주는 게 상책이다. 사실 돈이야말로 시집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기도 하고.

 

만약 그녀가 정말 옥님의 아들을 사랑해서 부자 친정을 설득해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시어머니에게 돈이 필요하면 직접 말하라고 다그치는 지경까지 굴러간 과정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해서 이룬 가정이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새로 영화 한 편 찍어야 한다.

엄마, 도와줘

검사 아들 둔 옥님의 사정도 이러할진대 홍보관에 모여드는 다른 노인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상상은 생략”하자. 홍보관 노인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다. 약장수들은 자식에게 받고 싶어하는 것들을 제공한다. 선물 주고 노래 불러주고 같이 밥먹어 주고 놀아주고 수다도 떨어준다. 이러한 감정 노동이 쌓이고 쌓인 순간 약장수들은 노인들을 꼭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인다. “엄마, 도와줘. 이번만 도와줘. 딱 한 번만 팔아 줘.”

이러한 약장수와 노인의 관계는 한국 사회의 부모와 자식 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자식은 재롱을 피우고 부모는 귀여워서 용돈을 쥐어준다. 자식이 크면 재롱은 성적표나 선물이 되고 용돈은 전세금이나 생활 자금이 된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유지하는 힘은 사랑이 아니라 돈에서 나온다. 돈이 없으면 부모 노릇 못하는 게 현실이다. 돈이 없으면 자식에게 체면도 못 세운다. 사실 자식 손자들에게 집이고 명품이고 팍팍 질러줄 자금이 있다면 홍보관에 나와 앉아 있을까? 심심하다 싶으면 전화 딱 걸어서 “야 요즘 얼굴 본 지 오래됐는데 여행이나 가자!”할 거다.

사랑을 팔아요

미수금을 받으러 간 일범은 옥님을 다그치는 대신 노래를 불러준다. 노래를 불러주는 것은 돈에 근거한 관계를 조금이라도 거부하려는 몸부림이다. “엄마, 나 돈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니에요.” 돈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받으러 온 것이다. 무조건 주고 받는 게 사랑이다. 그래서 일범은 <무조건>을 부른다. “그대에, 그대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이렇듯 심오한 노래를 성접대 현장에서 부른 작자는 그 자리에서 그냥 죽어버려야 한다.)
 

영화는 이렇듯 얽힌 관계에 바로 해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고 있지만 논하자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암시를 주자면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자식들은 부모가 되고 부모들은 언젠가 세상을 떠난다. 언제까지나 누군가의 자식이나 부모로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가족 외의 사회적 관계에 너그럽지 않다. 특히 여성들이 가족 외의 관계를 만들려 하면 완강한 타성이 그녀들을 압박한다. 아들 같아서, 언니 같아서 만나지 않으면 혼날 각오를 해야 한다. 그게 홍보관에 모여드는 노인들이 죄다 여성들인 이유이다. 사실 이 영화는 여성들의 욕구에 대해 제법 이해가 높다. 그걸 분석하자면 따로이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김혜연(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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