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에세이 『너 없이 걸었다』
"너 없이 걸었다 그러나 당신 안에서 걸었다"
안녕하세요? 문학동네 임프린트 난다에서 책을 만들고 있는김민정입니다. 가끔 ‘난다김’이라는 이름으로 신간에 부쳐 편지를 쓰곤 하였는데, 잘들 지내고 계셨는지요. 어느덧 9월을 바라보는 여름의 끝자락이네요. 어디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인지 꽤나 거세기도 하여마음이 꽤 차분해지기도 했던 오늘 같아요. 그런 센티멘털한 감정 뒤에는 제 손에 든 이 책 한 권이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도 같고요.
"기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역으로 가는 시간은 대략 네 시간 삼십 분.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면 대략 열 시간 혹은 열한 시간. 대충 잡아 열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에 당신은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까운 곳에 우리는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녁이 더 비릿하다." -p52~53
제가 만들고 제가 좋아하면 비호감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도저히 좋은 걸 감출 수가 없어서요, 아픈 것도 숨길 수가 없어서요. 그러니까 허수경 시인의 신작 에세이 『너 없이 걸었다』얘기를 하려고이렇게나 서두를 잡아먹은 저랍니다.
『너 없이 걸었다』는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 가운데 다섯번째 권으로 뮌스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용산, 경주, 뉴욕, 류블랴나를 지나 독일까지 왔네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허수경 시인이 태생적 고향인 진주가 아니라, 시와 밥벌이의 터전인 서울이 아니라, 독일 뮌스터에 가 23년째 살고 있는 이유로요. 오지를 않고 있는 이유로요. 오지를 못하고 있는 이유로요. 무엇보다 저는 시인의 시만큼이나 시인의 산문을 너무도 사랑해왔지요. "따뜻한 인간은 언제나 따뜻하게 닿는 거, 이게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의 기반" 이라는 시인의 말에 아마도 평생을 기대온 듯도 해요. 따뜻함, 인간, 언제나, 닿기, 믿음, 이라는 단어들.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뮌스터 풍경 |
이 책의 구성은 묘해요. 시인이 뮌스터 거리를 걸을 때마다 떠오르는 독일 시인 열다섯 명의 시를 챕터마다 한 편씩 머리에 두고 글을 전개시키고 있어요.
"뮌스터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벤치 한구석에 앉아 트라클의 시를 읽다가 문득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리. 그대들도 그러리나, 그대들의 도시에 살면서 존재는 시리고 비리리라. 마치 어시장의 고무 다라이 속에서 갑자기 어느 손에 잡혀 시장 바닥에 던져진 혼자인 작은 졸복 한 마리처럼." -p26
여러분은 걸으면서 보통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요. 생각 없이 걸을 수도 있겠지만 저 같은 경우는 보통 걷겠다, 라고 작정한 날은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매고 길을 나서는 것 같아요. 발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머릿속은 자꾸만 과거로 가지요. 그렇게 지나간 일들과, 지나친 사람들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떠올리지요. 부질없는 일인 것도 알지만 자꾸 그러고 있지요. 그래도 어쩔 수가 없지요. 평생 사랑하지 않고 사람은 아마도…… 없을 테니까요.
"내가 그립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리움을 발설하지 못할 장소와 사람에 대해 나는 자주 생각하곤 했다. 원치 않았던 이별과 길에서 만났던 수많은 여관들과 낯선 사람들. 다시 찾아올 이별과 사랑 같은 것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당신이 있었다. 내가 누구라고 정의할 수도 없는 당신이. 너무나 흐릿하고 아득해져 이제 당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당신이. 멀리서 불러본다, 당신이여……" -p63
트라클이나 괴테, 하이네, 쉴러처럼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시인들도 있지만 '젤마 메르바움 아이징어'처럼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시인도 있지요. 젤마는 제가 요즘 깊이 공부하는 시인이기도 해요. 열여덟 나이에 전쟁병이라는 발진티푸스로 목숨을 잃은 소녀. 루마니아 체르노비치 출신의 독일계 소녀. 열다섯 살부터 쓰기 시작한 시집 한 권을사랑하는 연인에게 바치고 죽은 소녀. 연인 피히만은 팔레스타인으로 떠날 운명이었고, 그는 제 운명을 예감한 듯 그 시집 원고를 소녀의 친구에게 맡겼다지요. 피히만이 탄 배는 결국 침몰해버렸지만,소녀의 친구 덕에 시집 원고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지요. 폴란드를 지나 헝가리로, 체코로,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지나 독일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배를 타고 이스라엘로 가는 긴 여행 동안 친구의 배낭에 들어 있던 소녀의 시집 원고. 훗날 은행원이 된 친구 덕분에 소녀의 시집은 은행 금고 속에 오랫동안 보관될 수 있었고 독일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지요. 이렇게 긴긴 소녀의 사연을 길게 전하는 이유는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어요.
"선연히 저 벽돌담처럼 햇살을 받으며 내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들이 있는 어느 날. 마음의 지층 아래에서 숨쉬고 있었던 그 모든 것에게 붙일 이름이 있다면 그리움이라는 이름 말고 또 어떤 이름이 있으리." -p117
처음 허수경 시인으로부터 원고가 도착했던 그날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떨렸고요, 설렜고요, 그래서 바로 출력을 걸어 읽기 시작하는데, 도대체 종이가 넘어가질 않더라고요. 밑줄을 긋고 한참을 멍해져 있느라 혼미하더라고요. 시적인 것, 서사적인 것, 드라마적인 것이 이 한 권에 들어 있었어요. 매 페이지마다 극적인 순간들이 담겨서 주저앉게 만들었어요. 느리고 천천히 헤매면서 만들어야겠다…… 어쩌면 이 책의 운명은 기원전 6세기경에 시작된 도시 뮌스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묵히게 되겠구나……제 게으름에 대한 변명을 포장하기 위한 말만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어려웠습니다. 어떻게 내 읽음을 여러분에게 전할 것인가. 어떻게 읽히게 할 것인가. 이 묵직함을, 이 통증을, 이 건드림을, 이 불편함을.
총 열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번 책에서 도저히 밑줄을 긋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한 대목들이 매 페이지마다 눈에 띠는데 이는 이방인으로, 점점 우리말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우리말을 고파하고 우리말의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고독이 빈번히 들키기도 하는 까닭이 아닐까 해요. 시인은 “낯섦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고 했지요. 시인은 “고독에는 대가가 있다”고도 했지요. 그러나 시인을 버티게 해준 건 무엇보다 ‘시’의 역할이 컸지요. 그곳까지 가서 시라니, 그곳에서마저 시라니, “시를 통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풍경들. 그냥 그렇게 스쳐가는 이방의 순간들. 시들을 읽으면서 그 순간들이 갑자기 가슴에 먹먹하게 차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는 천생 시인 허수경.
"소녀가 나에게로 와서 빈 도화지를 내밀었다.
그림 그려줘.
뭘 그려?
그냥...... 네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그려달라고 말하는 소녀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꽃이 가득 핀 마당에 서 있는 작은 집을 그렸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분주하게 오가며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여자들을 그렸고 여자들 앞에서 구슬치기를 하는 아이들을 그렸다. 작은 구름 같은 연기가 나오는 굴뚝을 그렸고 그 옆으로 날아가는 새를 그렸다. 그림 그리기를 마치자 소녀는 나에게 말했다.
창문 앞에 호두나무 한 그루도 그려줘.
왜?
겨울이 오잖아, 다람쥐도 먹을 게 있어야지."
-p 191~192
허수경 시인 |
이 책은 우리에게 ‘인간’을 묻고 ‘삶’을 묻고 ‘별’을 묻고 ‘존재’를 묻고 ‘상처’를 묻고 ‘죽음’을 묻습니다. 시인이 시인에게 던지는 자문인데 반복에 반복을 거듭할수록 읽어나가는 우리에게는 질문에 질문이 됩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시인의 질문.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그대들이 있어서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던 적도 있었다, 는 멜로디를” 흥얼거릴 줄 아는 시인. 사는 게 추하다 할지라도 시가 있어 ‘위로’를 배운다는 시인. 그런 시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지요. 사랑은 끝났지만 사랑은 또한 계속될 수 있을 거란 데서 희망을 배우게 하고, 사랑이 끝났으니 사랑했던 그 사람을 더는 볼 수 없음으로 절망을 배우게 하지요. “그는 ‘너’를 발견했다. 그러자 그만이 쓸 수 있는 시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사랑은 그에게 언어를 주었다”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시인에게 ‘사랑’은 이렇게나 ‘시’로 다지요. ‘시’로 전부 다인 셈이지요.
시인을 이야기하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손’이지요.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내민 시인만의 말 또한 손의 일환이기도 하지요. 손은 손을 낳는다는 말은 두 사람이 손을 잡아야만 굴러떨어져 깨어지는 유리잔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이 되지요. 결국 서로의 손을 맞으면서 두 인간 사이의 관계는 시작되고, 손은 서로 맞잡히는 순간, 인간을 인간에게로 다가가게 만든다는 말이 되지요.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 또한 손을 잡아주는 일이라는 말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긴다한들 무리는 없지 않을까요. 서로에게 서로의 손이 안전하다 말해주고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 평화가 아닐까요. 이 거리에서 잡아야만 하는 당신의 손, 그 안전함. 그만큼 떨리는 내 손, 그 불안함.
한 인간이 타인의 손을 잘 잡는 일은 사건이다. 일생에 진심으로 우리는 몇몇의 손을 잡았을까. 다만 몇 손.다만 죽음과 사랑에 닿을 거라는 믿음에서 내민 손. 그 울퉁불퉁한 노동으로 미워진 손. 타인의 손을 끌어안고 차가운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있는 이들은 이 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리라. -p176
뮌스터가 다 무엇이야. 그이를 만나러 가고 싶을 뿐. 추천대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서 기차를 타고 가리라. 진주의 방언으로 그이를 만나리라. 핀쿠스 황금맥주를 마시며 푸른 반지를 끼고, 눈에 물기 많은 여인과 신 철기시대의 마지막을 함께 보리라. 시를 읽어도 좋겠다. 우연인 듯, 대부분 요절한 시인들의 시를 낭송하리라. 빵 굽는 오븐처럼 따뜻한 밤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시간은 밤공기에 흩어지고 뮌스터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쓸쓸히 자취방으로 사라지는 시인의 뒷모습. 시인은 마치 우리가 뮌스터를 걷는 듯, 상세하게 이 도시를 풀어놓고 있다. 도시의 골목, 기념물, 그리고 거기 사는 사람들. 책장을 덮었다. 뮌스터의 지도는 그이가 몰래 밤마다 마음에 새긴 조국의 지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밤마다 암호로 보낸 통신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슴을 친다. -박찬일(요리사·칼럼니스트)
고독할 때마다 지도를 베끼는 습관이 든 것은 꼭 그곳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그대들이 걷고 있을 것 같아서 어두운 밤에 지도를 베끼고 있더군요. 그대들이 있어야만 장소는 장소가 되지요. 저 먼발치에서 그대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것 같은, 아니면 책을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그대들의 일터, 전철, 아침 길, 눈 오는 밤길, 이제 막 불이 꺼지는 그대들의 창들이 이름을 얻은 공간이 되어 살아나는 느낌. 뮌스터를 걸으며 불러보았던 수많은 그대들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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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김민정
허수경 시인의 작가 레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