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거꾸로 꽂으면 안 되는 동시집 『글자동물원』
른자동롬원
절대 이 책릉 거꾸로 꽂지 마시오
문이 곰릉 열고 탈출할 수도 있믕
이안의 새 동시집 첫 장에 놓인 이 시의 제목은 「른자동롬원」입니다. 책을 거꾸로 꽂으면 글자가 뒤집어져서 ‘곰’이 ‘문’을, 아니 ‘문’이 ‘곰’을 열고 탈출한다니!!!! 섬뜩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이 책은 2008년 『고양이와 통한 날』, 2012년 『고양이의탄생』에 이은 이안의 세 번째 동시집입니다. 화가 김세현과 호흡을 맞추었던 지난 두 권의 동시집을 보았던 독자라면 사뭇 달라진 시의 세계와, 책의 만듦새가 느껴지실 것 같아요. 디테일의 왕 최미란 화가의 유머러스한 그림이 이안의 동시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편집자의 상상도 뛰어넘는 호흡입니다. ^^
이안은 현재 동시단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의 다양한 자취 중 가장 뜻깊은 것은,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을 창간하여 지금까지 꾸려 오고 있는 일입니다. 원고를 모으고 교정을 보고 인쇄감리는 물론 완성된 책을 포장하고 발송하는 작업도 직접 하면서 2010년부터 6년이 넘게 이어 오고 있습니다.
지난 봄 안도현 시인이 한겨레 ‘안도현의 발견’ 지면에서 동시마중을 동시 문단의 지형을 바꾸고 동시 부흥의 기틀을 다지는 “어여쁘고 중요한 실험”이라고 짚기도 했고요. (기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1595.html)
국내 최초 동시 전문 팟캐스트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를 진행하기도 하고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의교장으로 해마다 아이들을 만납니다. 평론을 쓰고, 전국의 학교나 창작교실 등에서 동시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아주까리」를 읽으며 제가 슬금슬금 웃음을 참지 못했던 것은 이런 시인의 일상이 떠올라서였어요.
아주까리
봄에 아주까리를 문 앞에 심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 내 키보다 더 큰 키에 내 두 손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잎을 내두르며 모르는 사람을 성큼 막아서더라니깐! 힘이 좀 부친다 싶으면 나비 동생, 벌 언니, 사마귀 대장까지 불러서.어떤 날은 맘씨 좋은 청개구리 동무가 찾아와 뿌룩뿌룩 불침번을 서 주고 가기도 하고.
옆집에서 묶어 기르는 진돗개보다 믿음직스러워 나는 외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지.
아주까리 형님,
저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십오 년 동안 동시를 써 왔으면서도 아직 동시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잘 썼다 싶어 아이들에게 읽혔는데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올 때면 절망스럽다. 그렇다고 하루가 다 가도록 절망하지는 않는다. 자기 전에 다시 쓰면 되니까. 안 되면 꿈에서라도 쓰면 되니까. 잘 쓸 때까지 쓰면 언젠가 더 잘 쓰게 될 것 아닌가.
내가 쓴 동시는 내가 넘어진 자리이고 내가 짚고 일어선 자리이다. 넘어졌다가 일어서면서 얻은 말들이다. 나는 언제까지고 동시를 모르고싶다. 언제까지고 몰라서 언제까지고 알고 싶은 사람이고 싶다.내가 알게 된 모르는 것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어린이들에게사랑받는 시인이 되고 싶다.”
_'책머리에' 중에서
이렇게 부지런히 동시를 살아 낸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긴 『글자동물원』, 차곡차곡 쌓여 딱 알맞게 발효한 동시들의 감동적인 풍미를 보장합니다. ^^
편집자 엄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