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바닥 기고, 못에 찔려가며 받은…값진 11만 3000원
서울 재건축단지서 '일용직 노동', 정직하게 땀흘려 번 돈의 보람…노가다 아닌 전문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안 보였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고 있는 기자. 주로 폐기물인 철근 등을 부지런히 정리하는 일을 했다. 정직하게 땀흘려 버는 일은 보람 있었으나, 육체 노동에 적응하느라 힘이 많이 들었다./사진=5초 만에 황급히 찍은 남형도 기자 셀카 |
지게차(무거운 화물을 운반하는 장비)는 육중한 철근 더미를 들어 올린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들고 있던 기다란 목재 하나를, 재빨리 철근 더미 밑에 가지런히 두었다. 반대편에 가서도 몸을 낮게 숙인 뒤 하나 더 놓았다. 양측에 목재를 다 깔자, 지게차가 철근들을 그 위에 올렸다. 지게차가 다음에 또 들 수 있게 바닥에서 띄우는 작업이었다.
지게차를 따라다니며 반복해서 그 작업을 했다. 묵직한 목재를 겨드랑이에 끼고 지게차 옆에서 분주히 뛰었다. 한낮 오후 2시라 강한 땡볕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다 젖은 마스크가 콧구멍에 들러붙어 숨이 턱턱 막혔다. 흙탕물이 고인 곳을 지날 땐 일부러 안전화에 힘을 주어 '첨벙첨벙' 튀기게 했다. 작업복 바지가 젖으면 그나마 시원해서였다.
지난 6월 22일 타워크레인 작업 중 사망한 노동자에 대한 추모 현장. 지난해 하루 평균 1.55명이, 건설현장에서 숨졌다./사진=뉴스1 |
서울 재건축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그리 '일용직 노동'을 하고 있었다.
실은 건설현장에서 왜 매번 많은 이들이 숨지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지난해 건설현장에서만 567명이 사망했다고 했다. 하루 평균 1.55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잘 다녀올게"라며 가족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원인을 찾으려면 현장에 가서 겪어봐야 했다.
속된 말로 '노가다'나 '막노동'이라 불리는 일. 그중에서도 하루씩 일하고 돈을 버는 일용직 노동. 대부분 힘들다며 기피하지만, 절박한 누군가는 매일 할 수밖에 없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도 오롯이 조명했으면 싶었다. 그런 관심들이 커져 어떤 삶을 더 낫게 만들 거란 기대를 하면서.
5만원 내고 받은, 4시간짜리 안전교육
건설현장서 일용직 노동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 이수증. 안전 교육이 3시간, 보건 교육이 1시간이다./사진=증명사진이 맘에 안 드는 기자 |
건설현장서 일용직 노동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건 두 가지. 하나는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 이수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안전화다. 안전화 등 보호구는 법적으론 고용주에게 지급 의무가 있지만, 인력사무소 등에 물으니 본인이 알아서 챙겨오란 분위기였다. 찾아보니 가격이 꽤 비싸서, 중고마켓에서 3만원에 박스만 없는 새 안전화를 구매했다(뿌듯).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은 각 지역마다 듣는 곳이 있었다. 교육 시간은 4시간이고 비용은 5만 원이라 했다(만 20세 이하, 55세 이상 혹은 장기실업자 등은 무료). 코로나19로 교육을 안 하는 곳이 많았는데, 교육하는 곳을 어렵사리 찾아 19일 오후에 받으러 갔다. 오후 2시에 교육 시작인데 1시 반에 벌써 다 마감돼,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이도 있었다.
안전교육은 꼭 필요한 내용이 많았으나, 단시간에 다 숙지하기엔 어렵고 버거웠다. 50분 수업, 10분 휴식으로 4교시까지 진행되는데 교육 시간에도 졸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이가 꽤 많았다. 필기하며 집중해서 들으려고 했으나, 나 역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안전모와 안전대(추락을 막기 위해 몸에 차는 장비)는 평소엔 착용 체험도 한다 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못한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긴 하나였다. 집을 나설 때 무사히 다녀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귀찮고 힘들더라도 안전 수칙을 꼭 지켜야 한다는 것. 아빠와 어린 딸이 포옹하는 사진을 보며 나 역시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렸다. 그렇게 4시간 교육이 끝난 뒤 이수증을 바로 받을 수 있었다.
새벽 4시에 나갔는데, 일도 못 하고
새벽 4시, 동네 버스정류장. 인력사무소에 가야하는데, 운행하는 버스가 없어, 결국 택시를 타야 했다.그 또한 비용이라 아끼고 싶었건만./사진=택시비가 아까운 남형도 기자 |
이제 본격적으로 일해보기로 했다. 인력사무소에서 "새벽 5시까지 나오면 된다"고 해서, 30분 전엔 가야겠다 싶었다. 16일 새벽 3시 반에 몽롱하게 일어나 준비하고, 아내가 싸준 사랑의 찐 감자를 챙기고, 안전화를 신었다. 칠흑 같은 밤공기는 차가웠고, 버스도 다니지 않아 택시를 탔다. 인력사무소에 도착하니 새벽 4시 20분이었다.
소장에게 신분증과 교육 이수증을 내고,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새벽 4시 반이 되니 인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안전화에서 연륜이 느껴졌다. 그들은 100원짜리 믹스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깨웠다. "남형도 씨." 새벽 5시쯤 내 이름이 불렸다. 15년쯤 건설현장서 전기 일을 해왔다는 50대 성준 씨(가명)와 함께 버스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경기도 한 재개발구역이었다. 거기엔 반장과 인부 한 명이 더 있었다. 반장은 우리에게 "코로나 19 검사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둘 다 검사는 안 받고 백신만 맞았다고 답하자, 그는 "현장 방역이 깐깐해 그걸로는 안 될 수 있다"고 했다. 성준 씨도 나도, 일을 못 할까 싶어 불안해졌다. 인부 한 명은 그런 마음을 알겠다는 듯 "그래도 오늘 일은 해야지, 마치고 코로나 검사받으면 되지 않느냐"며 우리 편을 들어줬다.
코로나19 검사를 안 받으면 그날 일을 못할 수 있단 말에, 발걸음이 불안해졌다./사진=남형도 기자 |
그러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아침을 먹고 찾아간 현장에서 일할 수 없다며 거절당했다. 반장은 "어차피 일하려면 검사받아야 하니 좋게 생각하자. 추석 지나고 꼭 오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그리고 반소매 옷을 입은 내게 "이렇게 입으면 팔에 상처난다"며 "토시를 하던지 긴소매를 입고 와"라고 일렀다.
성준 씨와 현장 바깥으로 터덜터덜 나오며 "우리 아침 먹으러 새벽부터 온 거냐"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내에게 전화해 "검사받고 오래서 일 못 했어. 젊은 친구도 같이 있어. 집에 갈게"하고 말했다. 연락처나 나누자며 내게 묻는 성준 씨의 스마트폰 화면엔, 사랑하는 그의 아내 사진이 있었다. 아침 7시, 집에 오는 길에 출근하는 이들과 마주하며 복잡한 감정이 오갔다.
긴소매를 입고, 다시 일하러 인력사무소로
코로나19 검사를 안 받았다며 한 번 퇴짜를 맞고, 일주일 뒤 어렵사리 탑승한 봉고차. 서울 재건축 현장으로 향하는 거였다./사진=남형도 기자 |
일을 못 하고 돌아온 당일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17일에 음성 판정 문자를 받았다. 추석 연휴가 지난 23일 새벽 4시에, 다시 인력사무소를 찾았다. 이번엔 반장 조언대로 긴소매를 입고, 새 안전화에 발목이 쓰린 걸 막으려 긴 양말도 신었다. 새벽 공기는 일주일 새 더 차가워졌다. 인적 드문 밤거리를 보며 택시 안에서 정신을 다잡았다.
연휴 끝이라 그런지 인력사무소엔 인부가 더 적었다. 소장에게 코로나19 음성 판정 문자를 보여준 뒤, 오늘은 일해야 할 텐데 싶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시 뒤 " 남형도였지?"하며 소장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합이 잔뜩 들어가서 "네!"하고 대답한 뒤, 그의 앞으로 향했다. 다행히 일하러 가라고 했다. 우성 팀장(가명)과 재준 씨(가명)와 함께 봉고차에 올랐다. 차 내부 바닥은 흙먼지가 스며들어 있었고, 담배 내음도 짙게 배어 있었다.
우성 팀장은 내게 "젊은데 어떻게 건설현장 일을 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일이 없어서 놀고 있긴 그래서 오게 됐어요"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자 그는 "일을 안 하면 폐인 되기 더 쉽다"며 잘 왔다고 환영해줬다. 내가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은 처음이라고 하자 "몸 안 쓰던 사람이 육체 노동하면 처음엔 힘든데, 보름만 잘 버티면 몸이 적응한다"며 잘 참아보라고도 일러줬다. 다정한 인생 선배였다.
도착지는 어딘지 몰랐다. 그저 덜컹거리는 봉고차에서 창밖을 멍하니 봤다. 매번 일하는 현장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텅 빈 고속도로와 몇 개의 터널을 거쳐 도착한 곳은 서울 아파트 재건축 단지였다. 얼음물이 가득 담긴 통을 현장 어딘가에서 싣고, 컴컴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짓는 중이라 콘크리트 마감 등이 투박했다.
일당 13만 원, 근로계약서를 썼다
복잡하게 뒤섞인 건설 폐기물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잡일이라고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
둘러보니 주관하는 건설사는 익숙한 대기업이었고, 소속돼 일할 곳은 하청 건설업체였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곳곳에 액운을 막아준다는 달마도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근로계약서 한 장을 받아 이름과 주소 등을 썼다. 계약 기간은 당일인 9월 23일만 적혀 있고, 언제까지 일할지에 대한 날짜는 비어 있었다. 노동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8시간이고, 일당은 13만 원이라 돼 있었다. 특이한 건 혈액형을 적는 칸도 있었는데, 아마도 안전사고에 대비하는 듯했다. 지급 받은 안전모에도 혈액형을 적게 돼 있었다. 긴장됐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다. 체온과 이름을 체크한 뒤 식판에 밥을 떴다. 우성 팀장이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새벽이라 별로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밥과 반찬을 보니 먹음직스러워 꽤 담았다. 반찬은 소시지, 브로콜리, 제육볶음, 김, 된장국이었다. 10분도 안 돼 식사를 다 마쳤다. 다들 빨리 먹는 분위기였다.
대기업 현장이라 그런지, 밥은 맛있었다. 건설현장도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라고 했다./사진=기사 쓰다 급 배고픈 남형도 기자 |
안전교육과 아침 조회(체조 등) 등을 하고, 1층에 올라갔다. 거기엔 커다란 공구함과 얼음물 통, 휴식하기 위한 의자 등이 놓여 있었다. 현장에선 진호 반장(가명)의 지시를 따르라고 해서, 그의 곁에 딱 붙어서 각 잡고 앉아 있었다. 조금은 투박해 보이지만, 어쩐지 그 나이대 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진호 반장은 내게 건설현장 노동 경험이 얼마나 있는지 등을 묻고는 "바닥의 빗물을 바깥으로 치우라"며 간단한 첫 임무를 줬다. 잔뜩 힘을 주고 끌어당기듯 퍼내고 있자니, 그가 "이렇게 밀어내듯 하라"며 시범을 보여줬다. 그의 말대로 하니 훨씬 편했다. 방해되지 않게, 일 열심히 하자고 다시 다짐했다.
오른쪽 어깨에 날카로운 못이… 아찔했다
한 줄에 10개씩, 각을 잘 잡아서 쌓아야 한다고 했다. 정리도 다 치밀한 요령이 필요했다./사진=남형도 기자 |
이곳에선 나를 용역이라 불렀고, 할 수 있는 일은 대개 잡일이었다. 구체적으론 건설현장 폐기물 등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게 주된 업무였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 공터에 주로 널려 있는데, 그대로 두면 미관상 안 좋은 건 물론이고 통행에도 방해될 수 있어서였다.
아무렇게나 뒤섞인 채 쌓여 있던, 정체 모를 철근들을 정리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인력사무소에서 함께 왔던 재준 씨도 함께였다. 진호 반장은 "10개씩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고 했다. 재준 씨가 철근을 뽑아 넘겨주면 내가 받아서 쌓는 거였다. 철근을 한 손으로 받으려 하니 생각보다 무거워, 두 손으로 힘껏 들어 옮겨야 했다.
철근을 일렬로 쌓기도 쉽지 않아, 금세 뒤죽박죽이 됐다. 진호 반장이 잠시 뒤 오더니 "이러면 몇 개인지 확인하기 힘든데, 심란하다"며 이리저리 정리를 다시 했다. 별 것 아닌 움직임에도 금세 착착 줄이 맞춰졌다. 노련했다.
시간이 무척 더디게 갔다. 안 하던 육체 노동이라, 적응하는 게 힘들었다./사진=땀범벅이 된 남형도 기자 셀카 |
더 바짝 긴장했다. 그러니 눈앞에 놓인 것만 잘 처리하는데 골몰하게 됐다. 시야가 부쩍 좁아졌다. 위험한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다. 목재를 옮기다 무게를 못 이겨 오른쪽 어깨로 기우뚱했는데, 끝에 뾰족한 못이 있어 순식간에 찔렸다. 다행히 깊이 들어가기 전에 황급히 빼서 상처만 좀 났다. 그대로 푹 꽂혔으면 크게 다칠뻔했다. '안전사고는 순식간이구나' 싶어 정신이 번쩍 났다.
철근 두 개가 겹쳐진 것도 있었는데, 그것도 무심코 잡다가 한쪽이 위아래로 움직여 머릴 맞을 뻔했다. 바닥에 있던 뾰족한 걸 밟기도 했다. 안전모와 안전화를 무조건 잘 착용해야 하는 이유를 알았다. 건설현장은 사방에 위험 요소가 있었다.
노하우가 '전문성'… 잔뼈 굵은 '백전노장'들
건설현장에서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백전노장들. 일 잘하는 이들을 잘 관찰해서 배우라고 했다./사진=감탄하는 남형도 기자 |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지친 기운이 올라왔다. 힘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힘만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녔다. 오히려 힘에만 의존하니 체력이 더 빨리 고갈됐다. 아직 하루가 긴데 어떡하나 싶어 걱정됐다.
새벽에 봉고차에서 우성 팀장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내게 "현장 일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 일 잘하는 사람을 잘 관찰하고 요령을 배우라"고 했다. 함께하는 재준 씨부터 잘 보고, 동작을 잘 따라 하기로 했다.
예컨대, 철근을 옮기는 것만 봐도 달랐다. 난 철근을 끝까지 잡은 채 조심조심 내렸다. 그러다 보니 무게가 허리며, 어깨에 다 실려서 힘들었다. 재준 씨는 철근을 내려놓는 지점 가까이에 둔 뒤, 위치를 맞춰 툭 하고 떨궜다. 미세한 건 그다음에 정리하니 힘이 훨씬 덜 들었다. 그러나 그 방법조차 따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오래 쌓은 노하우였고, 그게 다 전문성이었다.
짧게나마 경험하고 주위를 보니, 모두가 잔뼈 굵은 백전노장처럼 보였다. 이 험한 현장을, 온갖 위험을, 무게를, 어떻게든 매일 싸워 나름의 방식으로 이겨내는 이들이니까. 까마득하게 높은 건물이 아무렇게나 올라가는 게 아녔다.
"이건 벽체를 이루는 철근인데, 양끝의 구멍을 보고 맞추면 돼. 이건 기둥을 지탱하는 철근인데, 여기랑 여기를 잡으면 좋아." 내가 헤맬 때마다, 재준 씨는 몸소 귀하게 얻은 요령들을 하나씩 알려줬다. 그의 말대로 하니 더 편하고 안전했다. 분주한 와중에 그저 감사했다.
점심시간… 다들 잘 때 나도 잤어야 했다
점심시간에 잠을 충분히 자야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 |
점심시간이 됐다. 아침을 먹었던 식당으로 향했다. 컴컴할 때 봤던 터라, 어딘지 헷갈려서 진호 반장에게 전화해 물었다. 그는 몇 동, 어디 어디로 오라며 친절히 알려줬다. 부지런히 찾아가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저 멀리 그가 서 있었다. 못 찾을까 봐 마중 나온 거였다. 진호 반장은 "고생했어, 맛있게 먹어"라며 따스히 말해줬다.
점심 메뉴도 괜찮았다. 닭볶음에 김말이 튀김, 파스타, 오이지, 미역국 등이었다. 오전에 기진맥진한 탓인지, 입맛이 별로 없어 밥이 잘 안 먹혔다. 아파도 밥을 잘 먹는 편이라,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래도 일하려면 먹긴 먹어야 할 것 같아 꾸역꾸역 넣었다. 7분 만에 빠르게 해치우고, 물만 엄청나게 벌컥벌컥 마셨다. 남는 시간에 잘 쉬고 싶었다. 휴게 공간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곳엔 이미 밥을 다 먹은 인부들이 여기저기서 자고 있었다. 기다란 분홍색 깔개를 깔고, 안전모를 벗고, 대자로 편하게 누워 있었다. 오전에 내 사수처럼 알려준 재준 씨도, 다른 인부들도, 현장 곳곳에서 그리 쉬고 있었다. 그 피로를 막 겪어서 알기에, 내가 다 편해 보였다.
첫날인데 드러눕는 건 왠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의자에 앉아 쉬었다. 그 와중에 취재할 게 없나 보겠다고 현장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그리고 그때 잠자지 않은 걸, 오후에 심각하게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철근 밑에 몸 넣고, 위험한 줄도 몰랐다
지게차를 따라 목재를 들고 움직이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오후 땡볕에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사진=남형도 기자 |
오후 시간이 오전과는 전혀 달라서였다. 체력이 절벽처럼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몸은 둔해졌고, 근육이 욱신거렸고, 큰 현장 소음에 귀가 먹먹했다. 오후 1시부터 4시 반까지라고, 얼마 안 남았다 생각한 게 큰 오산이었다.
철근 한 개를 나르고 헉헉대고, 또 한 개를 나르고 숨을 토하듯 쉬었다. 오후 2시부터는 땡볕이 심해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진호 반장이 얼음물에 절인 붉은색 작업 조끼를 가져다주며 "이걸로 입으라"고 했다. 잠시나마 시원해져 숨통이 트였다.
계속되는 힘듦에, 하루 일을 잘 마쳐야 한단 절박함에 판단력도 흐려지는 듯했다. 지게차가 든 철근 밑에 목재를 두어 받치는 일을 했는데, 위치가 잘못됐는지 몇 번을 놓아도 철근이 기우뚱했다. 내렸다 올렸다 하느라 지게차 기사님께도 미안하고, 빨리 끝내고 싶어 나도 모르게 철근 밑 공간에 몸을 넣었다. 자세히 보고 위치를 잡으려던 거였다. 흙바닥을 반복해 기느라 무릎에 멍까지 들었다.
몸을 뺀 뒤 철근을 내리고 나니, 그제야 아찔했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잘못해 철근이 내려왔다면, 그걸 피하지 못해 깔렸다면 어땠을까 싶어서였다. 전날 아내가 "위험한 건 하지 마"라고 했고, 난 "알겠어, 잘 마치고 올게"라고 답했는데 그 약속을 못 지킬 뻔했다.
건설현장서 안전사고가 났을 때, '안전불감증'이라며 쉬이 기사를 썼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쓰렸다. 그땐 내가 일하느라 위험을 불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 안전을 지키기 위한 고민에는, 노동자가 매일 돈을 벌기 위해 직면하는 절박한 상황까지 다 고려해야 하는 거였다. 억지로라도 말려야 하고, 강제로라도 안전모와 안전대를 씌워야 하며, 틈틈이 잘 쉬도록 하는, 그런 절대적인 보호 시스템이 필요한 거였다.
땀 흘려 정직하게 번, 11만 3000원의 보람
마지막으로 했던, 흙탕물에 잠긴 쓰레기들을 삽질해서 퍼내는 일. 끝이 보인단 생각에 악으로 버텼다./사진=남형도 기자 |
마지막으로 흙탕물에 잠긴 쓰레기들을 청소할 땐, 시간이 정말 느릿느릿 흘렀다. 일할 때 절대 꾀부리는 성격이 아닌데, 별수 없이 하나를 치우는데 시간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끌게 됐다. 삽으로 흙탕물에 있는 쓰레기를 퍼내느라 작업복이며 안전화며 마스크까지 흙범벅이 됐다. 다 치웠을 땐 맨바닥에 그냥 드러눕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일을 마치고, 진호 반장이 "내일 또 나오라"고 할 땐 뿌듯했다. 그래도 영 망치진 않았구나 싶어서였다. 크게 인사하고, 돌아오는 봉고차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니 살 것 같아 행복했다.
진호 반장은 고생 많았다며, 그가 30년 동안 해왔던 건설현장 얘길 들려줬다. 첫날 벽돌 80킬로를 나른 뒤 다음 날 앉아만 있었단 얘기, 오기가 생겨 악으로 버티며 몸에 인을 새겼단 말, 남들처럼 잠깐 왔다가는 거라 생각지 않고 늘 직업으로 여겼단 소신, 현장에서 찾는 이가 되려고 어떻게든 기술을 배웠다던 노력, 50대에 접어드니 근육이 줄어 매일 운동하며 관리하고 있단 말까지. 그동안 지은 아파트며 건물이 정말 많겠다고 하자, 진호 반장은 "어우, 정말 많지!"하며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존경스럽고 멋있었다.
돌아오니 인력사무소 소장이 "첫날인데 정말 고생 많았다"고 격려하며, 흰 봉투에 돈을 넣어 건넸다. 일당 13만원에서, 4대 보험료와 교통비 등을 뗀 일급 11만 3000원이 담겨 있었다. 봉투 겉면엔, 내 이름 석 자와 함께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값지게 번 돈 값지게 쓰십시다'라고 적혀 있었다. 울컥했다.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보냈다. 아내는 고생했다고, 다치진 않았냐고, 집에 와 따순 밥 먹고 쉬자고 했다. 하루 피로가 싹 씻기는 듯했다.
정직하게 땀흘려 얻은, 하루 노동의 대가. 이 봉투를 보고 어쩐지 울컥했다./사진=남형도 기자 |
그러니 땀 흘려 성실하게 일해 버는 돈의 대가를, 더 높이 쳐줬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발주처일지, 대기업일지, 하청 건설업체일지, 누구의 의지가 더 필요할진 따져볼 문제겠지만. 단지 8시간만 일한 게 아니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기다리고 이동하는 시간을 포함해, 총 14시간을 노동을 위해 썼다. 임금이 오르지 않고, 복리후생도 미약한 삶이다.
게다가 매일 하기도 힘든 일이다. 우성 팀장은 "일주일에 세 번 나오면 잘 나오는 것"이라 했다. 그 말의 의미를 금세 체감했다. 일한 날 돌아와 저녁을 대충 먹은 뒤 바로 뻗고, 새벽에 잠시 깼다가 또 자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허리, 무릎, 팔, 발목, 어디 하나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집에 돌아온 기자. 만신창이, 넋이 영화 인터스텔라 마냥 다른 차원을 떠돌고 있다. /사진=눈으로 빨랫거리를 노려보고 있는, 남형도 기자 아내 |
누군가 일용직 노동자를 일컬어 이리 말했다. 자신의 기대 수명과 건강을 팔아 돈을 번다고. 힘든 일이라고만 하지 말고,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그에 걸맞게 대우해달라고, 진정 그랬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늘 보던 아파트가, 새삼 다시 보였다
점심시간에 나란히 걸려 있는 노동자의 안전모들. 이름 석 자가 적혀 있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사진=남형도 기자 |
일용직 노동을 한 뒤 달라진 게 하나 있다. 밤에 산책할 때였다. 갑자기 내가 사는 아파트가 달라 보였다.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혀 두리번거리며 잠시 상상했다.
다 완성된 건물이 아닌 콘크리트 구조물이, 한편에 쌓여 있는 건설 폐기물이, 흩날리는 먼지 더미가, 그 안을 분주히 움직이는 노동자들이 보이는 듯했다. 여기도 그 많은 이들이 흘린 땀이 스며들어 있겠구나, 그렇게 쌓은 건물에 편히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구나 싶었다. 대형 크레인이 저절로 척척 쌓아 만든 게 아녔다. 그 현장을 하나하나 다 움직인 건 빠짐없이 사람이 한 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있는 노동자들. 먹고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단하고, 값진 것이다. 그만큼 대우해줘야 마땅하다고./사진=남형도 기자 |
다녀온 건설현장이 기억났다. 건설현장의 높다란 펜스 안에 있던 건 모두 사람이었다. 젊은 사람이 왜 왔냐며 걱정해주던 것도, 다칠까 싶어 하나하나 알려주던 것도, 일 못 하고 돌아가던 날 안타까워 해주던 것도, 중장비가 가까이서 움직일 때 위험하다고 외쳐주던 것도, 모두 다 사람이었다.
점심시간에 인상 깊었던 광경도 떠올랐다. 안전모가 죽 걸려 있는데, 거기엔 각자의 귀한 이름이 앞뒤로 다 적혀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이름을 머리에 이고, 그보다 한참 높은 건물을 결국 올리고야 마는 이들의 일을 '노가다'란 말로 낮춰 부르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심지어 노가다는 일본어인 '도카타'가 어원인 속어이며, 일본에선 방송 금지 용어일 정도란다. 그리 낮잡아 부를 일이 절대 아니다. 직접 해보니 정말 그랬다.
새벽잠을 떨치고 욱신거려도 몸을 애써 일으키고, 그렇게 나와 매일 흙먼지 속에서 땀을 흘리는, 누구도 하기 힘든 값진 노동을 매일 해내는 귀한 사람일 뿐이니까. 그 정도만 바라보고 한 사람으로서 존중해도, 꽤 많은 게 나아질 거라고.
에필로그(epilogue).
진호 반장이 유일하게 싱글벙글 웃을 때가 있었다. 일하다가 지쳐서 털썩 앉아 쉬며 얘기할 때였다.
"우리 아들들 말이야. 첫째 아들은 학교 다닐 때 아이큐가 160이었다? 얼마나 똑똑한지. 그리고 둘째 아들은 글쎄, 아빠가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보겠다며 건설현장에 일하러 온 거야."(반장)
"오, 기특하네요. 그리고 어떻게 됐어요?"(기자)
"어떻게 되긴, 이 녀석 이틀을 뻗어서 누워 있었지."(반장)
한바탕 웃음이 터지고, 그의 아들 자랑은 계속됐다. 검게 탄 얼굴이, 짙은 주름이, 하루 새 길어진 수염이, 아들 얘기를 할 때마다 이리저리 신나게 씰룩거렸다.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며 크고 강하게만 보였던 진호 반장이, 어느 순간 가족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로 보였다.
그러니 건설현장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기사를 다 쓰겠노라고 홀로 다짐했다. 그런 아버지들이 매일 무사히 집에 돌아가 "얘들아, 아빠 왔다!"며 외칠 수 있도록.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human@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