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들의 홍대'를 아시나요?
전국 구제 옷이 모이는 곳…'아재룩'의 성지되다
지난달 31일 동묘 벼룩시장에서 만난 한 시민. 붉은 색 바지와 모자가 눈길을 끈다. /사진=남궁민 기자 |
"선생님, 옷이 멋져서…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그래, 한번 찍어봐." 강렬한 붉은 바지와 모자, 갈색 구두로 멋을 낸 중년 남성이 포즈를 취한다. 어느 패션 잡지에서도 보기 힘든, 남다른 스타일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정형돈·지드래곤·와썹맨(박준형)·정려원까지.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거쳐간 '핫 플레이스'가 있다. 최근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키코 코스타디노프는 '세계 최고의 거리'라고 평가했다. 가로수길도, 홍대거리도 아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곳, 동묘 벼룩시장이다.
지디도, 키코도 반했다…동묘 벼룩시장
지난달 31일 동묘 벼룩시장에 옷무덤 좌판이 펼쳐져 있다. /사진=남궁민 기자 |
평범해 보이는 동묘에 멋쟁이들이 모이는 이유는 뭘까. 초겨울 추위가 몰려 온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숭인동 동묘 벼룩시장을 찾았다.
지하철 1호선 동묘앞역을 나서자 예스러운 간판과, 온갖 물건이 널려 있는 좌판이 눈에 들어왔다. 동묘(관우를 모신 사당) 돌담을 따라 늘어선 좌판에는 '옷무덤'이라고 불리는 옷더미가 쌓여 있었다.
옷무덤 '수색'에 나섰다. 쭈뼛거리는 사이 옆에 선 아주머니 손길이 코 앞까지 다가와 옷을 한 움큼 집어간다. 옷무덤을 파헤치다 보니 체육복, 교복, 군복부터 낡은 속옷까지 나온다.
아수라장을 옆에 두고 팔짱을 낀 채 앉아있는 주인을 향해 옷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는 손가락 두개를 펼쳐 보였다. 2000원이라는 뜻이다. 상인 이종호씨(50)는 "전국에서 수거된 옷이 모이기 때문에 별의별 옷이 다 있다"면서 "주말이면 좌판이 수백개씩 생긴다"고 설명했다.
동묘 벼룩시장의 인기 상품 중 하나인 오래된 카메라. 필름카메라의 '감성'을 찾아 시장에 온 젊은 세대가 찾는다 /사진=남궁민 기자 |
매력은 옷 뿐만이 아니다. 1970년대 만들어진 텔레비전부터 단종된 라디오, 필름카메라까지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기자가 한 책방을 찾아 '특이한 책이 없냐'고 묻자 주인은 글씨도 알아볼 수 없는 '고(古)서적'을 건넸다. 온라인에서는 중세기사 갑옷을 봤다는 글까지 찾아볼 수 있었다.
평소 자주 동묘 벼룩시장을 찾는다는 김중배씨(64)는 "옷이 저렴하고 필요한 물건은 어지간하면 찾을 수 있어 자주 온다"면서 "친구들한테도 모이자 하면 다 동묘로 모인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동묘 벼룩시장의 한 책방에서 발견한 고서적. 헤진 종이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사진=남궁민 기자 |
청계천·동대문 재개발에 밀려 온 상인들…변화의 바람도
지난달 31일 동묘 벼룩시장에서 만난 만난 시민들. /사진=남궁민 기자 |
동묘 벼룩시장이 오늘날 모습을 갖춘 건 2000년대부터다. 1960년 청계천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고가도로 밑에서 각종 물건을 팔던 상인들이 근처 황학동 만물시장, 신설동 풍물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2004년 또 다시 청계천 개발이 시작돼 상인들은 동묘와 동대문으로 옮겨갔다. 2008년 동대문운동장마저 철거되고 일대가 재개발 되면서 또 다시 밀려난 상인들이 자리 잡은 곳이 동묘 벼룩시장이다.
중장년 손님이 대부분이던 동묘 벼룩시장에 젊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 건 2015년쯤이다. 당시 힙합 가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빈티지하고 자유로운 패션이 20대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재킷과 화려한 셔츠 등 독특한 패션의 인디가수 오혁의 인기도 '동묘룩'의 인기에 불을 지폈다. 디자이너 이상엽씨(27)는 "흔히 말하는 '아재룩'의 중심지"라며 "히피스러운 스타일을 즐기는 힙스터들에겐 성지"라고 설명했다.
젊은이들과 외국인 관광객까지 몰리는 명소가 되면서 상인들도 변화에 나서고 있다. 구제 옷을 깔끔하게 손 본 뒤 진열해 파는 매장과 깔끔하게 단장한 식당도 등장했다. 한 구제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은 "여기저기 많이 내쫓기고 떠밀리면서 동묘까지 오게 됐다"면서 "이제 손님도 다양해지고 많아진 만큼 시장의 이미지도 더 좋아지면 좋겠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남궁민 기자 serendip153@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