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이젠 '돈'으로 산다
[페미 경제학-①] 불평등한 현실 극복 위해 지갑 연 여성들
명품 의류 브랜드 디오르는 ‘We Should All Be Feminists’(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라는 문구가 찍힌 티셔츠를 선보이며 페미니스트 어젠다를 드러냈다. 아래는 디오르 티셔츠를 입은 배우 김혜수(왼쪽)와 가수 선미./사진=OSEN, 선미인스타그램 |
소비시장에 페미니즘 열풍이 불고 있다. 여성들이 소비를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를 드러내면서다. 구매력 있는 여성들이 관련 아이템에 지갑을 열며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다양한 업계로 확산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성 평등'이라는 페미니즘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뒤흔든 페미니즘…"나는 '페미니즘적 소비'를 한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부터 각종 디지털 성폭력 사건, 여성 혐오 범죄 논란, 혜화역 시위까지…. 페미니즘은 올해도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자연스레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급속도로 높아졌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페미니즘적 소비'를 하는 여성이 크게 늘었다. 여성들은 페미니즘 단체들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만든 가방, 의류 등 ‘페미 굿즈(goods)’를 사고, 페미니즘 도서를 읽는다. 'We Should All Be Feminists'(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라는 문구가 찍힌 명품 의류 브랜드 디오르 티셔츠를 입은 여자 연예인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의 신념을 소비행위로 적극 표현하는, 이른바 '미닝 아웃'(Meaning Out)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아름다움이나 여성성보다는 자신의 만족감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소비도 뚜렷해지고 있다. 여성들의 '코르셋' 중 하나였던 속옷에서 그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와이어나 패드로 인해 갑갑했던 기존 브래지어 대신 착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제품들이 등장했다. 와이어와 패드를 없애 가슴에 가해지는 압박을 최소화한 브라렛(palette)이 인기를 끌며 속옷 브랜드들이 잇따라 브라렛 상품을 내놓고 있다. 주로 남성용으로 출시됐던 '니플패치'를 이용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개인의 선택만으로 '평등'과 '해방'이라는 페미니즘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 여성 소비자도 많아졌다. 직장인 이모씨(28)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힘'이다"면서 "소비자로서 여성의 힘을 보여주는 것도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소비시장에 거세게 부는 '여풍'(女風)…연대하는 여성 소비자
츨판 시장에서 페미니즘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됐다. 여성 혐오, 성폭력 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페미니즘 관련 도서의 수요로 이어지며 출판은 가장 뜨거운 페미니즘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증명하듯 페미니즘 도서 판매량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2013년 8023권에 불과했던 페미니즘 관련 도서 매출 권수는
△2014년 1만1143권 △2015년 1만1628권 △2016년 3만1484권 △2017년 6만3196권으로 급증했다. 2016년 발간된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올해 누적 판매량 70만부를 넘어섰다. 한 해 평균 30종에 불과했던 여성학 분야는 출간 종수도 지난해 70종 이상 출간되는 등 꾸준히 늘고 있다.
페미니즘 도서 구매자 다수는 여성이었다. 올해 페미니즘 관련 도서 여성 구매 비중은 전체의 77.3% 로 남성(22.7%)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연령 별로는 20대 여성이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가장 많이 찾았다. 여성 구매자 중 20대 여성의 비중은 38.89%에 달한다.
영화계에도 '여풍'(女風)이 거셌다. 여성 영화를 위해 여성 관객들이 연대하기 시작한 것. 영화관을 대여해 단체관람하고 직접 굿즈를 만들어 영화를 홍보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최근 영화 '미쓰백'은 여성 관객의 힘으로 누적 관객 수 70만명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미쓰백'은 가정폭력의 상처를 가진 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다. 여성의 시각에서 극이 전개된다는 점, 여성 감독(이지원)이 연출하고 여성 배우(한지민·김시아)가 주연을 맡았다는 점이 여성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사진=공식포스터 |
'미쓰백'의 개봉 첫날 스크린 수는 524개에 불과했다. 여성 영화가 고전을 면치 못하자 여성 관객들은 자신을 스스로 '쓰백러'라고 지칭하며 연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체 관람, 영혼 보내기(좌석을 예매하고 영화관에 가지는 않는 것) 운동을 펼쳤다. 굿즈를 만들어 배포하며 영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여성 관객의 결집으로 '미쓰백'은 개봉 23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게 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영화 '허스토리'도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허스토리'의 팬덤 '허스토리언'은 단체관람 릴레이, 상영관 확대 운동 등 여성 연대 활동을 주도했다.
두 영화를 모두 관람한 대학생 서하은(22)씨는 "여성 서사에 깊이 공감할 뿐만 아니라 여성 주연 영화가 꾸준히 제작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기 위해 영화를 봤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여성의 소비 행태가 불평등한 사회 구조 타파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페미니즘적 소비는 사회나 가정에서 받아온 차별에 여성들이 대처하는 한 방법"이라며 "소비를 통해 여성이 처한 사회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여성들이 자신들이 겪는 불평등이 해결됐다고 판단될 때까지 당분간 이러한 흐름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페미니즘의 상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여성을 앞세운 마케팅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 페미니즘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페미니즘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는 있지만 자칫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며 "여성 소비자에게 성공적으로 어필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근본적 고통과 아픔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가영 기자 park0801@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