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음식점에 숨어있는 '역사'
음식점으로 쓰이고 있는 옛날의 대상숙소./사진=이호준 여행작가 |
여행을 하다보면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상황과 마주치는 경우가 많다. 남다른 호기심이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줄 때도 있다.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끝자락에 세워진 도시 마르딘을 떠나던 날도 그랬다. 점심식사를 하려고 들른 음식점에서 생각지도 않은 횡재를 했다.
식당은 카메라 렌즈에 모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컸다. 자리에 앉아 둘러보니 아무래도 집의 형태가 범상치 않았다. 터키의 중부도시 말라티아에서 본 카라반 사라이(대상숙소)와 구조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분명 보통 식당은 아닌데? 궁금할 땐 물어보는 게 가장 좋은 해결 방법. 아니나 다를까. 짐작한 대로 카라반 사라이라는 대답이었다. 그것도 500년 전에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이었다.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수백 년 동안 말의 먹이를 주고 밥도 해먹고 잠을 자던 유적이 음식점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나마 창고로 쓰던 것을 지금의 주인이 매입해서 음식점으로 만들었다는 자랑이 뒤따랐다. 한숨부터 나왔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거야? 굳이 비교하자면 '전주 객사'(全州 客舍)쯤 되는 문화재에서 음식장사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놀랄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건물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주인이 또 하나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몇 년 전 보수공사를 하던 중에 느닷없이 벽이 뻥 뚫리면서 커다란 인공동굴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들어가 봤더니 마르딘의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성까지 통하는 통로더라는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그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발견이잖아. 그런데도 여전히 식당으로 쓰고 있단 말이야? 우리 같으면 출입을 금지하고 조사단이 구성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나톨리아 반도가 그리스와 로마는 물론 이슬람 문명 등을 거치면서 문화재가 켜켜이 쌓인 땅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발굴 조사'도 식당 주인에 의해 진행된 모양이었다. 주인 스스로 내린 결론에 의하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굴은 군사용으로 쓰인 것이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성이 적에게 포위를 당했을 때, 굴을 통해 군사들이 포위선 밖으로 나와 배후를 공격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굴 안에는 병사들이 대기하던 방도 네 개나 있고 우물까지 갖췄다는 것이었다. 마르딘 전체가 요새라고 하던 말이 더욱 실감 났다. 하지만 그런 설명을 역사학자나 박물관 관계자가 아니라 음식점 주인에게 들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식당과 동굴이 바로 연결돼 있다./사진=이호준 여행작가 |
굴을 좀 보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타맘(OK)"을 외쳤다. 굴은 주방 쪽 식탁 옆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었다. 밖에서 들여다보니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안에는 어느 시대 것인지 모를 항아리들이 굴러다녔다. 발견 당시 모습 그대로 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발에 걸려 깨질 염려만 없다면 잘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라면 벌써 박물관 유리창 안으로 들어갔겠지만.
종업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봤다. 어느 정도 안으로 들어가자 길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왼쪽 길을 택해 계속 전진하니 또 다시 갈래 길이 나왔다. 처음에는 서서 갈 정도였지만 점차 낮아져서 나중에는 뭉그적거리다시피 움직여야 했다. 군사들은 기어 다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에서는 물과 함께 진흙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러다 매몰되는 거 아냐? 걱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굴은 끝없이 이어졌고 나는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그놈의 호기심이 뭔지, 쉽사리 돌아 나올 수가 없었다. 이런 역사의 현장,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과거의 유물을 또 언제 구경할 수 있을까. 한참 들어가니 인공적으로 쌓은 축대가 나왔다. 함께 간 종업원의 말로는 거기서부터 거의 수직으로 성까지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앞으로 가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동굴 내부. 항아리들이 굴러다니고 있다./사진=이호준 여행작가 |
밖으로 나오니 온몸에 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래도 가슴에서는 희열이 샘솟았다. 음식점 2층으로 올라가보니 카라반 사라이로 쓰였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방들도 구조변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옛 모습 그대로였다. 일부는 주방 혹은 창고를 쓰고 있었다. 방에서는 옛사람들이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나올 것 같았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사막을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공간에 머물렀고 머무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렇게 시간을 초월해 만날 수 있구나.
눈을 들어보니 바로 위에 성채가 있었다. 엄청나게 가파른 절벽을 이용해서 만든 성이었다. 이곳저곳 많이 무너졌지만 원래의 위용은 잃지 않았다. 동굴을 통해 저 성채 꼭대기까지 올라갔단 말이지? 성을 눈앞에 두고 보니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그 와중에도 음식점 간판을 눈에 꼭꼭 담았다. 'MARDIN ANTiKSUR CAFE RESTAURANT' 훗날 마르딘에 가는 분이 있다면 이 집에 꼭 들러보라고 권하기 위해서였다.
음식점 사장과 종업원들은 무척 친절했다. 여기저기 흙을 묻히고 다니는데도 눈 한번 찌푸리지 않고 차이까지 내왔다. 밤에는 마당을 야외극장으로 바꿔서 공연을 한다는 자랑도 잊지 않았다. 유적을 그렇게 이용하는 것이 이방인에게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낯설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자부심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사연이야 어쨌든 여행자로서는 선물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행복한 날이었다. 그런 뜻밖의 선물 역시 여행을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이유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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