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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당한 아이…엄마는 "왜 참았냐"고 했다

[편집자주]  박원순 성추행 사건 피해자가 이런 편지를 썼다. "처음 그 때 저는 소리 질렀어야 하고 울부짖었어야 하고 신고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게 너무 후회된다고 했다. 긴 침묵의 시간 동안 힘들고 아팠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침묵하게 하는 '구조' 문제였다. 그 안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전하고 싶다. 울부짖지 못한 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당신은 용기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울부짖지 못할 수밖에-③]'피해자다움' 강요에 대한 우려…전문가 "'동등한' 인간의 말로서 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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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벌써 10년 전 얘기라 했다. 그해 여름이었다. 이연지씨(26, 가명)는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다. 친구네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저녁, 지하철 안이었다. 자리에 앉아 졸고 있었다. 허벅지에 감촉이 느껴져 옆을 보니, 한 중년 남성이 손등을 슬며시 대고 있었다. 놀라서 몸을 움직이자 그는 아무 일 없는 척했다. 이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역에서 내렸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도무지 몰랐다. 그저 두렵고 피하고 싶었다. 진정이 된 뒤엔 계속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뒤에야, 엄마에게 어렵게 털어놓았다.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 XX 나쁜 XX네", "연지야, 네가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어" 같은, 그런 평범한 위로. 그러나 그가 처음 들은 말은, 큰 상처로 돌아왔다. "뭐? 그걸 왜 참고 있었어?",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걱정과 화가 섞인 말이었으나, 이씨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참은 내가 바보였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그 자책은 한참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할까. 피해를 겪으면 즉각 거부하며 소리치고, 바로 증거를 모으며, 그걸 반드시 빠르게 신고하고, 그 이후엔 아주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리 행동해야만 할까. 그렇게 못했다면 의심하고 비난받아야 마땅할까. 그런 '피해자다움'에 대한 시선이, 또 다른 가해가 될 뿐 아니라 피해자들이 침묵하게 만든다는 우려가 쏟아진다.

그냥 행복하고 싶은, 평범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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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극·뮤지컬 관객들이 문화예술계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이동훈 기자

성폭력 피해를 털어놓으면, 숱한 말과 의심이 쏟아진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요구다. "왜 그때 피하지 않았느냐", "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 "몇 년씩 참았느냐", "증거는 있느냐" 등이다. 피해로 인한 상처를 달래고, 진상을 밝히기에도 버거운 그들에게, "너 정말 피해자가 맞느냐"고 따져 묻는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순간이라도 피해자가 되고자 한 적이 없다. 원치 않게, 어느 날 일순간에 피해를 겪은 것뿐이다. 유난스러운 이도, 별종도 아니다. 잘못을 저질러 피해자가 된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행복하게 살고 싶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이는 피해자들이 많이 언급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힌 서지현 검사는 "피해자다움 따위는 없다. 피해자야말로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사람"이라고 했다. 박원순 시장을 성추행으로 고소한 피해자는 "저는 사람입니다. 저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제 가족의 고통의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 피해자인 김지은씨는 저서 '김지은입니다'에서, 한 챕터를 다 써가며 '나, 김지은'이란 자신의 이야길 했다. 장녀로 태어났고, 유약하고 겁 많은 어린 아이였고, 유치원에 다닐 땐 "김지은!"이란 선생님 부름에 "네!"하고 크게 답하는 것도 두려웠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서점을 운영하는 게 작은 꿈이었다. 김씨는 "평범하게 자라 평범하게 살고자 발버둥 친 비정규직 노동자였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미투 이후, 그를 향한 2차 가해는 가혹했다. 김씨는 "미투 이후 상상도 못한 수많은 거짓 서사가 따라왔다"고 했다. 맥락과 전후 내용이 지워진 문자 캡쳐본들이 거짓 주장에 동원 됐단다. 의료 기록과 병원 진단서가 온라인에 나돌기도 했다. 김씨는 저서에서 "모르는 사람들의 작은 말에도 심장이 산산조각 깨지는 것 같았다"고 그 기분을 표현했다.

'피해호소인'이란 기괴한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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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혁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 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를 공개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박원순 시장 사건에서도 피해자를 향한 의구심이 지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특히 정치적 지지와 맞물려, 그 성향에 따라 피해자를 압박하는 일부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게 '피해 호소인'이란 말이었다. 여권을 중심으로 박원순 시장 사건 피해자에게 '피해 호소인'이란 표현을 반복해서 썼다. 신조어나 다름없을 만큼, 성희롱 피해자에게 쓰던 말이 아녔다. 이에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22일 오전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경찰에 신고하는 즉시 법적으로 '피해자'가 된다. 이렇게 피해자란 명칭도 쓰면 안 되는듯한 사회 분위기는 생전 처음 봤다"고 비판했다.


박 시장 사건 피해자를 향해선 지속해서 "증거를 대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이에 피해자 측이 "증거는 수사기관에 제출했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증거를 대라고 하고, 그래서 증거를 얘기하면 '그게 어떻게 성추행이냐'는 식으로 말할 것"이라며 "얘기하면 꼬투리를 잡으니, 방어 차원에서 수사기관에 제출했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 논리에 따라 달라지는, 피해자를 향한 '잣대'가 장기적으로 좋지 않단 지적도 나왔다. 오 교수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편인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지면, 가치 판단에서 혼란이 온단 설명이다. 이어 "그러면 운이 좋으면 빠져 나가고, 걸리면 운 나쁘게 걸렸단 얘기가 나온다"며 "길게 봤을 때 정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피해자를 제대로 바라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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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내용이 담긴 대자보와 메모들이 16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도서관 입구에 부착돼 있다./사진=뉴시스

피해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는 매우 단순하다.


오 교수는 "정치적 지지와 상관없이, 옳으면 옳다, 그른 건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성숙한 사회"라며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상식선에서 접근하면 답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니 피해자를 특별히 바라보자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저서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에서 "피해자 말을 존중하려면 그 말의 맥락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소모하지도, 소비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를 성역화하지도, 자신의 해석을 강요하지도 않으면서 '동등한' 인간의 말로서 상대의 목소리를 듣잔 의미다.


그러면서 그는 피해자들이 내는 목소리를 독려했다. 미투 얘기다. 권김현영 연구활동가는 저서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며 "말을 하면 확실히 달라지는 게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더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똑같은 문 앞에서 열지 말지 수천 번 망설이며 계속 서 있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김지은씨는 저서에서 미투를 결심하게 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당시 안 전 지사의 수행 팀장을 했던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수화기 너머 작은 목소리조차 심장을 때리는 것 같았다. 이상함을 느낀 선배가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고, 김씨는 고민 끝에 피해 사실을 어렵게 털어놓았다. 적막이 흘렀다. 그는 속으로 '역시 다 똑같구나, 도와줄 사람은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줄게."


그 한마디에 두려움이 깨지고, 김씨는 결심했단다. 세상에 피해 사실을 알리기로.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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