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마스크 쓰기 꺼려지는 이유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우리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중략)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를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그 질병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은 자기들의 습관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만 민감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 가운데 일부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20세기의 지성은 알제리의 평범한 항구도시 오랑을 무대로 흑사병에 맞서는 군상들을 담담히 묘사했다.
소설 속 오랑의 시민들은 페스트 창궐로 도시가 폐쇄된 뒤에도 한동안 평소처럼 살아갔다. 감염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는데도 매일 카페와 식당, 극장으로 몰려가 즐겼다. 그러는 사이 도시는 점점 지옥으로 변해갔다.
도시에 대한 봉쇄가 풀리기까진 9개월이 걸렸다.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가 가라앉기까지 걸린 시간이 9개월이었으니 터무니없는 설정은 아니었다.
지금 미국도 페스트 사태 초기 오랑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 확진자가 빠르게 늘고, '지역사회' 감염자까지 출현했지만 누구도 대규모 집회를 자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통령이란 사람은 오히려 이 시국에 사람들을 불러모아 유세를 연다.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의 코로나19 예방 수칙이라곤 아픈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아프면 집에 있으라는 것 정도다. 심지어 건강한 사람에겐 마스크 착용을 권장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실제로 미국 길거리에선 마스크 쓴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와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마스크를 쓴 사람은 환자 또는 범죄자라는 게 미국인들의 인식이다. 감염병에 걸려 마스크를 써야 한다면 애초에 밖에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동양인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다간 오히려 인종차별적 증오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최근 뉴욕의 한 지하철역에서 마스크를 쓴 아시안 여성이 한 흑인 남성으로부터 '병 걸린 X'이란 욕설과 함께 폭행을 당한 뒤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는 증언들이 잇따르고 있다.
마스크를 쓰지 말라는 미 당국의 권고는 의료진에 필요한 마스크의 공급난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마스크가 상징하는 공포의 확산을 원치 않는 이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TV 기자회견이랍시고 나와서 한다는 말이라곤 "미국인의 코로나19 위험은 아주 낮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독감 예방한다고 생각하고 본인처럼 손을 자주 씻으라고 할 뿐이었다. 코로나19를 마치 사망률 0.1% 미만의 독감과 마찬가지로 취급하는 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 수사일까.
11월3월 대선 승리를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눈에 코로나19 사태는 자신의 재선을 방해할 수 있는 걸림돌일 뿐이다. 대선 전까진 조용히 덮고 가는 게 그의 목표다. 코로나19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는 CNN 등의 언론을 '가짜뉴스'라고 비난하는 것도 그래서다.
미국내 코로나19 확진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건 당국이 의심환자들에 대한 검사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임을 누가 모를까. 심지어 중국을 다녀온 의심환자도 자발적으로 검사를 받으려면 보험 처리 후 본인부담금만 최대 수백만원에 달한다. 코로나19 진단 키트가 있지만 CDC는 국제시약자원(IRR)이란 국제기구를 통해 구하라고 떠넘길 뿐이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보다 정치적·외교적 이해를 앞세우는 대통령을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지옥을 견뎌내는 건 오롯이 우리 소시민들의 몫이다.
뉴욕=이상배 특파원 ppark14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