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으면 우리 그룹도 없어" 멤버 섬기는 쌍방향 배려
신년기획/아이돌 리더십
아이돌 리더의 조건 ‘카리스마+서번트’ 리더십…“똑똑한 리더보다 말 통하는 리더”
[편집자주] “나만 따라와”하는 리더의 시대는 갔다. 분명한 목표를 잃지 않는 카리스마도 중요하지만, 팀 전체 분위기를 상승시킬 관계의 함수는 더 중요해졌다. 정확하게 지적하되 부드럽게 대하는 리더의 덕목은 아이돌 그룹에서 현재 유난히 돋보이고 있다. 때론 한 걸음 진전을 위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때론 숨겨진 멤버들의 아픔을 보듬는 성공한 아이돌 리더들을 따라가 봤다. 각계각층에서 흔들리는 리더십에 작은 해답이 될지 모를 일이다.
때론 결기있는 한마디를 던지고, 때론 멤버들과 꾸준한 소통을 놓치지 않는 '카리스마+서번트' 리더십으로 팀을 매일 진화시키는 BTS(방탄소년단) 리더 RM(랩몬스터). BTS는 RM을 중심으로 개성 속 단합을 모색하며 글로벌 스타로 굳건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 |
지난해 11월 MBC 오디션 프로그램 ‘언더나인틴’에서 퍼포먼스팀의 전도염은 막내인데도 리더로 나섰다. 진도를 못 따라오는 외국인 멤버를 도와주거나 “집중합시다”하며 침체한 팀 분위기를 쇄신했다. 결과는 성공적. 팀의 형들은 “딱 필요한 말을 해줬다”며 막내 리더십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2월 같은 방송에서 파트 B조의 무대는 실망스럽게 끝났다. 리더 배현준은 형들의 의견만 듣다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리더가 교체되는 수순에 이르렀다.
팀의 생존은 리더십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처럼 1인 독주 체제로 멤버들을 ‘따라오라’고 강요하는 ‘일방적 카리스마’나 멤버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듣는 ‘무한 배려심’은 요즘 리더십에서 배척 1순위다. 세심한 위로를 잊지 않으면서 할 말은 하는 복합적 카리스마가 아이돌 그룹 리더십에서 우선순위로 떠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요즘 아이돌 그룹 생존 방정식에서 가장 중요한 공식이 소통과 공감”이라면서 “그룹의 리더는 때론 엄마처럼 사사로운 일에 위로와 배려를 잊지 않으면서 때론 아빠처럼 중요할 때 먹히는 강력한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똑똑한 리더보다 말 통하는 리더가 팀의 생존을 좌우한다는 의미다.
그룹 방탄소년단 RM(랩몬스터, 오른쪽)이 지난 10월 2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진행된 '제9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화관문화훈장을 수상한 뒤 수상소감을 전하고 있다. |
‘BTS 리더의 조건’…“눈높이 낮춰 상대방 마음 읽고 서로 공감해야”
2000년대 초반까지 아이돌 그룹은 탈퇴와 해체를 반복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 아이돌 그룹은 무한 생존력을 담보한다. 리더의 새로운 자질과 배려, 소통에 이르는 과정의 미학이 돋보이면서 아이돌 그룹은 생존은 물론, 생산성과 창의성까지 보장받고 있다.
아이돌 리더십의 가장 생생한 본보기는 BTS(방탄소년단)이다. 연장자가 으레 팀의 리더가 되는 원칙을 깬 이들은 형, 동생 할 것 없이 RM(랩몬스터, 본명 김남준)을 리더로 따르고 있다.
지난해 단독 전화인터뷰로 만난 RM은 “나는 리더라기보다 대변인 격으로 나서고 있다”며 “말할 기회가 많아 팀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주의하고 있다”고 겸손해 했다.
그는 팀을 이끌면서 바쁜 멤버들을 소통의 창구로 모이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면서 “그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키워드는 소통이고 공감”이라고 했다. 그는 “이 단어들이 진부한 얘기일 수 있지만, 결국 변하지 않은 사실”이라며 “우리들이 얘기하고, 상대방이 또 얘기하면서 눈높이를 낮춰야 서로 공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리더는 멤버뿐 아니라 팬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목표와 꿈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눈높이를 낮춰 듣고 협력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리더는 상대방의 마음을 ‘리딩’(Leading)하지 않고 ‘리딩’(Reading)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읽혔다.
그래서인지 BTS는 전 멤버의 주체화를 꿈꾼다. 멤버 간 장단점이 또렷한 특징을 파악해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은 나누는 식이 그들이 지향하는 생존 방식이다.
RM은 “멤버 각자 강한 분야가 있는데, 이를 독립변수로 보지 않고 서로 잘하는 걸 다른 멤버에게 가르쳐주는 상호작용을 통해 한 단계 올라선다”고 설명했다. 멤버들이 트위터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개인 계정을 소유하지 않은 것도 리더가 멤버십을 위해 취한 설득이었다.
돋보이는 개인의 ‘따로 노는’ 그림보다 부분의 차별을 하나의 통합으로 엮는 영리한 ‘협력 방식’을 통해 인지도와 폭발력을 높인 리더의 아이디어는 결과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이끌었다.
강렬한 '카리스마'와 멤버드를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으로 주목받는 아이돌 리더들. (왼쪽부터) 동방신기 유노윤호, 하이라이트(옛 비스트) 윤두준, 신화 에릭. |
‘카리스마 리더십’에서 ‘서번트 리더십’까지…“멤버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BTS의 RM처럼 한마디 말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은연중 보이면서 혼자 튀지 않고 구성원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며 작은 일에도 헌신하는, 이른바 ‘서번트 리더십’(섬김 리더십)을 결합한 ‘카리스마+서번트 리더십’은 아이돌 그룹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리더십 사례다.
비스트(현재 하이라이트)의 리더 윤두준은 멤버들과의 단체방에서 “가마를 탈 때 가마의 높이보다 가마를 메고 있는 가마꾼의 어깨를 먼저 생각하라”는 한마디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선사했다.
그러면서도 늘 겸손한 태도로 멤버들의 사소로운 일을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목이 안 좋은 양요섭에게 “네가 없으면 비스트도 없어”라는 말로 자신감을 주고 단합을 극대화한 일화는 유명하다. 자신의 활동이 늘어나도 수입을 n분의 1로 나누며 “이제 너희(멤버)에게 갚을 수 있다”고 말해 훈훈한 감동까지 낳았다.
익사이팅디시가 최근 조사한 '리더십이 있어 정치도 잘할 것 같은 아이돌 리더'에서 '카리스마+서번트' 리더형이 높은 순위에 올라있다. /그래프=익사이팅디시 |
아이돌 그룹 사상 최초로 20년 장기 생존력을 이어가는 그룹 신화의 에릭은 ‘카리스마+서번트’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표본이다.
에릭은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이 만료될 무렵 신화라는 그룹을 존속시키기 위해 직접 변호사를 만나며 해결 주체로 나서는 등 위기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문제가 생기면 카리스마가 발동하고, 신화 공백이 길어지면 가슴 쓸어내리며 멤버들과 대화 창구를 만드는 세심함까지 강하고 부드러운 리더십의 모든 걸 갖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최근 익사이팅디시가 ‘리더십이 있어 정치도 잘 할 것 같은 아이돌 리더’를 묻는 투표에서도 ‘카리스마+서번트’ 리더형이 모두 1~3위를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 동방신기의 유노윤호는 따뜻하면서도 힘 있는 리더십으로 1위, 따끔한 충고와 부드러운 위로를 겸비한 뉴이스트W의 JR이 2위, BTS의 RM이 3위를 차지했다.
자신을 낮추고 사사로운 일까지 살피고 보듬는 전형적인 '서번트 리더십'의 주인공들. (왼쪽부터) 엑소 수호, 샤이니 온유, 인피니트 성규. |
‘서번트 리더십’ 유형에는 샤이니의 리더 온유를 빼놓을 수 없다. ‘두부’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온순하고 부드러운 게 특징. 무대 위에서 간혹 안무를 틀리는 탓에 헐렁하다는 이미지도 있지만, 멤버를 손수 챙기고 스케줄 이후 뒷정리를 도맡는 등 전형적인 ‘섬기는 리더’ 타입이다.
인피니트의 성규 역시 어리바리한 모습에 ‘규몰이’를 당하곤 하지만 누구와도 허물없이 지내며 소통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윽박지르지 않으면서 조근조근 얘기하는 엑소의 수호는 부드러운 리더의 상징으로 통한다. 그의 리더십에 대해 멤버들은 “소통을 정말 잘한다. 부드럽고 친근하게.” “리더를 바꾸면 생계가 무너진다” 같은 평가로 대신했다.
스타 브랜드를 통한 전통적인 ‘카리스마 리더십’ 유형도 있다. 빅뱅의 지드래곤은 데뷔 때부터 타고난 음악적 능력을 앞세우면서 엄격한 리더의 자세를 보여 카리스마형으로 곧잘 인용된다. 멤버들을 소개할 때도 “최고의 나의 동료”라는 말을 잊지 않아 빅뱅을 하나의 브랜드로 정착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맏언니’가 주로 리더가 되는 걸그룹 분야에서 2NE1(투애니원)의 씨엘은 드물게 개성과 스타일을 내세워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 역할에 충실했다.
개성과 실력을 앞세워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십'을 발휘하는 리더들. 빅뱅 지드래곤(왼쪽)과 2NE1 씨엘. |
‘카리스마+서번트’ 리더십으로…권한 위임으로 역할 분담
대중음악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리더십의 분류는 다양하지만 전형적인 유형에서도 조금씩 다른 유형과 섞인 게 아이돌 리더십의 특징이라며 “리더십이 점점 민주적으로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명령과 복종이 존재하는 문화에서 부드러운 리더십이 부각하는 문화로 바뀌는 시대에서 임파워먼트(권한 위임)가 중요한 덕목이 됐다”며 “멤버들에게 적절한 권한이 위임되면 실수도 늘어나지만 능동적인 창의성도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아이돌 그룹의 리더십 변화에 주목할 만한 환경적 요소로 3대 유명 기획사 대표의 마인드 전파, 팬덤의 집단 지성 등이 거론된다.
젊은 감각의 싱어송라이터인 JYP의 박진영 프로듀서, 늘 한발 앞서가는 시스템을 추구하는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 ‘아빠 미소’로 상징되는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등으로부터 영향받은 소속 또는 비소속 아이돌그룹들이 작곡이나 프로듀서 같은 음악적 능력은 물론이고 부드럽고 합리적인 소통의 덕목이나 스타일을 흡수한다는 것이다.
익사이팅디시가 최근 조사한 '리더십이 있어 정치도 잘할 것 같은 아이돌 리더' 순위. /그래프=익사이팅디시 |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 노동집약적인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서 벗어난 극적인 예가 BTS”라며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할 만큼 자율성을 높이고 전인적 매력이 부각되며 예술성을 펼치는 것 자체가 리더십의 변화에 따른 결과”라고 진단했다.
황 평론가는 이어 “여기에 팬클럽이 서로 소통하면서 아이돌을 모시는 ‘서번트 리더십’이 아이돌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 안에서 상호진화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능력보다 소통이 지금 아이돌 그룹 리더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됐다”며 “한 명의 리더가 보여주는 카리스마가 아닌, 주변을 보듬는 포용력이 그룹 생존의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