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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사로 가을을 마중가다

구룡사로 가을을 마중가다

구룡사로 가는 숲길./사진=이호준 여행작가

10월이다. 이제 정말 가을의 안쪽에 들어섰다. 봄이 되면 남쪽에서 올라오는 꽃소식에 엉덩이가 들썩거리듯, 가을이 오면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단풍소식에 마음이 설레기 마련이다. 가을이 어디까지 왔을까? 급한 마음에 원주 치악산에 있는 구룡사를 찾아갔다.


강원도 원주시와 횡성군에 걸쳐 있는 높이 1288m의 산. 치악산에 대한 간단한 정의다. 태백산맥 중서 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룡사 계곡과 우거진 숲이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남쪽에 향로봉, 남대봉과 북쪽에 매화산·삼봉 등 여러 봉우리가 키를 재고 있다. 치악산은 또 명산답게 많은 절들을 품고 있다. 한때는 76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사찰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구룡사·상원사·영원사·관음사·국향사·보문사·입석사 등이 남아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구룡사는 절보다 구룡사까지 가는 길에 더 마음이 간다. 물론 내 주관적인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름드리 금강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장엄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곧게 자란 소나무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黃腸禁標) 덕분이다. 이는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 벌채를 금지하는 표시로 구룡마을 입구와 치악산 정상 부근에 함께 남아있는데 이런 예는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길옆에 소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 세월을 이고 진 우람한 참나무들이 소나무에 질세라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는 한 장소에 공존이 어려운 나무들이다. 그런데도 이곳에서는 공간을 적당히 나누어 어울려 살고 있다. 이 또한 불국토에서나 볼 수 있는 부처의 뜻일까?

구룡사로 가을을 마중가다

밖에서 본 구룡사./사진=이호준 여행작가

호젓한 길 위로 가을을 듬뿍 머금은 햇살이 비껴든다. 길은 조금도 험하지 않다. 노인도 아이도 그저 산책하듯 걷다보면 적당히 몸이 풀릴 무렵 구룡사에 닿을 수 있다. 길을 걷는 내내 계곡이 함께 한다. 물이 어찌나 맑고 푸른지 명경지수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그 맑은 거울에 나무들이 스스로의 몸을 비쳐본다. 귓전을 간질이는 물소리에도 가을색이 완연하다. 산국(山菊)처럼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 연인들의 어깨 위로 낙엽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길 오른쪽에서 만나는 부도탑들은 꾸밈이 없어 좋다. 고졸한 멋이 초가을의 정취와 딱 어울린다.


여기저기 해찰하며 걷다 눈을 들어보니 전나무 숲이 나타난다. 거길 지나면 바로 구룡사다. 내내 신명이 붙은 걸음이었다. 몸도 마음도 가볍다. 절 마당에 세워놓은 승용차들과 대형 관광버스가 눈에 거슬리지만, 당당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에서 위안을 받는다. 수령 200년이 넘어서 원주시가 보호수로 지정한 이 은행나무는 수세(樹勢)가 무척 좋고 아름답다.


구룡사는 원주 8경중 제1경으로 꼽힐 만큼 수려한 사찰이다. 신라 승려 의상이 666년 창건했다고 알려진 이 절은 이름과 관련한 창건신화가 전해진다. 지금 절터에 있던 깊은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의상이 못을 메우고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이 비를 내려 온 산을 물로 채웠다. 이에 의상이 부적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갑자기 연못의 물이 말라버리고 용 아홉 마리는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의상은 이러한 연유를 기념하기 위해 절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지었다고 한다.

구룡사로 가을을 마중가다

구룡사 경내. 왼쪽이 대웅전이다./사진=이호준 여행작가

전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룡사는 창건 이후 도선, 무학, 휴정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으뜸 사찰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寺勢)가 이울어지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고 했다. 그래서 거북바위의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사세는 회복될 줄 몰랐다. 고심 끝에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에 거북 구(龜)자가 들어간 구룡사(龜龍寺)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절에서 눈 여겨 볼 곳은 관문 역할을 하는 보광루(普光樓)다. 강원도 유형문화제 제145호로 위용이 당당하고 나무를 거의 가공하지 않고 쓴 기둥은 자연미를 잘 전해준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던 대웅전은 2003년 화재로 타버리고 지금 있는 건물은 실측자료를 바탕으로 2004년 복원된 것이다. 그밖에도 삼성각, 심검당, 설선당, 적묵당, 천왕문, 종루, 국사단 등 모두 19동의 건물이 있다.


보광루 앞에 서서 건물이 품고 있는 시간을 읽는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 기둥 하나하나가 전해주는 옛이야기를 듣는다. 여행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 보광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니 가을이 먼저 와 있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가을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를 천천히 걷는다. 부드러워진 바람이 손을 내밀어 온몸을 감싸준다.


대웅전에 올라 법당을 들여다보니, 신도들이 빈틈없이 들어서서 예불을 올리고 있다. 들어설 엄두도 못 내고 멀리 서서 간단하게 예를 올린다. 부처의 뜻을 마음에 새기면 되는 것이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마음은 이미 평화로 가득 차 있다. 돌아서서 내려오는 발걸음이 계절의 무게만큼 가벼워져 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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