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개혁 루머에 불안심리 확산
달러·채권·골드…“소나기 피하자” 머니무브
미중 무역전쟁 등 대외 불안 요인과 경기 침체로 금융시장 전반적으로 불안심리가 확산하고 있다. 주요 금융기관, 연구소들이 일제히 한국의 경제성장 전망치를 낮춰 잡자 시중 유동자금은 빠른 속도로 금, 달러, 채권 등 안전자산으로 피신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과 미진한 경제구조 개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화폐개혁 소문에 부동산 폭등설, 국회·정부 엇박자가 괴소문 자초
경제 불안심리가 확산하면서 골드바 등 금관련 상품 수요가 늘고 있다. |
최근 금융시장에서는 리디노미네이션(화폐개혁) 관련 괴소문이 급속도로 퍼졌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개혁 중에서도 화폐 액면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현재 1000원을 1원으로 낮추는 식이다. 지난 3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국회에서 전문가들과 함께 공론화해보는 것은 어떠냐’는 의원들 질의에 동의한 것이 리디노미네이션 소문 확산의 기폭제가 됐다.
이 총재의 발언 후 유튜브와 인터넷 재테크 카페 등을 중심으로 리디노미네이션에 관한 괴소문이 밑도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부동산 투자 커뮤니티로 잘 알려진 한 인터넷 카페에서는 ‘리디노미네이션’으로 검색하면 관련 글이 수백 건 쏟아진다. 대부분 ‘부동산 폭등설’ ‘지하경제 양성화설’ ‘화폐가치 하락설’ 등 근거 없는 추측성 글이다.
유튜브에는 더욱 자극적인 주장이 넘쳐난다. 한 예로 유튜브에서 ‘부동산 핵폭탄 터진다’는 동영상은 조회 수 74만건을 기록했다. 이 동영상은 ‘5억원짜리 집이 50만원이 되면 싸다고 느껴 수요가 늘면서 가격이 오른다’며 부동산 폭등설을 주장했다.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하자 이 총재는 지난 5월 20일 기자들과 만나 한은은 화폐 단위 변경 계획이 없다고 못 박았다. 이 총재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 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한은은 검토하지도 않고 추진하지도 않겠다는 입장에 조금도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리디노미네이션 논란은 정부와 국회의 엇박자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지난 3월 이 총재의 발언이 단초가 된 이후 4월 기자간담회, 금융통화위원회 등 공식 석상에서 이 총재와 홍남기 경제부총리 등은 ‘추진 계획이 없다’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지난 5월 13일 국회에서는 이원욱·심기준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주도로 ‘리디노미네이션을 논한다’라는 토론회가 열려 세간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금거래 늘고 가격 ↑, 불안감 커지는 외환시장
리디노미네이션 논란은 그렇지 않아도 미중 무역전쟁 등으로 불안한 금융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주식 등 위험자산에서 달러, 채권, 금 등 안전자산으로 ‘머니무브’가 곳곳에서 빚어졌다. 리디노미네이션이 단행되면 화폐가치가 폭락해 원화 금융자산의 가치가 하락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안전자산으로 돈이 대거 몰린 것이다.
실제 5월 들어 한국거래소에서 거래된 평균 일일 금거래량은 3월보다 2.5배 증가한 43㎏에 달했다. 금 1g 가격은 5월 21일 기준 4만9090원으로 5만원에 육박할 정도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금값으로 시세차익을 노린다기보다는 경기 전망에 불안감을 느껴 투자하려는 수요가 대부분인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보수적인 투자성향 자산가들이 많은 시중은행에서는 골드바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KB국민은행 PB센터 전 지점에서 100g, 10g 골드바 판매가 일시 중단됐다. KEB하나은행도 골드바 배송에 소요되는 시간이 늘었다. 우리은행은 지난 4월 골드바 판매금액이 전달의 두 배를 넘었다.
미국 달러를 찾는 수요도 크게 늘고 있다. 연초 1120원 선에 머물던 원달러 환율은 지난 5월 22일 장중 한때 1196.5원까지 올랐다. 장중 기준 지난 5월 17일 기록한 연고점(1195.7원)을 재차 돌파했다. 신동준 KB증권 상무는 “달러가치가 오를 때는 원화 금융자산을 갖고 있으면 앉아서 손실을 보게 된다. 국내 경제와 원화가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미국 달러화를 사들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펀드 시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원금 손실 가능성이 낮은 채권형 펀드로 뭉칫돈이 몰린다. 펀드평가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5월 21일까지 국내 채권형 공모펀드에는 5조9973억원, 해외 채권형 펀드에는 1조원의 자금이 들어왔다.
금융시장에서 안전자산 쏠림 현상이 심화되면 국내 경제에는 일종의 ‘돈맥경화’ 현상이 나타난다. 유상증자, 채권 발행 등 모험자본의 공급이 위축되면 당장 돈줄이 필요한 기업들의 자금 압박이 심해질 수 있다. 달러 강세가 지속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산다는 것은 결국 국내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이어서 외환시장 불안감만 증폭된다.
노무라 1%대 경제 전망, 기업 투자환경 악화 지적
이 같은 금융시장 변화에는 한국 경제의 미래와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외국계 IB(투자은행)에서는 아예 1%대 전망치를 내놓은 곳도 나타났다. 일본의 노무라가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을 1.8%로 내다봐 가장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 경제분석기관인 캐피털이코노믹스는 한국이 올해 1.8%, 내년에는 2%, 2021년에는 2.5% 성장할 것이라며 지난해만큼의 성적을 3년 안에 회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이들이 보고서를 통해 우려하는 요인은 대동소이하다. 불안한 대외 요인을 첫손에 꼽는 가운데 기업 투자환경 악화를 빼놓지 않았다. 1%대 성장률 전망으로 충격을 안긴 노무라는 대외 수요 약세가 성장에 부담을 주는 가운데 정부의 추가경정예산이 경기 둔화 압력을 상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는 “경제에 대한 불안과 정부에 대한 불신이 일부 반영돼 있고 현 정부의 재벌 개혁 등 경제정책과 리디노미네이션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 같다. 1년 뒤 총선과 그 후 대선을 앞둔 상태에서 불확실성을 키우는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설명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안전자산 선호가 장기화하면 국내 경제활력이 둔화되고 국가경쟁력이 약화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배준희 기자 bjh0413@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