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을 만지는 손길, 크로닉
삶의 ‘카운트다운’
‘9, 8, 7, 6, 5, 4, 3, 2, 1..’ 깜박 거리는 빨간 손바닥 아래 숫자가 하나씩 줄어듭니다. 관객들은 용수철처럼 심장이 몸 밖으로 빠져 나오는 충격을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뒷통수를 얻어맞고 몇초 후 엔딩 크레딧이 아무 음악 없이 올라갑니다. 아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감독은 이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 충격을 줬는데! 어쭙잖은 음악으로 뒷통수의 얼얼함을 달래줄 수는 없잖아!’
낯선 소재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착시
미셸 프랑코 감독의 2015년작 ‘크로닉(Chronic)’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일상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를 통해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전달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간호사 데이비드는 호스피스 간호 회사에 소속되어 교대 근무를 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혹은 죽음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는 환자들을 보살핍니다. 거동을 거의 못하는 환자가 일상에서 필요한 모든 움직임을 데이비드가 도와줍니다. 식사, 투약, 산책, 대화, 같이 TV 보기, 샤워, 용변 보조까지 가족 간에도 도와주기 편하지 않은 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기준에 따라 살아있는지 애매모호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들을 데이비드는 세심하게 안고 씻기고 옮깁니다. 사자(死者)의 염을 하는듯한 엄숙함과 긴장감이 스크린 내에 가득해집니다. 스크린의 사각 프레임이 마치 생자(生者)의 관이 된 듯. 환자가 실제로 관에 들어가게 되면 데이비드는 또 다른 생자(生者)의 염을 시작합니다.
환자처럼 누워있는 데이비드(좌), 환자를 돌보는 데이비드(우) |
영화는 이런 엄숙함의 과정 중간중간 그 바깥세상(?)의 일상, 데이비드의 일상을 보여줍니다. 환기의 시점이지만,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비번인 데이비드가 하는 일은 누워서 TV를 보고, 페이스북에서 딸 사진을 넘겨보거나, 허공을 바라보며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나 데이비드와 환자의 가족이 얽히는 시점이 열리면, 살아있는 자들의 집착과 의심, 공격과 방어가 시작되고, 갑자기 잠에서 깬 듯, 귀가 뻥 뚫리는 진짜 현실이 펼쳐집니다. 데이비드는 허우적대고 관객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합니다. 데이비드와 환자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다가 진짜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불현듯 나타나는 식의 착시가 반복됩니다.
‘저 환자는 누구지, 부인인가? 아니 그럼 그 다음 저 남자 환자는? 저 환자는 왜 가족들에게는 나가라고 소리치는거지?’
어디를 보고 있는거에요?
이렇듯 영화는 관객들에게 데이비드와 환자들의 이름만을 던져주며 반복적으로 데이비드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게 만듭니다. 그가 바에서 위스키를 홀짝이며 옆자리의 약혼 커플에게 방금 21년간 같이 살았지만 에이즈로 죽은 아내를 묻고 왔노라고 거짓말을 할 때는 더더욱.
그를 계속 믿어도 되는 걸까요?
친절하지 못한 전개입니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듯, 장면마다 감독의 상상력을 한 꺼풀씩만 벗겨서 펼쳐놓다가, 어느 순간 다큐 냄새를 확 걷어내며 묻습니다. 객석 앞자리까지 훅 다가오는 강한 물음의 감정선.
‘너도 지금 데이비드를 성희롱으로 고소한거니…?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의 환자가 아내가 되기도 하고, 형이 되기도 하는 그런 ‘관계 지음’ 속에서 데이비드는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가 섬세한 몸짓으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환자 대신 춤을 출 때, 그 환자의 가족들은 물론 관객들마저 그를 배신하고 엉뚱한 곳을 혹은 엉뚱한 신체 부위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며 혹은 쳐다보지 않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하는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다가올 것이지만, 남 얘기처럼 흘낏 거리기만 하다가(그 사이 그저 가십이라도 하나 들리면 옳거니 하면서 낄낄거리겠지) 뒷통수에 받게 되는 묵직한 진실의 해머. 그런 ‘남 얘기’를 마치 처음 짚어주는 듯 미셸 프랑코 감독은 데이비드의 과거와 현재를 빌어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실어 보냅니다.
그가 얘기하는 방식, 몸짓
데이비드가 환자를 돌보는 몸짓은 대담하면서도 섬세하며, 유연하면서도 엄격합니다.
옷자락 소리. 한쪽씩 나뭇가지 부러지듯 데이비드의 어깨에 툭 올려지는 환자의 두 팔. 환자를 들어올리기 위해 스텝을 가다듬는 간호사. 그들 둘이 일어설 때 관객들은 같이 숨을 참으며 두 발바닥에 힘을 주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는 진짜 아내와 형조차 흉내내지 못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관객들도 그 믿음에 동참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어떤 대사 한마디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그들의 몸짓 대거리만으로 들려줍니다. 하나 하나가 귀한 장면입니다.
어느 정도의 기다림이 필요하지만, 이런 긴 날숨의 끝에 ‘왜’라는 것이 불쑥불쑥 해결될 때마다 ‘흡!’ 가쁜 들숨이 찾아듭니다.
기다림이 필요한 이유는 이 영화에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와 환자, 데이비드와 관객 사이에. 데이비드의 몸짓으로 그들은 거리를 좁혀 갑니다. ‘이리 모여봐’라고 말하는 데이비드의 신체언어는 소파에 앉은 그와 횐자의 거리를 좁히고 관객의 눈과 귀를 스크린 쪽으로 잡아당깁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의 초점으로 모였을 때, 초신성이 폭발하듯 큰 빛을 발산한 후 꺼집니다.
데이비드가 혼자 있을 때 보여주는 삶의 몸짓. 사람의 마지막과 닮았지만 반면에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는 바쁜 호흡. 어느 날, 그는 러닝머신을 떠나 상당히 무심한 얼굴로 맑은 날 도심 거리를 가로질러 조깅을 합니다. 그가 달리는 '거리'는 정해진 끝이 없이 팽창하기만 하는 듯 합니다.
그의 발은 빠르게 교차하고 양 옆의 풍경이 뒤로 넘어가지만, 앞에서 그를 잡은 카메라 워크 덕분에 속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거기다 문득 ‘몇 분째야?’하고 궁금하게 만드는 ‘롱테이크’.
‘근데 롱테이크가 몇분짜리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그의 몸짓에 집중하라구요!’
그 거리의 신호등은 ‘지금 건너’라고 깜박..깜박.. 거립니다.
[Outside The Movie]
이 영화는 제68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으며, 색깔 있는 배우 팀 로스가 간호사 역을 맡았습니다. 감독이 비교적 초보 감독임에도 시나리오만 보고 역할에 참여했다는 일부 매체의 인터뷰 말고도 그가 이 역할을 위해 어느 정도 정성을 들였는지는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래 각본대로 여자 간호사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싫은 작품입니다. 남자이기 때문에, 환자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간호사이기 때문에 성적으로나 역할적으로 힘을 가질 수 있음에도 아니, 그런 의심을 받을 수 있어서 위축될 수 있음에도 팀 로스는 어떻게 데이비드가 이를 극복해 가는가를 보여줍니다. 복잡한 감정라인을 최대한 절제하며, 무던하고 게슴츠레한 그의 눈이 명확하게 말하는 듯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은 저 사람을 돌봐야한다구’…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가 팀 로스라는 것입니다.
사진. 영화 '크로닉(chronic,2015)' 스틸컷, 네이버 영화 스틸컷, 수입·배급사 : 씨네룩스
글. M (뜨내기 영화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