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재팬에 망한 기업들이 살기 위해 찾아간 이 사람의 정체
어느 곳에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 국제사회 속 한국에게 일본이 딱 그런 이미지다. 그런 일본에게 국민들이 NO 재팬을 외치며 공격에 나섰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본의치 않게 피해를 입은 기업이 생겼다는 것이다. 취지가 취지인 만큼 어디 하소연도 못하는 이들을 위해 나선 한 기업인이 있어 만나보았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망해가는 중소기업을 구하려 나선 걸까? 조금 더 알아보자.
이름이 소피아다. 영어 이름을 쓰는 이유가 있나.
“본명은 정은정이다. 영어 이름을 주로 쓴다. 우리나라가 개인보다 역할을 중심으로 봐서 그렇다. 대표라면 대표, 친구라면 친구… 그래서 영어 이름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글로벌 사업을 많이 한다는 점도 영어 이름을 활용하는 이유다.”
“대표적으로 3개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 우선 통번역 회사인 이화코리아의 대표이사다. 또 혁신을 위해 한국수입협회가 최근 이사 임명 자격을 바꾸면서까지 젊은 여성 CEO를 등용하면서 이사로 임명됐다. 거의 막내다. 중국아시아경제발전협회 대외교류위원회의 한국 대표도 맡고 있다.”
지금의 직업을 가지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왔나.
“우선 언어를 열심히 배웠다. 중국 유학을 다녀온 이후 이화여대 통번역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졸업할 때가 되니 진로를 고민하게 되더라. 통번역 대학원 졸업생들은 보통 통번역만 전문적으로 하는 ‘인하우스’와 대기업의 프리랜서 또는 입사 3가지 중 한 가지를 정해서 간다. 사교적인 데다가 사람들 만나는 게 좋아서 교류재단이나 협회 쪽을 알아봤었다.”
“그런데 평생 금융권에 계셨던 아버지가 취직을 다시 생각해보라 조언하셨다. 직장에서 일은 잘할 테지만, 조직에 있으면 일을 잘해도 승진 조금 빠른 것 외에는 기업의 노예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느낀 회의감에서 비롯된 조언이었다. 월급의 달콤함에 벗어나기 어려우니 취업보다는 네가 하고 싶은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기업 면접을 보고 통역 일을 맡으며 경험을 늘려갔다. 그러다 김애련 이사와 법인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법인이긴 했지만 처음에는 직원도 없이 일했다. 일이 많아지면서 직원도 고용하고 분야도 넓히게 됐다. 글로벌 행사를 맡다 보니 노하우가 쌓여 행사 대행까지 진행하고 있다.”
사업 시작하는데 부모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사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너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묻는다. 높은 사람, 어르신들 앞에서 또박또박 말을 잘 한다. 생각해보니 한국 사회는 자꾸 하지 말라고 하는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해도 되는 아이’로 자랐다. 아버지는 보수적인 분이지만, 결정권을 많이 주고 사회적인 시선과 잣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교육 방식이 궁금하다.
“중학생 때 머리에 무스 뿌리고 꾸미는 게 유행이었다. 다른 부모님들 같으면 말렸을 텐데 아버지는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 대신 가서 맞아라’라고 하셨다. 아버지에게 배운 건 자유와 책임 그리고 너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자유를 떠올리면 자유보다 책임이 먼저 떠오른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다. 항상 그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무언가를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 묻고 행동한다.”
“아버지는 설득해서 납득하게 하는 스타일이다. 등산을 하며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했는데 늘 정상을 가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 힘든 순간이 많은데 여기서 포기하면 앞으로도 포기하게 된다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조기졸업을 조건으로 휴학하고 떠난 2002년 월드컵 기념 국토대장정을 선두로 완주하고 조기졸업까지 달성한 바탕에는 아버지의 정신교육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가
“어머니는 사랑 그 자체다. 지금 선생님인 언니는 모범생이었다. 뭐든 잘했다. 어릴 적 피아노 선생님이 언니를 칭찬했을 때 어머니는 나에 대해 아무 말이 없는 걸 가슴 아파하셨다. 그래서 그날 돌아오면서 나를 업고 ‘은정이 잘하네, 은정이 정말 잘해’ 토닥이면서 들어오셨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가 이제 보니 이 같은 어머니의 대처 덕분이었다. 노란색으로 염색했을 때는 교회에서 아는체하지 말라 하시긴 했다.”
경험을 쌓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중국 등 해외 방송사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원 2학년 때는 통역사로 아리랑 TV에 지원했었다. 면접 보러 갔는데 그곳에서 국장님이 “1명 뽑는데 250명이 지원했다. 탈락해도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라고 했다. 나를 보면 프로그램이 자꾸 생각난다 해서 기대했는데 떨어졌다. 그런데 나중에 인천 아시안게임 때 호출하시더라. 앙드레김 선생님 패션쇼 통역도 맡고 아리랑 TV와는 지금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사업 운영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나.
“모르는 게 정말 죄라는 걸 알았다. 사업을 하면서 법적인 면을 몰랐다. 정부 지원도 세법도 몰랐다. 국세청에 전화해서 물어본 적도 있었다. 의외로 친절하게 하나하나 알려주더라. 몰라서 죄를 진 사건은 베트남 통역사를 고용했다가 1000만 원 벌금이 나왔던 일이다. 베트남 통역사가 필요했는데 베트남 통역사가 없어서 베트남 대학원생을 고용했었다.”
“문제는 비자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안 했던 거다. 어지간한 책 분량의 소명서를 작성했지만 결국 800만 원 냈다. 아, 벌금이 1억 원이었으면 쫄딱 망할뻔했구나 조심하자 했는데 최근에 벌금이 또 날아왔다. 알고 보니 대표이사는 이사하고 1주 이내에 신고하지 않으면 직무유기더라. 다행히 3만 원 정도였지만 아직도 벌금만 보면 심장이 콩닥거린다.”
최근 NO 재팬으로 본의치 않게 피해를 본 분들을 돕고 있다 들었다.
“이번에 일본 제품을 수입하던 회사들이 타격을 크게 입었다. 국내에 있는 일본 제품의 재고가 400억 원 이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은 2000원에 팔던 물건을 1000원에 내놔도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폐기 처리하려 해도 돈이 추가로 드는데 자산 50억 원 중 40억 원이 일본 제품인 회사는 망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싫지만, 일본 제품을 수입하던 한국인들은 예전 사드 사태 등을 떠올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글로벌 인사이트를 활용해 중국과 대만 쪽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중국 쪽은 대회 경제교류위원회에서, 대만 쪽은 행사 파트너였던 대만 분의 도움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중화권은 소위 말하는 ‘꽌시’ 없이는 진출이 어렵다. 그동안 쌓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있다.”
중소기업을 도우면서 느낀 점이 있나.
“수출박람회를 진행하면서 중소기업이 여러 면에서 자금력과 정보력이 떨어진다는 걸 느껴왔다. 중국에 진출할 계획이면서 중국인이 먹지 않는 음식을 대접하려 한 기업도 있었다. 또 사기꾼들이나 중국인의 상업 전략에 당하는 중소기업이 너무 많았다.”
“중소기업에서 수출을 하려고 해도 중국처럼 인맥이 중요한 나라에서는 전화를 돌리고 찾아가서 설명한다고 되지 않는다. 글로벌 네트워크가 부족한 중소기업이 이번처럼 어려운 상황에 놓일 때는 정부 차원에서 제3판로를 뚫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표로서 목표는 무엇인가.
“사실 6년 목표가 있다. 6년 후에 회장이 되어 헌신해 온 사람들에게 계열사 하나씩 만들어주는 게 목표다. 또 개인적으로 100억 원, 딸린 식구들의 꿈을 이뤄지기 위해 250억 원을 버는 것이 목표다. 일단 내년에 매출 2배를 달성하고 새로 추진하는 사업을 안착시키는 게 목표다. 우리 직원들은 에너지도 넘치고 야망과 꿈이 분명하다. 이들의 꿈을 이뤄주는 게 나의 꿈이기도 하다”
왜 100억 원인가.
“100억 원을 모으면 건물을 사서 만둣집을 차릴 거다. 중국 만두를 정말 좋아한다. 1층에는 만둣집이랑 훠궈 집, 2층에는 애프터눈 티, 3층에는 사무실을 놓고 4층에는 펜트하우스를 만들어서 매출과 관계없이 살고 싶다. 감성도 마음껏 발산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거다. 책이나 읽고 오늘 하늘은 왜 이렇게 파란지 사색하고 글 쓰는 그런 삶 살고 싶다. 새벽 감성 글도 맘껏 올리고…”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책도 쓰고 강의도 다니고 싶다. 책을 내면 저자 특강이 들어온다(웃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서 교재 말고 사업 스토리 등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책을 내고 사람과 만나고 그 콘텐츠로 강의도 하고 싶다. 무엇보다 부모특강을 하고 싶다. 진로 특강 등 여러 강의를 하며 느낀 게 학생이 아니라 부모가 교육받아야 하더라. 학생을 위한 특강이 아니라 부모를 교육할 특강이 필요하다.”
NO재팬이 지속됨에 따라 그간 일본 기업에 눌렸던 국내 중소기업이 하나둘씩 빛을 보고 있다. 반면 일본 제품을 수입하던 중소기업의 경우 떨이로도 팔리지 않아 재고를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없다. 그래서 이들을 돕는 이를 찾아 삶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고 NO재팬에도 대가가 따랐을 뿐이다. 다만 그 대가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글 임찬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