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삼성회장에게 권하지 않았다면 지금 삼성전자도 없었겠죠”
[MONEYGROUND 디지털뉴스팀] 흔히 ‘반도체 사업’하면 삼성을 제일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먼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고 컬러TV를 따로 만든 기업을 따로 있다. 한때 재계 랭킹 21위를 차지하며 삼성 이건희 회장에서 반도체 사업을 권유했을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아남그룹’. 외환위기 당시에도 근로자 해고 없이 경영을 유지했던 이 그룹의 시작과 몰락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신동으로 불리며 일본 유학
자전거 부품 만들며 사업 확장
아남그룹 김향수 창업회장은 1912년 전남 강진군에서 가난한 선비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해 신동으로 불리며 일본으로 가 니혼대학 법과 전문학부 수료 돌아와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다. 김 창업회장은 1939년 ‘일만무역공사’를 세워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다.
초기 무역업으로 시작된 사업은 해방 후 자전거 부품을 만들면서 제조업으로 사업을 확장된다. 이후 아남산업으로 사명을 바꾼다. 1968년에는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면서 김향수 회장의 선구안은 빛을 발한다.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자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고 뚝심 있게 사업을 밀어 나간다.
국내 최초 컬러TV 생산
인재 중심 경영
반도체 제품 생산에 나선 김 회장. 1970년 미국으로 제품을 수출하면서 이른바 ‘대박’을 터뜨리기에 이른다. 아남그룹은 한해 21만 달러를 벌 정도로 성공한다. 기존 7명의 1,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이 된 것이다. 또 1974년에는 일본 마쓰시타 기술을 도입한 국내 최초 컬러TV를 생산하며 성공 가도를 달린다. 이후 전자 손목시계 ‘알팩스’를 생산하고 1986년에는 태경종합건설을 인수해 건설 사업까지 진출한다.
1980년대 초반 김향수 회장이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을 권유하기까지 한 일은 유명하다. “컴퓨터의 주력 메모리로 사용되는 D랩 산업을 삼성 같은 대기업이 해야한다”며 설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삼성은 본격적으로 반도체 살업에 나선다. 아남산업은 반도체 외에도 정밀기계, 광학사업, 전자 등로 사업을 확장에 박차를 가하며 승승장구한다. 이후 1992년 김향수 회장은 장남 김주진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난다.
김향수 회장의 인재 중심 경영은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 유명하다. 1972년 발생한 대홍수로 인해 성수동에 위치한 아남 공장이 물에 잠기자 직원들은 밤을 새우면서 드라이로 제품을 말려 납기를 채웠다. 모든 상황을 지켜본 김 회장은 1970년 오일쇼크로 인원 감축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단 한 사람의 해고 없이 고용을 유지했다.
아남반도체로 사명 변경
앰코테크놀로지에 넘어가
아남산업을 물려받은 김주진 회장은 조직 개편과 물갈이 인사에 나서며 대기업으로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사명도 아남산업에서 ‘아남반도체’로 개명하며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김주진 회장은 세계적인 반도체 생산 업체로 거듭나기 위해 대대적인 투자에 나선다.
하지만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아남그룹 역시 1997년 외환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비메모리 분야에 뛰어들어 대규모 투자에 나선 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비메모리산업은 동부그룹에 넘어가고 아남반도체는 판매를 담당하던 앰코테크놀로지에 넘어가며 아남산업은 공중분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업이 사라졌음에도 김향수 회장의 가족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 김주진 회장은 현재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의 회장을 맡고 있다. 앰코테크놀로지는 반도체 패키징과 테스트 시장에서 세계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 및 아시아 등에 11개의 생산기지를 두며 월 3억 5000만 개 이상의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김향수 회장은 아남반도체 매각 시 섭섭한 심정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한국이 비메모리산업을 발전시킨다면 누가 하든 상관없다”는 대범한 모습을 보였다. “가문이나 학벌도 없고 사업을 키워나가는 것이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것”이라는 김향수 회장. 인재중시 경영과 반도체 산업을 내다본 혜안은 아직까지도 기업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