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이 번다 오해받는 ‘감정 쓰레기통’이라 불리는 직업
[MONEYGROUND 디지털뉴스팀]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친구라 할지라도 문득 거리를 두고 싶어질 때가 있다. 조언을 해줘도 듣지 않으면서 누군가에 대한 불평, 불만만 계속 늘어놓는다거나, 맥락도 뜬금도 없이 벌컥 화를 내고 눈물을 쏟는 일이 반복되면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도 참기 힘들다.
이렇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감정노동을 요구받는 사람들은 종종 ‘감정 쓰레기통’이 된 기분이라고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곤 하는데, 가족이나 친구는커녕,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정 쓰레기통 취급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직업적 감정 노동자’ 들이다.
감정노동이 가장 심한 직업 성희롱에 스토킹까지
한국고용정보원이 730개 직업 종사자 2만 55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감정노동이 가장 심한 직업은 다름 아닌 ‘텔레마케터’였다. 기업 고객의 각종 불만과 문의를 처리해주는 ‘고객 상담원’ 역시 15위에 올랐다. 두 직업의 공통점은 전화로 고객을 상대한다는 것이다. 한 쪽은 물건을 팔기 위해서 전화를 걸고, 한 쪽은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전화를 받는 입장이지만 얼굴 모르는 고객으로부터 폭언에 시달린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단순히 불쾌한 말투로 통화를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욕설, 막말은 기본이고 성희롱에 스토킹까지 진상 고객의 스펙트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한동안 ‘사랑합니다 고객님’라는 말로 전화를 받았던 114의 경우 성희롱으로 인해 상담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아무거나 다 물어보라는 ‘다산 콜센터’의 이직률은 68.58%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스트레스로 인한 수면장애도 콜센터 노동자가 일반 노동자에 비해 5배 이상 많았다.
2017년에는 욕설이 난무하는 214차례의 항의에 스트레스를 받은 부산 도시가스 콜센터 상담원이 기절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가스 사고로 아이가 질식사할 뻔했다며 150만 원의 보상을 요구한 이 30대 남성은, 알고 보니 미혼에 아이도 없었다. 전화로 그치지 않고 직접 콜센터로 찾아와 신체적 위협까지 가한 이 남성 때문에 일부 직원은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는데, 해당 남성은 이 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전화 업무 노동자들의 고통은 ‘상담원이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없다’는 방침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다. 상대방이 어떤 막말을 해도, 그가 스스로 전화를 끊을 때까지는 묵묵히 듣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런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한 기업들이 콜센터 직원의 ‘먼저 끊을 권리’를 명시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이에 따라 막말 회수가 40~60% 정도 감소했다고 한다.
‘공감 피로’에 노출 공감 능력을 거의 상실하는 지경
‘공감 피로’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직업을 가진 서비스 직종 종사자들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한 사람들’을 돌보며 겪는 증상을 일컫는 표현인데,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끊임없이 공감을 표시해야 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지친 상태를 뜻한다.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역사학자 칼라 조인슨 박사였다. 간호사들의 번 아웃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업계 종사자들 중 많은 수가 끝없는 감정노동에 시달린다. 지속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해야 하고, 몸이 불편해 짜증이 난 환자나 마음이 조급한 보호자들로부터 때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신경 과학자인 저드슨 브루어에 따르면 의사의 공감력이 높을수록 환자가 빠르게 회복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만, 의사 자신은 공감 피로에 대한 회복력이 점점 떨어져 결국은 공감 능력을 거의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환자에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건조하고 사무적인 일부 의사들의 태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
정신보건센터의 노동자들도 스스로를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지칭한다. 정신질환자들과의 상담을 진행할 때 그들의 욕설, 폭언, 폭행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기 때문인데, 방문 상담 시 오물, 대소변, 깨진 술병에 심지어 혈흔까지 마주하는 일도 발생한다고 한다. 종사자 다수가 여성이고, 비정규직 형태로 고용되어 있기 때문에 대처에도 더욱 어려움이 많다.
대화는 거의 업무의 일부 억지스러운 컴플레인
반짝이는 손톱을 책임지는 네일아티스트가 텔레마케터와 호텔 관리자에 이어 감정노동이 심한 직업 3위를 차지했다. 손톱을 손질하고 매니큐어를 바른 뒤 말리거나 굳히는 과정까지 완료하려면 한두 시간은 거뜬히 걸리는데, 이 시간 동안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해 네일 아티스트는 손님과 수다를 떤다.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손님과의 대화는 거의 업무의 일부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거나 억지로 공감을 표시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네일 아티스트보다 더 긴 시간을 한 고객과 보내야 하는 미용사들의 고충도 이와 비슷한데, 특히 완성된 머리 모양에 대해 억지스러운 컴플레인을 늘어놓는 진상 고객들이 가장 어려운 상대라고 한다. 부당한 걸 알지만, 고객이 발길을 끊어 매출이나 실적이 떨어질까 봐 제대로 대응하기도 힘들다.
일각에서는 ‘시술 중 아티스트와의 대화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미용실, 네일숍의 도입을 원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손님들 중에서도 의미없는 수다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서로 간에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자는 것이다. 이건 이것대로 좋은 아이디어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네일·헤어 아티스트가 할 말은 할 수 있는 근무환경 조성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감정적 갑질에 무방비로 노출 고통의 절반은 ‘집어던지기’
상점 판매원 역시 감정적 갑질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직종이다. 카드나 돈을 카운터에 무례하게 던지는 것은 기본, 판매원에게 물건을 던지거나 액체 상품을 일부러 쏟는 일도 적지 않게 발생한다. 어머니 뻘인 계산원에게 막말을 퍼붓거나 신체적 폭행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컷 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한 한 마트 계산원은 ‘우유가 상했으니 너도 먹어 보라’며 다짜고짜 반말로 항의한 고객과의 일화를 시작으로, 각종 속상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마트 직원들이 당하는 고통의 절반은 ‘집어던지기’에서 나오는데, 쌀, 커피, 과일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맛이 없다’며 던지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한다. 해당 마트 직원은 ‘규정에 따른 환불 절차가 다 마련되어 있는데, 다짜고짜 집어던지거나 소리를 지르는 경우에는 당황스럽다’며 그런 손님을 만난 날은 소화도 안되고 우울감이 몰려온다고 밝혔다.
위법을 강요하는 고객들 무조건 고객이 왕이라는 인식
순위에는 들지 않았지만, 은행원 역시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직종이다. 창구 업무를 보는 은행원들은 ‘방금 전까지 웃으며 얘기하더니 왜 내 차례가 되니 무표정이냐’며 생떼를 쓰거나 ‘내가 가족인데 왜 동생 대신 은행 업무를 볼수없냐’며 위법을 강요하는 고객들을 자주 마주친다고 한다.
은행업은 엄연한 금융업인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고객이 왕이라는 인식이 강한 한국에서는 서비스업으로 변질됐다는 것이 은행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일부 고객들은 ‘은행원들은 고액 연봉을 받으니 그 정도 어려움은 감내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은행 관계자들은 ‘돈을 많이 받는다고 더 많이 고생해야 한다는 논리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불과’ 하다며 반박하고 있다.
감정노동으로 고통받는 근로자들의 문제가 계속 대두되자 관련 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지난해 10월부터 시행된 ‘감정노동자 보호법’에 따르면 고객 응대 근로자가 고객의 폭언이나 폭행에 시달릴 경우 사업주는 이들의 업무를 중단시키고 보호해야 한다. 이를 이행하지 않은 사업주는 최대 1,000만 원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하지만 전화 응대 업무를 외부 업체에 맡기는 경우가 적지 않아 제대로 된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누구도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고액 연봉을 받는다거나 서비스직에 종사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막말을 해도 좋습니다’라는 동의는 결코 아니다. 전화기와 계산대 너머 모든 사람들이 적절한 존중을 받는 분위기가 하루빨리 만들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