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RABBIT
사진:김용관 |
서울의 번화한 청담동 뒷골목에 위치한 이 건물은 마치 복잡한 도시 뒷모퉁이에서 봄을 기다리듯 웅크리고 있는 3월의 하얀 토끼와 같은 모습이다. 오늘날 ‘주택가와 인접해 주민들의 생활에 편의를 줄 수 있는 시설물로 분류되는 제도적 유형으로서의 근린생활시설은, 그 목적에 걸맞게 제2,3종 일반주거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생활의 주요 무대이다. 번화한 상점들이 즐비한 가로와 조용한 주택가의 경계면에 위치한 이 시설은 주변의 민감한 환경에 반응해야하면서도 오피스, 소매점, 카페, 주거 등 지속적인 프로그램의 변화를 발생시키고, 가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도록 스스로 낯선 풍경으로 자리 잡는다.
이 조그마한 건축은 근린생활시설이라는 완성된 하나의 고정적인 기능이 아닌, 3월의 하얀 토끼처럼 도심 속에서 일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꾸려가는 다중 캐릭터_Multi-character의 역할이 주어진다.
사진:김용관 |
하얀 볼륨, 의도되지 않은 호기심 유발체
오늘날 도시는 현대인들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한다. 풍요로운 환경과 넘쳐나는 정보, 서비스 문화에 대한 집착은 ‘과잉만족시대’에 이르렀다. 틀에 박힌 패턴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은 모두 과도하게 풍요로운 문화에서 자유와 해방을 꿈꾼다. 앨리스의 모험에는 유명한 여행지를 안내해주는 가이드도 없고, 완벽한 서비스의 레스토랑도 없다. 다만 코를 킁킁거리며 초록의 들판을 누비는 순백의 3월 토끼, March Rabbit가 그녀를 모험으로 이끌 뿐이다. 당연하게 보여 지던 가치들을 없애 버리는 이러한 비이성적인 모험은 새로운 신선한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벽돌, 대리석, 목재 등 다양한 재료와 색으로 뒤덮인 과도하게 치장되어지는 외관을 제거하고 낯선 풍경을 만들었다. 청담동에 자리 잡은 이 하얀 건물은 재료의 시각적 물성이 소거된 촉각적 순백의 모습으로 낯선 풍경을 제공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주택지 안쪽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행인들을 유인한다.
사진:김용관 |
깊이(심층)에 대한 분열증의 공간과 변화 가능한 탄력성을 가진 구조
마치 래빗에 의해 인도되는 이상한 나라에는 깊이, 높이, 표면이라는 세 차원의 공간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시도됨을 보인다. 좁은 토끼굴 속에 빠져 끝없이 추락하는 것에서 신기한 세상을 경험하는 앨리스. 그녀가 끝없이 빠진 토끼굴 너머의 세계에 보여 지는 ‘심층’적 요소, 높은 버섯 위에서 커지거나 작아지게 만드는 ‘높이’의 차원 그리고 황금 열쇠로 커튼 뒤의 자그마한 문을 열고 나가니 눈부시게 찬란한 화원과 분수로 가득 찬 아름다운 정원이 느닷없이 나타나는 내용은 평평한 ‘표면’에 대한 이야기. 이러한 서로 다른 차원에서의 공간의 분열증적 계열은 의미와 무의미의 놀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얽힘 속에서 두 방향을 동시에 긍정하는 다양한 의미의 역설_paradoxe, contre-sens이 숨어있다. 물론 양 방향으로 결코 멈추지 않는 생성_devenir fou은 현재가 없고, 오로지 과거와 미래 두 방향의 동시성만이 있을 뿐이다.
근린생활시설은 프로그램 요구에 따라 유연하게 반응하는 평면 구성을 필요로 한다. 일정 임대 기간이 지나면 새로운 사용자에 의해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엘리베이터와 계단, 화장실 등 공용부를 최소화하여 필요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하고, 임대 면적을 최대화 하여 충분한 프로그램 운용이 가능하도록 한다. 코어를 중심으로 보면 한 층씩 잘 만들어진 임대공간을 수직적으로 쌓아올린 것처럼 보이나 건물의 볼륨 전체를 바라보면 조각난 공간들이 조합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관점의 전환을 통해 물리적 공간의 경계를 무력화시키고 유동적인 프로그램 운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단순히 외관적으로만 조합되어진 것이 아니라 두 개 이상의 층을 함께 임대하여 쓰려고 할 때 건물 후면에 마련된 여유 공간을 코어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계획해두었다. 층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건물의 탄력성은 잠재적 변화 가능성의 여지가 되어준다.
사진:김용관 |
일탈풍경
마케팅 전략 중에 한 방법인 일탈브랜드_Breakaway Brand란 예측 가능한 제품을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카테고리로 제품을 정의하여 출시하여 익숙한 제품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방법이다. 스와치가 ‘시계’라는 제품을 같은 상품군을 다루는 시계 코너가 아닌 패션이라는 다른 카테고리에서 더 거론이 되도록 만든 것이 일탈브랜드의 방법이다. 제품의 계열_category 일탈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요즘 사람들은 같은 상품이라도 새로운 가치를 가지게 만들어준다. 3월의 토끼는 앨리스를 일상에서 이상한 나라를 꿈꿀 수 있게 해주었다.
건축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프로그램만을 담는 고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연한 이벤트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장치가 되었을 때, 건축은 물질적으로 일상을 담는 그릇이 아닌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증식시키는 장치로서의 새로운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보여지는 것만 중요시하고 바라보는 것은 중요시 하지 않았던 근린생활시설 건물에서 층마다 다른 뷰를 가진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창을 통해 건너편 아파트의 조경을 내 정원으로 만들기도 하고, 빽빽한 건물 틈 사이로 하늘을 찾아주어 거주자로 하여금 일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보지 못했던 각자의 일탈 풍경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설계 : 김동진(홍익대학교), ㈜ 로디자인
자료제공 : ㈜로디자인
사진 : 김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