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지식과 배움에 대한 찬가, '히스토리 보이즈'
1980년대 영국 북부 셰필드의 한 공립 고등학교. 장난기 많지만 똑똑하고 성적이 뛰어난 8명의 학생들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입시를 준비하며 학업에 몰두하고 있다. 시험이 아닌 인생을 위한 지식을 목표로 하는 문학교사 헥터와 함께 자유롭게 교양을 쌓아가던 그들 앞에 어느날 오로지 입시와 논술, 면접 실력 향상을 위해 고용된 임시 교사 어윈이 등장한다. 날카로운 논리와 전복적인 역사관으로 무장한 어윈의 수업에서 아이들은 지금까지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지식관을 접하고, 헥터와 어윈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기 시작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스토리텔링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스쿨 타이> 등 입시와 학교를 대상으로 하는 청춘 드라마에서 수없이 많이 보아온 스토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지옥 같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이들에게 시험이 아닌 인생을 가르치고자 하는 낭만적인 선생님, 그리고 이를 용납하지 않는 현실의 냉정함과 학교의 정책 등. 하지만 영국 작가 앨런 베넷이 쓰고 김태형이 연출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틀을 살짝 벗어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이 작품을 현대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
문학교사 헥터와 역사교사 어윈은 극중 많은 대립적 요소들을 은유하면서 선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공부와 교양, 입시와 인생, 진실과 기술, 예술과 현실 등.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이 둘 중 어느 한 쪽도 편을 들지 않고 판단을 내리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극중 헥터는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낭만,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괴팍한 성격에 아이들을 오토바이에 태우며 성추행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 어윈은 오로지 입시 성적을 올리기 위해 모든 지식을 시험에 이용하라고 가르치는 기회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두 사람과 이들의 수업을 통해 작가는 예술과 현실, 진정한 교양과 현실적인 지식에 대해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지만, 어느 쪽이 옳고 어떤 쪽이 나쁘다는 식의 가치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두 입장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 각각의 입장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줄 따름이다. 예를 들어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헥터는 이제 곧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노교사로 등장하고, 새롭고 진보적인 시각을 지닌 현실주의자 어윈은 대학을 갓 졸업한 젊고 패기 넘치는 청년의 모습으로 나온다. 이는 곧 인생에 대해 성숙하고 원숙한 시선을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힘이 없고 무력한 예술과 교양, 실제적인 힘과 가능성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멀리 보지 못하는 현실주의를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히스토리 보이즈>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이 두 입장 중 어느 한쪽의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 이 모든 입장의 차이를 떠나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경험인가 하는 점이다. 극중 “인간에게 쓸모가 있든 없든 모든 지식은 소중하다”고 인용하는 헥터의 대사야말로 이 작품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현실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든, 교양을 위한 것이든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깊은 눈을 갖게 하는 귀중한 과정이며, 이러한 교육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삶을 영속적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히스토리 보이즈>는 보여주고자 한다. 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받고, 느끼고, 넘겨라”라는 헥터의 대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다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지식과 교육의 본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다가온다. 초연 이후 평단과 관객의 좋은 평가를 받으며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이번 공연에서는 새로운 배우와 앙상블로 관객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공연기간 | 4월 8일부터 5월 8일까지 백암아트홀
사진제공 노네임씨어터
글 매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