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 맞서고, 미국의 적이 된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 (배우·영화감독, 1889~1977)
'감독' 채플린의 시작
1921년 1월 21일, 찰리 채플린은 전전긍긍했다. 자신이 만든 첫 장편영화 '키드'가 개봉하는 날이었다. 채플린은 '키드'의 감독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작자, 각본가, 연기자, 편집자였다.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모든 촬영을 마친 후 영화사와 갈등을 빚어 원본 필름을 뺏길 위기에 놓였다. 채플린은 필름 롤을 숨겨 호텔 방으로 가져갔다. 그 안에서 120㎞ 길이에 달하는 필름을 편집했다. 채플린은 힘겹게 세상에 내놓은 영화가 행여 혹평이라도 받을까 긴장했다.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조차 찾지 못할 정도였다.
영화는 갓난아기를 품은 여자가 정신병원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큰 저택 앞에 아기를 버리고 떠난다. 부잣집이 아이를 거둬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기는 부잣집 대신 부랑자(채플린)에게 발견된다. 부랑자는 아기를 보육원에 맡기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한다. 어쩌다 보니 아이에게 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같이 산다. 둘은 5년간 함께했다. 궁핍한 삶이었지만, 채플린과 아이는 끈끈한 부자(父子)로 발전한다. 어느 날, 경찰이 이들의 관계를 알아챈다. 경찰은 부랑자가 아이를 납치한 것으로 오해한다. 채플린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보육원에 보내려 한다.
'키드'를 본 관객은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채플린의 슬랩스틱에서 박장대소했다.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분투하는 부자에게서는 연민을 느꼈다. 채플린의 '키드'는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할리우드 스타 배우였던 채플린은 '키드' 덕분에 감독으로서 자질도 인정받았다. 채플린표 영화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영국 빈민가 출신 배우, 할리우드 입성
채플린의 장편 감독 데뷔작인 '키드'(1921) |
위대한 영화를 수두룩이 남긴 채플린은 유독 '키드'에 애정을 보였다. 그의 유년이 고스란히 반영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채플린의 어린 시절은 영화 속 아이와 닮았다. 채플린은 런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채플린이 태어난 직후 이혼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는 곧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수용됐다. 채플린은 빈민구호소와 보육원을 들락거렸다. 고아나 다를 바 없었다. 유년에 겪은 배고픔과 추위를 평생 잊지 못했다. 훗날 그의 영화에 '허기짐'과 '추위'는 주요 테마로 등장한다.
채플린은 먹고살기 위해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길거리에서 신문을 팔았다. 병원, 공장 등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 와중에 재능을 발견했다. 연극배우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채플린은 아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관중들은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소년의 연기에 깜짝 놀랐다. 채플린이 연극 '셜록 홈스'에 출연해 3개국 순회공연을 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열 살 남짓이었다. 당시 명성을 떨쳤던 '프레드 카노' 극단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는다. 채플린은 건달, 주정뱅이 등 하류 인생 역을 맡아 실감 나는 연기를 펼쳤다. 일생일대 기회가 왔다. 채플린은 미국 순회공연 중 '코미디의 왕' 맥 세넷을 만났다.
맥 세넷은 배우이자 '키스톤'이라는 제작사를 운영하는 할리우드 큰손이었다. 주로 코미디 영화를 제작한 '키스톤'은 슬랩스틱 장르 전성기를 개척했다.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해럴드 로이드 등 무성영화 시대 전설 대부분은 맥 세넷 손을 거쳐 탄생했다. 채플린은 '키스톤' 전속계약 제안을 받았다. 빈민가 출신 영국인 채플린은 그렇게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세기의 방랑자
근대화의 그늘을 다룬 '모던타임즈'(1936) |
영화판에 들어온 채플린은 낡고 헐렁한 옷을 입은 채 지팡이를 짚은 부랑자 캐릭터를 창조해 분신으로 삼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각인된 채플린의 모습이다. 영화에서 채플린은 부랑자답게 궁핍하고, 무시당하고, 소외당한다. 하지만 쭈그러들지 않고 얼렁뚱땅 위기를 넘기며 관객을 흐뭇하게 했다. 우아한 슬랩스틱 코미디를 펼친 채플린은 금세 무성영화 스타가 됐다. 미국 진출 4년 만인 1917년, 영화 8편을 찍는 대가로 100만달러를 받았다. 100년 전 물가를 고려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키드' 덕분에 스타 배우에서 감독으로 도약한 채플린은 1925년 '황금광시대'로 또 한 번 히트를 쳤다. 영화 소재 자체는 끔찍하다. 19세기에 금광을 찾아 미국 서부를 찾았던 탐험가들이 폭설에 갇혔는데, 생존을 위해 죽은 동료를 먹었다는 일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채플린은 잔인한 소재로도 절묘한 희극을 탄생시켰다. '황금광시대'는 굶주림 때문에 가죽 신발을 삶아 스테이크처럼 썰어 먹고, 구두끈을 스파게티처럼 돌돌 말아먹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비극 속에서도 희극을 찾았던 채플린의 정수가 담겼다.
오랫동안 한국은 채플린이란 인물에 관해 절반만 알고 있었다. 그를 재미있는 슬랩스틱 배우 정도로만 여겼다. 채플린이 초기에 찍었던 단편 코미디만이 명절 특선으로 텔레비전에 소개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채플린이 위대한 영화인으로 존경받는 이유는 그가 슬랩스틱 황금기를 이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채플린은 휴머니스트였고,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한 야심가였다. 근대화 속 인간 소외를 다룬 '모던타임즈'(1936), 전체주의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1940)가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건 1988올림픽 이후다. 그전까지 채플린의 후기작은 상영 금지 대상이었다. 강력한 정치의 힘으로 근대화를 밀어붙이던 군부정권에 독재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하는 채플린의 영화는 불온한 콘텐츠였다.
히틀러를 저격하다
히틀러를 풍자하고 평화 메시지를 담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1940) |
1927년 채플린은 비보를 들었다. '재즈싱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이었다. 영화사에서 '재즈싱어'는 대혁명이었다. 전 세계 첫 유성영화였기 때문이다. 배우가 입을 열고 대사를 뱉자 관중은 깜짝 놀랐다. 몸과 표정으로만 연기했던 채플린은 위기에 처했다. 변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은 나빠졌다. 경쟁자였던 버스터 키튼이 유성영화 등장과 함께 맥없이 쇠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1929년엔 경제 대공황까지 덮쳤다.
채플린의 선택은 정면돌파였다. 세상이 유성영화 등장에 들떠 있을 때 그는 꿋꿋하게 무성영화를 만들었다. 1931년에 개봉한 '시티라이트'는 따뜻한 온기로 가득하다. 이 영화에서도 채플린은 방랑자다. 그는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에게 한눈에 반한다. 소녀는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다. 채플린은 소녀를 위해 수술비를 마련한다. 덕분에 소녀는 수술을 받고 눈을 뜬다. 돈을 구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린 채플린은 감옥에 간다. 출소 후 채플린은 소녀 주변을 맴돈다. 한 번도 두 눈으로 채플린을 본 적 없었던 소녀는 은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채플린의 손을 잡고 촉감만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도와준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둘은 사랑에 골인한다. 해피엔딩이다. 가난한 시대 속 빈곤한 사람들의 사랑을 다룬 '시티라이트'는 대공황으로 실의에 빠진 미국인을 위로했다. 유성영화 공습 속에서도 채플린의 명성은 높아졌다.
채플린은 '시티라이트' 이후 '모던타임즈'라는 걸작 무성영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어떤 혁명도 일단 실행되고 나면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영화계는 유성영화로 기울었다. 채플린도 대세에 동참했다. 그의 첫 번째 유성영화는 1940년에 개봉한 '위대한 독재자'다. 채플린은 콧수염을 기른 독재자와 선량한 유대인 이발사 1인 2역을 맡았다. 비슷한 외모 때문에 이발사가 독재자로 오인되는 상황을 그린 영화다. 독재자는 누가 봐도 히틀러였다. 이발사는 히틀러에게 핍박받는 유대인을 상징했다. 채플린과 히틀러는 공통점이 여럿 있다. 같은 해 태어났고, 생일도 4일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외모도 비슷했고, 비참한 유년 시절은 보낸 점도 유사했다. 둘 모두 쇼펜하우어 철학에 심취했고, 예술가가 되기를 꿈꿨다. 시간이 흘러 같은 시기에 채플린은 천재 영화감독으로 존경받았고, 히틀러는 강력한 독재자로 악명을 떨쳤다.
영화 속에서 채플린은 대중 앞에서 과장된 모습으로 웅변하는 히틀러를 희화화했다. 악인을 조롱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영화 마지막 채플린의 연설은 감동적이다. 처음으로 육성을 담은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이렇게 말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언젠간 증오는 지나가고 독재자들도 사라질 것이며, 그들이 인류로부터 빼앗아간 힘조차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인류가 목숨을 바쳐 싸우는 한 자유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한 해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고, 폴란드에 아우슈비츠를 만들어 유대인과 집시를 대량학살하기 시작한 때였다.
히틀러가 자신을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를 실제로 관람했는지는 역사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히틀러는 채플린의 존재를 의식했다. 채플린은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위대한 독재자'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이 작품이 개봉한 이후 히틀러의 대중 연설은 눈에 띄게 줄었다.
할리우드에서 쫓겨난 방랑자
왕년에 잘나갔던 코미디언을 다룬 자전적 영화 '라임라이트'(1952), 채플린 뒤에 있는 인물은 채플린과 함께 무성영화를 주름 잡았던 스타 버스턴 키튼. |
할리우드는 채플린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영광도 안겨줬다. 그리고 단 한순간에 채플린을 내쳤다. 1950년대였다. 히틀러가 패배하며 2차 대전이 끝났다. 냉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 내 반공 기류가 거세졌다. 곧 문화계에는 '매카시즘' 광풍이 닥쳤다. "당신은 공산주의자인가?"라는 질문이 영화인들을 옥좼다. 잘나가던 감독, 작가, 배우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리며 영화계에서 쫓겨났다. 웃기는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 안에 무거운 질문을 담았던 채플린은 '매카시즘'의 표적이 된다. 나치를 비판하던 인물이 미국의 적이 된 것이다. '빨갱이 척결' 완장을 찬 사람들은 채플린이라는 거물을 쓰러뜨려 자신들의 위세를 높이려 했다. 채플린은 1952년 영화 '라임라이트'를 홍보하기 위해 영국에 갔다. 그 틈에 미국 정부는 채플린의 재입국을 허가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상 추방한 것이다. 유성영화라는 대위기에도 살아남은 채플린은 정치 공작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채플린의 방랑은 오래 이어졌다. 그가 다시 미국 땅을 밟은 건 20년 후다. 1972년 아카데미는 채플린에게 명예상을 안기며 과거의 영웅을 뒤늦게 예우했다. 여든 살을 훌쩍 넘긴 희극 배우는 기립박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채플린이 남긴 너무나 유명한 말이다. 채플린의 삶을 요약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는 밑바닥에서 태어나 비극 속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삶은 길다는 것을 알았다. 비극은 영원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늪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희극을 개척했다. 성공한 후에는 성공에 취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기꺼이 부랑자가 되어 그들을 위로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채플린은 미국에서 명예상을 받고 5년 후인 1977년 스위스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그날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세상을 들었다 놨던 희극배우답게 전 세계가 설렘에 들떠 웃고 떠드는 날 긴 방랑을 마쳤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