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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과 하양이 만든 자유, 크레타에서 그 정점을 보다

고아라의 This is Europe

매일경제

크레타 서부 화이트 마운틴에는 유럽에서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최장 협곡 중 하나로 꼽히는 `사마리아 협곡`이 있다.

에게해의 찬란한 파도 위로 리비아해를 타고 온 따스한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망망대해 저 멀리 기다란 섬 하나가 신기루처럼 아른거린다. 고대 미노아 문명의 신화가 남겨진 섬,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순수한 사람들이 반기는 섬, 자유의 바람이 나부끼는 섬, 크레타(Crete)에 도착했다.


크레타는 유럽 문명의 근간으로 여겨지는 '미노아 문명(크레타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섬의 주도 이라클리오(Iraklio 혹은 헤라클리온 Heraklion)에서 약 5㎞ 떨어진 곳에 있는 크노소스 궁전(Knossos Palace)은 미노아 문명의 가장 큰 증거다. 크레타 문명은 미노스 왕이 크레타섬을 지배하던 기원전 2000년경 바로 이 궁전을 중심으로 가장 크게 번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미노아 문명은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전설 혹은 신화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1900년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반이 이 거대한 궁전터를 발굴하면서 실제 존재했던 문명이었음이 증명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도시를 이룰 만큼 거대한 궁전 곳곳에서는 크레타 전통 양식의 건축물, 피토스(Pithos) 항아리, 프레스코화, 원형극장, 선형문자 같은 청동기 시대 문명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수준 높은 유물들이 대거 발견됐다. 무엇보다 크노소스 궁전은 아주 복잡하고 정교한 설계로도 유명한데,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 해서 '라비린스(Labyrinth)', 즉 '미궁'이란 별칭이 붙었다.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영웅 테세우스가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의 배경도 바로 이 크노소스의 미궁이다.


크레타 서부는 아름다운 청정자연과 도시의 매력을 골고루 즐길 수 있는 지역이다. 서부 크레타를 대표하는 하니아(Chania)는 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 찬란했던 미노아 문명이 몰락한 이후 크레타는 그야말로 수난과 고난의 역사를 견뎌야 했다. 로마 제국을 시작으로 비잔틴 제국, 베네치아 공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이르는 주변 열강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는 크레타 곳곳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하니아 구시가지는 고대부터 중세, 근대까지 섬이 지나온 역사와 크레타 고유의 문화가 합쳐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세의 정취가 짙게 밴 베네치아 항구를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온 느낌마저 들 정도다.


섬의 서쪽 끝자락으로 향하면 크레타 최고의 비경을 품은 '발로스 라군(Balos Lagoon)'이 나온다. 발로스 라군은 키사모스 만과 케이프 티가니(Cape Tigani)라는 작은 섬 사이에 형성된 석호다. 마치 푸른 물감에 우유를 풀어놓은 듯한 옥빛 해변이 천국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 페리를 이용해 발로스에 진입하면 해적의 섬으로 알려진 그람부사(Gramvousa)와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이 섬은 오스만 제국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벌였던 크레타인들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섬 꼭대기에는 베네치아인들이 세운 성채가 남아 있는데, 이곳 정상에 오르면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보석 같은 절경이 펼쳐진다.


그리스 해변은 아름답다. 크레타 해변은 더더욱 아름답다. 에게해와 리비아해에 걸쳐 펼쳐진 수많은 해변 중 두 곳을 꼽아봤다. 바로 서부의 엘라포시니(Elafonisi)와 남서부 레팀노 현의 프리벨리(Preveli)다. 엘라포니시는 핑크 비치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산호가 섞인 모래가 가득해서 해변이 분홍빛으로 보이기 때문. 프리벨리는 크레타 남부 쿠르탈리오티코 협곡 끝자락에 자리한다. 협곡을 관통하며 내려오는 거대한 강(Great River)이 바다와 만나며 약 500m 길이의 신비로운 석호를 형성한다. 강줄기 주변에는 야자나무가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있어 그야말로 숲과 바다가 그리고 호수가 만나는 장관을 연출한다.


크레타 중동부에 신들의 신 제우스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이다 산(Mount Ida)이 있다면, 서부에는 화이트 마운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레프카 오리(Lefka Ori)가 있다. 따뜻한 기후를 지닌 크레타에서 만년설을 볼 수 있는 신비로운 산이다. 화이트 마운틴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유럽에서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최장 협곡 중 하나로 꼽히는 '사마리아 협곡(Samaria Gorge)'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치솟은 거벽 사이를 걸으며 크레타의 척추를 관통한다. 거칠고 투박한 자연의 문을 지나 협곡의 끝을 마주한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눈앞에 더 이상 푸를 수 없을 만큼 푸른 바다와 하늘이 하나가 되어 나타난다. 만일 자유가 섬이 될 수 있다면, 그곳은 바로 크레타가 아닐까.


글·사진 = 고아라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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