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르셋` 원조는 샤넬...여성의 자유를 디자인하다
죽은 예술가의 사회-52
코코 샤넬 (디자이너, 1883~1971)
400년간 입었던 코르셋
"코르셋을 벗자" 탈코르셋 운동은 페미니즘의 핵심 개념이다. 화장, 긴 머리, 마른 체형 등 사회는 여성에게 많은 기준을 부여해왔다. 상냥함, 조신함, 부드러움도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된다. 물론 화장하고, 머리를 기르고, 몸매를 가꾸는 건 여성의 자유다. 하지만 사회가 이런 요소만을 그러모아 '여성스러움'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누구도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면 '여성스러움' 범주 바깥에 있는 여자들은 비정상 궤도로 내몰린다. 그리고 누군가는 제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으려 코르셋을 착용한다.
코르셋은 허리를 조이면서 가슴과 엉덩이를 부각하는 기능성 의복이다. 코르셋 역사는 고대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착용한 시기는 16세기부터다. 그 이후 400년 동안 유럽 여성들은 코르셋을 입었다. 허리를 13인치에 맞추려 코르셋을 조이고 조였다. 코르셋이 흉부를 강하게 압박해 뼈 모양이 틀어졌고, 장기 기능도 손상됐다. 귀족 저택에는 코르셋 때문에 졸도한 여성들이 쉬는 '기절방'이 따로 있었다. 코르셋이라는 폭력적인 아이템은 20세기 들어 사라졌다. 코르셋 퇴출에 앞장선 인물은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다.
1910년 프랑스 파리 캉봉 거리에 열린 샤넬 1호 매장. 샤넬은 여성용 모자 전문점으로 첫발을 뗐다. |
샤넬, 명품 중에서도 명품
네이버 국어사전에 샤넬을 검색하면 10개의 결과물이 나온다. 사전은 '샤넬룩'을 이렇게 정의한다. 프랑스 여성 디자이너 샤넬이 발표한 카디건 슈트의 의상. 또는 그것을 본뜬 복장. '샤넬라인'이라는 단어도 나오는데 정의는 이렇다. 무릎 바로 아래 정도까지 오는 치마의 길이. 이 밖에도 '샤넬'이라는 단어를 접두어로 한 패션 용어들이 나열돼 있다. 반면, 루이비통과 구찌를 검색하면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는다. 샤넬, 루이비통, 구찌 모두 명품이지만 샤넬은 그 자체로 고유명사가 된 명품 중의 명품이다.
명품의 사전적 정의는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그런 작품'이다. 사전엔 적혀 있지 않지만, 명품은 누구나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명품이기도 하다. 샤넬 백 가격은 최소 600만원대부터 시작한다. 샤넬을 창조한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명품은 꿈도 꿀 수 없는 시궁창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다. 성인이 된 직후 얻은 직업도 싸구려 술집 무대 위 무명 가수였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 그는 어떻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빛나는 브랜드를 만들었을까.
코코 샤넬 본명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이다. 빈민가 출신인 그는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보부상이었던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먼 길을 떠났다. 가난과 병에 시달렸던 어머니는 샤넬이 12세일 때 세상을 떠났다. 샤넬은 언니, 동생과 함께 시골 수녀원에 딸린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샤넬은 보잘것없는 환경에서 태어나 보육원까지 들어오게 됐지만 체념하지 않았다. 반항적이고, 고집 세고, 자존심도 강했다. 당연히 엄격한 수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관례로 보육원생들은 수녀들을 어머니라고 불러야 했지만 샤넬은 거부했다. 수녀원 생활이 샤넬에게 나쁜 경험만 남긴 건 아니었다. 샤넬 패션의 특징은 검은색 컬러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샤넬이 유년 시절을 보낸 수녀원 분위기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샤넬은 보육원에서 재봉 기술도 배웠다.
18세에 보육원을 나온 샤넬은 의상실에 취업해 재봉 일을 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는 가수라는 꿈을 품었다. 낮에는 의상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술집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손님들은 샤넬을 코코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코코 샤넬이란 이름은 이때 탄생했다. 술집 손님 중 에티엔느 발상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샤넬에게 푹 빠졌다. 재력가였던 발상은 샤넬의 후원자가 됐다. 발상 덕분에 샤넬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였다. 상류층 사교계에 입문한 샤넬은 여성 옷에 관심을 가졌다. 취미 삼아 여성용 모자를 디자인했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샤넬과 그의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아서 카펠. |
샤넬의 남자들
샤넬의 인생은 '사랑 그리고 일'로 요약 가능하다. 그의 삶엔 많은 연인이 있었다. 그들은 기꺼이 샤넬을 지지하고 도왔다. 발상과 헤어진 후 샤넬은 영국인 사업가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졌다. 발상이 샤넬을 상류층 세계와 패션 영역으로 안내했다면, 카펠은 연인에게 비즈니스를 알려줬다. 카펠은 샤넬에게 사업 자금을 빌려줬고, 경영 노하우를 전수했다. 1910년 샤넬은 파리에 모자 가게를 오픈했다. 가게 이름은 '샤넬 모드'였다. 정·재계부터 예술계까지 인맥이 두터웠던 카펠은 네트워크를 이용해 샤넬의 성공을 도왔다. '샤넬 모드'는 빠르게 성장했다. 샤넬과 카펠은 파리 근교 해안 도시 도빌로 휴가를 떠났다. 도빌은 휴가철마다 상류층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샤넬은 그곳에 '샤넬 모드' 2호점을 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카펠은 전장으로 갔고, 남겨진 샤넬은 전전긍긍했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샤넬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프랑스 귀족들이 파리를 떠나 도빌로 몰려들었다. 전쟁은 전쟁이고 삶은 삶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샤넬 가게에서 고급 의상을 주문했다. '샤넬 모드'는 호황을 맞았다. 모자 전문점에서 여성복 전문 부티크로 도약했다. 프랑스 남부 휴양지 비아리츠에 세 번째 매장까지 열었다. 여전히 유럽은 전쟁 중이었지만 비아리츠는 평화로웠다. 그곳에서도 샤넬은 승승장구했다. 고객의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전쟁은 끝났고 카펠도 돌아왔다. 그사이에 샤넬은 직원 수백 명을 둔 패션 업계 거물이 됐다. 카펠은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한 가지가 부족했다. 그 당시 유럽에선 신분이 중요했다. 카펠도 좋은 집안 출신으로 짐작되지만, 스스로 정확한 출신을 밝히기를 꺼렸다. 사교계에서는 카펠이 귀족 가문 서자일 것으로 추측했다. 카펠은 신분 상승을 위해 정통 귀족 여성과 결혼했다. 샤넬은 카펠을 사랑했다. 그래서 연인의 야망마저 이해했다. 카펠이 다른 여자와 결혼한 후에도 샤넬은 애틋한 마음을 유지했다. 그러나 카펠은 결혼 1년 만에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죽었다. 카펠 이후로도 샤넬의 삶에는 많은 남자가 등장한다. 피카소, 장 콕토, 디아길레프, 스트라빈스키. 모두 위대한 예술가들이다. 샤넬은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었고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샤넬이 카펠만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샤넬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샤넬. / 위키미디어커먼스 |
여성 옷 표준을 바꾸다
"럭셔리는 편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럭셔리가 아니다" 샤넬 이전까지 유럽 여성 옷은 중세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류층은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불편한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모자를 썼다. 여전히 코르셋을 착용하기도 했다. 하류층 여성 의복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산업화 물결이 거세지며 여성도 공업 현장에 투입됐는데, 발목을 모두 덮는 거추장스러운 긴 치마를 질질 끌며 일해야 했다. 샤넬은 여성을 옭아매는 의복 관습을 하나둘 풀어헤쳤다. 재킷에 주머니를 달았고, 여성용 바지를 만들었다. 실용성과 편안함을 내세운 옷이었다. 오늘날 눈으로 보면 여성 옷에 달린 주머니와 여성용 바지가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당시엔 달랐다. 세상은 "여성이 바지를 입는다니!"라며 놀라워했다.
샤넬은 여성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도록 땅에 끌렸던 드레스 치맛단을 무릎 정도로 과감히 쳐냈다. 여성들은 항상 한 손에 핸드백을 들고 다녀야 했는데, 샤넬은 최초로 핸드백에 체인 끈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성의 두 손이 자유를 얻은 순간이었다. 샤넬이 만든 옷을 입은 여성들은 남성처럼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쪽 손으로는 담배를 태웠다. 당연히 코르셋도 거부했다. 허리, 가슴, 엉덩이 실루엣을 강조하지 않는 실용적인 블랙 드레스를 디자인했다. 남성과 죽음의 색으로 여겨졌던 검은색을 여성 옷에 적용한 것만으로도 과감한 시도였다. 패션잡지 보그는 이 드레스를 포드 자동차에 비유하며 표준이 될 것으로 예언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훗날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은 지방시 드레스가 큰 히트를 쳤다. 헵번이 입은 지방시 옷은 샤넬의 드레스 스타일을 계승해 만든 제품이었다. 샤넬이 창조한 이 드레스는 포드 자동차처럼 하나의 규격이 됐다. 오늘날엔 스파 브랜드에서도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살 수 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은 리틀 블랙 드레스는 지방시의 작품이지만, 이 스타일의 옷을 처음 디자인한 건 샤넬이다. / 다음영화 |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
1차 대전과 달리 2차 대전은 샤넬에게 큰 위기였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한 동안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위험한 사랑에 빠졌다. 어떤 계기로 샤넬이 적국의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다. 샤넬은 조국의 배신자로 몰렸고 스위스로 망명했다. 공식 활동을 멈추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공백은 15년 동안 이어졌다.
"허무에 빠져 있기보다는 차라리 실패하는 편이 더 낫다." 1954년 샤넬은 일흔한 살 나이로 복귀했다. 프랑스인들의 샤넬을 향한 증오는 여전했다. 전설적인 디자이너가 돌아왔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샤넬에게 제2의 전성기를 안긴 국가는 미국이었다. 미국 고급 의류 상점들에서 샤넬의 옷을 대량으로 주문했다.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도 샤넬의 옷을 입었다. 당시 미국은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해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중이었다. 그런 미국의 정신과 샤넬의 미니멀리즘 스타일은 잘 맞아떨어졌다. 그 뒤로 샤넬이라는 브랜드의 스토리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샤넬은 1971년 호텔 룸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활화산 같은 에너지를 내뿜으며 일했다. 그가 떠나고도 샤넬 브랜드 위상은 높아졌고, 오늘날엔 연 매출 10조원이 넘는 글로벌 기업이 됐다.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 샤넬이 남긴 이 말은 현실이 됐다. 오늘날 여성 패션은 어떤 식으로든 샤넬이 창조한 스타일에 빚을 지고 있다. 샤넬은 여성들을 움츠리게 한 크고 작은 코르셋을 부쉈다. 샤넬 역시 자신을 가로막은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빈곤 속에서 태어났지만 성공을 쟁취했고, 성공한 후엔 조국에서 내쳐졌지만 허무에 빠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확고한 설계도가 있었고, 설계도를 따라 삶을 개척했다. 명품과 명품이 아닌 것의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벌어진다. 명품은 세월이 흘러도 명품이다. 샤넬이 디자인한 건 결국 여성의 꿈이다. 그래서 샤넬의 스타일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세상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명품은 그런 것이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