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컬처]by 매일경제

장애·조롱·멸시에도…가우디는 묵묵히 벽돌 하나를 더 쌓았다

안토니 가우디 (건축가, 1852~1926)

초라한 죽음

매일경제

1926년 6월 7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한 노인이 전차에 치였다. 운전자는 전차에서 내려 사고당한 노인을 짐짝 다루듯 길가로 치웠다. 그리고 다시 전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고 출발했다. 행인들이 노인을 부축했다. 그들은 노인을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 했다. 노숙자로 보일 만큼 행색이 남루하고 피까지 흘리는 노인을 태우려는 택시 기사는 없었다. 결국 경찰이 나서 강제로 택시를 세웠다. 어렵게 병원에 왔지만, 노인은 방치됐다. 병원은 노인을 부랑자들이 모여 있는 공동병실로 보내고 거들떠보지 않았다.


같은 시간 노인의 지인들은 실종신고를 하고 노인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병원에 거지 몰골을 한 노인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찾던 노인이 피로 뒤범벅된 채로 누워 있었다.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노인은 개인 병실로 옮겨졌다. 다음날 의식은 되찾았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노인은 사고 3일 만에 눈을 감았다. 비참한 죽음이었다. 전차 운전자도 택시 기사도 의사도 노숙자인 줄 알고 방치했던 이 노인은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였다. 매스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서 가우디 얼굴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스페인 전체가 뒤집어졌다. 초라하게 떠난 가우디의 장례식은 성대했다. 시민들은 검은색 옷을 갖춰 입고 거리로 나왔다. 바르셀로나 도시 전체가 천재 건축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매일경제

가우디 대표 건축물 `카사 밀라` / 사진=flicker(CC BY-SA 2.0)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다. 휴가철 바르셀로나에는 도시 인구 몇 배에 달하는 관광객이 몰린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이 가우디 건축물을 그냥 지나칠 확률은 낮다. 오직 가우디를 만나려 바르셀로나행 티켓을 끊는 관광객도 많다. 가우디가 조성한 구엘 공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라 있다. 유네스코는 구엘 공원을 두고 "인간의 창조적 천재성이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상찬했다. 공원에 들어선 사람들은 한순간 다른 차원 세계로 건너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넓은 공원 전체가 가우디가 창조한 신비로운 운율로 가득하다. 가우디가 지은 공동주택 카사 밀라도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건축이다. 단번에 시선을 붙들어 잡는 개성 강한 작품이다.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뒤덮인 카사 밀라는 마치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렁이는 듯한 기운을 내뿜는다.


가우디는 종종 르코르뷔지에와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위대한 건축가로 추앙받는다. 그리스신으로 비유하면 르코르뷔지에는 아폴로다. 그는 이성, 논리, 합리성을 중시했다. 르코르뷔지에는 앞장서서 20세기 기술을 받아들였다. 철근 콘크리트를 활용해 군더더기 없는 실용적인 건물을 세웠다. 현대 건축이 나아가야 할 원칙을 세우며 이론가로도 활동했다. 아파트라는 개념을 가장 먼저 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상 오늘날 건축은 어떤 식으로든 르코르뷔지에 영향 아래 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여전히 건축가들의 교과서다.


르코르뷔지에가 이성의 신 아폴로라면 가우디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다. 그는 신비, 토속성, 자연, 명상의 세계를 중시했다. 르코르뷔지에가 합리적인 직선의 세계를 창조했다면, 가우디는 영적인 곡선의 세상에 매달렸다. 누군가의 꿈속 세계를 옮겨놓은 듯한 그의 작품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현대 건축가들은 가우디보다는 르코르뷔지에를 더 많이 연구한다. 그에게서는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우디에겐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우디 건축은 모방도 엄두 내기 힘들다. 압도적인 그의 작품 앞에서는 감탄사를 내뱉고 신비로움을 느낄 뿐이다. 르코르뷔지에가 유일하게 천재라고 치켜세운 인물이 가우디다.

최하위 성적으로 건축학교를 졸업하다

매일경제

구엘 공원에서 바라본 바르셀로나 전경 / 사진=flicker(CC BY-SA 2.0)

가우디는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대장장이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류머티즘을 앓았던 그는 평범한 사람보다 한 박자 느린 아이였다. 증세가 심한 날이면 몇 발자국도 제힘으로 못 걸었다. 병약했던 그는 학교를 빠지는 날이 잦았다. 그런 날에 소년은 숲으로 가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람이 풀 사이를 지나다닐 때 나는 서걱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구름을 올려다보고, 거미줄에 걸린 이슬을 자세히 관찰했다. 걸음이 느린 소년은 그렇게 오랜 시간 주변을 둘러봤다. 덕분에 자연의 리듬을 익혔다. 유년 시절에 쌓인 이 경험치는 훗날 그의 건축 뿌리가 됐다.


대장장이 가우디 부친은 자식들이 자신처럼 거친 일을 하지 않길 바랐다. 그는 그림에 소질을 보인 가우디가 건축가 길을 걷도록 지원했다.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 진학한 가우디는 교수들의 주목을 받았다. 우등생이 아니라 문제 학생으로서 이목을 끌었다. 가우디는 기존 건축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 관찰한 것들을 투영해 낯설 설계도를 그려냈다. 교수들은 가우디의 독창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쾌해했다. 자신들의 지도를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학생을 마뜩잖게 여겼다. 형편이 좋지 않은 가우디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생 신분으로 건축사무소를 전전하며 조수로 일했다. 교수들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고 학교생활도 충실히 할 수 없었던 가우디는 최하위 성적으로 겨우 졸업장을 땄다. 졸업식 날 학장은 가우디에게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미친 사람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망신을 줬다. 이 문제아 학생이 훗날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릴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1878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가우디는 고급 장갑을 올려놓을 진열장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목재, 금속, 유리 등 다양한 재료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진열장을 만들어 박람회에 보냈다. 대장장이 아버지의 기술을 어깨너머 배운 가우디는 유년 시절부터 두 손으로 무언가를 조물조물 만들길 좋아했다. 덕분에 가우디에게 금속공예는 자신 있는 분야였다. 장갑 진열장 곳곳에서 정교하게 세공한 금속 조각 작품들이 빛을 내뿜었다. 정작 주인공인 장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장갑 진열장은 가우디의 삶을 통째로 바꿨다. 만국박람회를 찾은 인물 중엔 스페인 사업가 구엘이 있었다. 그는 가우디의 진열장에 푹 빠졌다. 스페인으로 돌아간 구엘은 곧바로 풋내기 건축가 가우디를 찾아갔다. 그는 가우디에게 악수를 청하며 "자네에게는 재능이 있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40년간 이어졌다.

"가우디,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봐"

매일경제

구엘 저택의 내부 / 사진=flicker(CC BY-SA 2.0)

가우디의 재능은 구엘을 만난 이후로 만개했다. 거대한 부를 쌓은 사업가이자 귀족이었던 구엘은 바르셀로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가우디를 전적으로 믿고, 지지했고, 후원했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자신의 저택을 의뢰했다. "가우디,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봐"라며 자율권을 줬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돈을 퍼부었고, 가우디는 구엘을 위해 재능을 끌어올렸다.


구엘 저택은 궁전 수준으로 지어졌다. 대문의 높이만 성인 남성 키 두 배에 달한다. 카사 밀라처럼 외관부터 가우디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가우디 세계가 펼쳐진다.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 그리고 옥상까지도 가우디의 독창성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구석구석에 떨어진다. 역동적인 곡선으로 뒤덮인 저택 전체가 몽환적인 뉘앙스로 가득하다. 옥상엔 가우디 전매특허인 굴뚝이 솟아 있다. 깨진 타일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여 만든 굴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세계처럼 낯설고 신비롭다. 가우디의 첫 번째 대규모 건축물인 구엘 저택은 훗날 1984년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됐다.


가우디가 활동했던 시절, 스페인은 격랑 한복판에 떠있는 돛단배 신세였다. 수세기 동안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서 번영을 누린 스페인은 빠른 속도로 영국에 패권을 뺏겼다.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하며 제국의 권력을 완벽히 상실했다. 스페인 내부에선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의 분노가 거셌다. 곳곳에서 과격한 마르크스, 아나키즘 운동이 펼쳐졌다. 이 모든 난장 속에서도 가우디만큼은 승승장구했다. 구엘의 후원으로 가우디는 쉬지 않고 바르셀로나 곳곳에 거대하고 환상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어느덧 가우디는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됐다.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

매일경제

가우디가 40년 넘게 매달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 사진=flicker(CC BY-SA 2.0)

모두가 가우디에게 우호적인 건 아니었다. 젊은 스페인 예술가 대부분은 좌파였다. 그들은 가우디를 두고 "부자들을 위해 일하는 건축가"라며 비아냥거렸다. 당시 스페인도 다른 유럽 국가처럼 가톨릭이 권력이었다. 가톨릭 신자로서 종교 활동에 깊게 관여한 가우디는 당연히 기득권으로 분류됐다. 가우디를 공격했던 혈기왕성한 예술가 중엔 피카소도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29세 많은 가우디를 탐욕적인 노인으로 여겼다. 피카소는 가우디를 조롱하는 그림까지 그렸다. 하지만 피카소는 가우디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우디는 이미 거장 대우를 받았고 피카소는 이제 주목받기 시작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결국 피카소는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고 그곳에서 벼락같은 성공을 거뒀다.


피카소는 금세 부르주아 세계에 발을 들였다. 부와 명예를 거리낌 없이 누렸다. 손녀뻘인 여성과도 연애 할 정도로 손에 쥔 권력을 전방위로 이용했다. 정작 그가 "탐욕적인 노인네"라며 공격했던 가우디는 평생을 수도승처럼 살았다. 결혼도 안 했고 육식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건축물을 지으며 이름값을 높일 때도 본인은 조그만 집에서 지냈다. 옷차림마저 초라했기에, 그가 전차 사고를 당했을 때 아무도 이 노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가우디의 삶은 건축을 향한 헌신으로만 가득했다. 많은 사람이 뽑는 가우디 대표 건축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다. 가우디는 이 거대한 성당을 쌓아 올리는 데 40년 이상을 쏟아부었다. 생전에 완공이 불가능할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지워진 이후에야 완성될 건축물에 매달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쉬이 가늠하긴 어렵다. 가우디는 삶이 허락하는 마지막 날까지 묵묵히 벽돌 하나를 더 쌓는 데 집중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스페인은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까지 성당을 완공할 계획이다.


가우디가 위대한 건축가인 이유는 웅장하고, 독창적이고, 신비로운 건축물을 남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한 가우디는 자신의 삶도 차분히 벽돌 하나를 쌓듯 설계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멈추지 않고 걸었다. 가난했기에 학생 신분으로 일을 해야 했지만 덕분에 실력을 키웠다. 건축학교 졸업식에선 대놓고 망신을 당했지만 개의치 않고 할 일을 했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공격당했을 때도 오직 건축만 생각했다. 웅장한 건축물을 쏟아내고 화려한 명성을 얻은 후에도 그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위대한 몰입으로 가득했던 천재 예술가의 삶이 주는 전율은 그가 남긴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만큼이나 성스럽다.


조성준 기자

오늘의 실시간
BEST
maekyung
채널명
매일경제
소개글
세계 수준의 고급 경제정보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생생한 뉴스를 전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