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 좌파·우파에게 이용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진 화가
[죽은 예술가의 사회-58] 이쾌대(화가·1913~1965)
월북 예술가들
광복 이후 우익·좌익 세력은 권력을 잡으려고 치열히 싸웠다. 한반도는 이념의 전쟁터가 됐고, 끝내 남한과 북한으로 쪼개졌다. 국민 대다수는 남한과 북한 중 어느 곳에서 살지 선택하지 않았다. 서울, 부산, 평양, 개성에서 살고 있었을 뿐인데 전쟁을 겪었고, 분단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소수는 자신의 의지로 남한과 북한을 선택했다. 사회주의를 동경한 젊은 예술가 상당수는 북쪽을 택했다. 6·25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월북'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금기였다. 반공을 시대정신으로 삼은 엄혹한 정권하에서 북쪽에 있는 시인의 시를 읊었다가는 고초를 치를 수도 있었다. 북쪽으로 넘어간 예술가들 이름은 대부분 잊혔다.
월북인지 납북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지용 시인은 한때 월북 작가로 분류돼 이름도 거론할 수 없었다.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백석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이 금기들이 해제된 건 1988년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월북 예술가 작품에 대해 해금 조치를 내렸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광복 직후 활동했던 예술가들이 대거 부활했다.
그들 중엔 화가 이쾌대도 있었다. 이쾌대 작품 수십 점이 공개됐다. 그림 주제는 대부분 인물화였다. 저고리를 입은 여인부터 부랑자를 그린 그림까지 있었다. 모두 조선의 얼굴들이었다. 자화상도 여럿 있었다. 사람들은 이쾌대 그림 앞에서 생경함을 느꼈다. 그의 인물화들은 모나리자나 고흐 자화상을 떠올리게 할 만큼 서양화 분위기를 풍기는데, 또 가만히 들여다보면 향토적인 느낌도 짙다. 묘한 조화다. 그림과 함께 화가의 삶도 알려졌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광복과 전쟁을 겪은 세대답게 이쾌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파도가 많은 인생의 끝은 대부분 슬픔으로 끝난다. 이쾌대의 인생도 그랬다.
이쾌대가 1940년대 말에 그린 `봄처녀`. 인물화에 집중한 이쾌대는 조선의 얼굴을 그리려했다. /개인소장 |
"여러분들은 벌써 잊었을지도 모른다!"
이쾌대는 1913년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다. 나라가 일제의 손에 넘어간 직후였지만,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이쾌대는 평화로운 유년을 보냈다. 이쾌대 집안은 벼슬을 이어온 명문 가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오늘날 검찰총장인 금부도사를 지냈고, 아버지는 창원 현감이었다. 집 분위기는 딱딱하지 않았다. 일찍 개화사상과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집에 테니스 코트가 갖춰져 있을 정도였다. 개방적인 가풍 덕에 신식 교육을 받은 이쾌대는 전형적인 모던보이였다.
서울 휘문고(당시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이쾌대를 사로잡은 건 야구였다. 학교 야구부 선수로 맹활약했다. 진지하게 야구선수가 되려는 꿈을 품었다. 그러다 수모를 겪었다. 라이벌 중앙고와의 경기에서 15대0으로 패배했다. 이쾌대는 치욕을 잊지 않고 1년 후 교지에 글을 기고했다. 글 제목은 '15대0'이었다. "여러분들은 벌써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잊음이라는 것이 이 경우에 필요한 것일 줄 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 글을 씀으로 해서 이 사실을 기록하여 둠으로 해서 우리 후진에게 한 가지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으로 이 글을 씀을 제군은 양해하여 달라." 이쾌대는 패배를 곱씹으며 시련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려는 소년이었다. 훗날 자신을 '민족주의 화가'라고 말한 이쾌대의 뜨거운 마음은 일찍부터 끓어오른 것이다.
이쾌대를 회화의 세계로 이끈 인물은 화가이기도 했던 휘문고 교사였다. 그는 제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을 가르쳤다. 이쾌대는 화가 등용문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할 만큼 금방 두각을 드러냈다. 휘문고를 졸업할 때쯤 이쾌대는 유갑봉이란 여성과 결혼했다. 신혼부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유학시절에 그린 `운명`(1938). 이 그림으로 일본 유명 전람회에서 입선했다. /개인소장 |
서양화 기술로 조선의 얼굴을 그리다
이쾌대는 도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서양화 기술을 흡수했다. 유화를 활용해 캔버스를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채웠다. 미켈란젤로처럼 해부학적인 지식을 습득해 정확한 비례에 따라 사람을 묘사했다. 이쾌대는 고민했다. '어떻게 서양 화법과 한국 정서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그가 주목한 건 조선인들의 얼굴이었다. 이쾌대는 인물화에 매달렸다. 서양화 기술을 익힌 이쾌대 그림은 당시 조선 화가들의 인물화와는 달랐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의 작품처럼 이쾌대가 그린 인물들은 선이 굵고, 선명하고, 정확하고, 비장했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 '운명'(1938)으로 일본 유명 공모전에서 입선하며 이름을 알렸다. '운명'은 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숨을 거두자 그를 둘러싼 네 명의 여인이 비탄에 잠긴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서양화 단골 주제인 예수의 죽음을 다룬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구도다. 이쾌대는 예상 못 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이 그림 속 기운과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리라고는.
이쾌대에겐 열두 살 많은 형 이여성이 있었다. 이여성도 이쾌대처럼 화가였다. 동시에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아버지 땅문서를 몰래 팔아 독립군에게 자금을 댈 정도로 항일에 깊게 관여했다. 3·1운동 직후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적발돼 3년간 복역도 했다. 이여성은 동아일보에서 일한 적이 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땄을 때 동아일보는 유니폼에 박힌 일장기를 삭제하고 신문을 발간해 조선총독부의 핍박을 받았다. 이여성도 일장기 말소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물론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한마음인 건 아니었다. 정치 노선에 따라서 다른 길을 걸었다. 이여성은 사회주의자였고, 좌익단체에서 활동했다.
형의 영향을 받은 이쾌대 역시 그림만 그린 화가는 아니었다. 유학 시절 이쾌대는 일본에 있는 한국 화가들을 모아 조선신미술가협회라는 조직을 세운다. 조직의 목적은 분명했다. '조선의 미감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민족미술 부흥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회원 중에는 이중섭도 있었다. 이쾌대는 1941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조선신미술가협회 소속 화가들과 활발하게 전시회를 개최하며 이름을 알렸다. 당시 조선 땅에서 화가로 성공하려면 조선총독부가 여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상을 타야 했다. 이쾌대는 조선미술전람회와 거리를 뒀다. 그 대신 서양화 기술을 토대로 한국 정서를 표현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쾌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 /개인소장 |
좌익, 우익 모두에게 이용당한 이쾌대
1945년 8월 광복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혈기왕성한 30대 화가 이쾌대의 가슴은 솟구쳤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으리라는 설렘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광복 직후 이쾌대가 그린 자화상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에는 젊은 화가의 결연함이 들어 있다. 파란 두루마기를 입은 이쾌대가 부릅뜬 눈으로 정면을 쳐다본다. 굵은 눈썹, 두꺼운 입술, 우람한 팔뚝을 가진 이 남자에게서 옳음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등 뒤로는 평화로운 조선 산천이 펼쳐져 있다. 이쾌대의 손에는 서양식 팔레트와 동양의 붓이 들려 있다. 비록 서양화 기술을 터득했지만, 꿋꿋이 나의 민족을 그리겠다는 의지가 전해진다.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에서 빠져나왔지만, 광복이 됐다고 곧장 세상에 찬란한 빛이 드리운 건 아니었다. 광복 이후 또 다른 혼돈이 왔다. 국가 재건 과정에서 좌익·우익 세력이 다퉜다. 이쾌대는 광복 직후의 공간을 시리즈로 그렸다. '군상' 연작이다. 이 시리즈 중 첫 번째인 '군상1-해방고지'(1948)는 해방이라는 벅찬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떠올리게 하는 역동적인 그림이다. 그림 왼편엔 하얀 한복을 입은 여자가 맨발로 달려오며 광복 소식을 전하는 중이다. 그림 오른편에는 이 소식을 전해듣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해방의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지만 밝지만은 않다. 오른쪽 화면 아래엔 시체들이 쌓여 있고, 누군가는 아직도 뒤엉켜 싸우는 중이다. 저 멀리에선 여전히 포탄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기쁨과 공포가 섞여 있다. 그럼에도 그림 중앙에는 발가벗은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고 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새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이쾌대는 '군상 시리즈'로 해방의 환희와 해방 후의 혼돈을 동시에 묘사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건지려고 했다.
이쾌대는 광복 이후 좌익 미술 단체에 가담했지만, 곧 회의를 느꼈다. 스탈린 초상화 그리기에 매달리는 선전미술을 따르기 어려웠다. 이쾌대는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뒀다. 그 대신 이 땅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그렸다. '군상 시리즈'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좌익·우익 양쪽 모두 이쾌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49년 이승만정부는 이쾌대를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보도연맹이란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키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다. 보도연맹에 속한 이쾌대는 강제로 반공 포스터 그림을 그려야 했다. 1년 후 6·25전쟁이 터졌다. 어머니 병환 때문에 이쾌대는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이번엔 좌익세력이 이쾌대에게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이쾌대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북한군 명령에 따라 다시 스탈린,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다. 전세는 역전됐고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그사이 이쾌대는 좌익세력으로 분류됐고 국군에 체포돼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휴전협정 후 포로들은 남한과 북한 중 어디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이쾌대는 북한을 선택했다. 그렇게 이쾌대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해방 직후 한반도의 공기를 담은 작품 `군상1-해방고지`(1948) /개인소장 |
"나의 그림을 팔아 아이들을 먹이시오."
이쾌대는 인물화를 그렸고, 그중 상당수는 여성이다. 대부분 아내 유갑봉을 모델로 그렸다. 아내를 향한 이쾌대의 애정은 각별했다. 아내를 아끼고 아껴 말을 놓지도 않았다.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흰 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마음은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쾌대는 자신도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가족들이 굶주리지 않을까 걱정해 그림을 팔라고 했다.
가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뒤로하고 이쾌대가 월북한 이유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가늠할 수는 있다. 그의 형 이여성은 이미 월북해서 북한 정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쾌대도 어찌 됐든 전쟁 중 북한 정권 찬양 그림을 그렸다. 이쾌대가 남한을 선택하면 '빨갱이' 딱지를 달고 살아야 했다. 물리적인 테러를 당할 위험도 컸다. 또한 그는 분단은 잠깐이며, 곧 가족과 재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월북 이후 이쾌대 삶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다. 다만 평탄치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형 이여성은 김일성 세력에게 숙청당했다. 이쾌대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마음을 안고 살다가 떠났을 것이다.
유갑봉은 남편의 부탁을 무시했다. 이쾌대가 그림을 팔아 생계에 보태라고 했지만, 그는 남편의 작품을 소중히 간직했다. '월북 화가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를 견디면서도 남편이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했다. 악착같이 포목점을 운영하며 가족을 먹여살렸다. 군사정권은 월북 작가의 아내라는 이유로 툭하면 유갑봉을 소환해 괴롭혔다. 1980년 유갑봉은 남편과 재회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988년 월북 작가 해금 이후 이쾌대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간직한 아버지의 그림 수십 점을 공개했다. 무언가를 바꿔 보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화가의 그림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쓰라린 삶과 함께.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