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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매일경제

붓도, 물감도 뺏겼지만…꿋꿋하게 행복을 그린 화가 마티스

[죽은 예술가의 사회-65] 앙리 마티스 (화가, 1869~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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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 '악의 꽃'과 마티스

1857년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이라는 시집을 발간했다. 보들레르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시집은 압수당했고 시인은 벌금형을 받았다. 가난과 불안 속에서 살았던 보들레르에게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그는 파리 뒷골목 삶의 비참함과 슬픔에 붙들렸다. 그래서 보들레르 시에는 삶보다는 죽음이, 상승보다는 추락이, 열정보다는 권태가 전면에 등장한다. 어둠을 노래하는 그의 시집은 불온서적이 됐다. 보들레르는 1867년 46세에 그가 예찬하던 죽음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불우한 예술가답게 보들레르 명성은 그가 죽은 후 역전됐다. 인간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감정을 언어로 풀어낸 보들레르는 현대 시 개척자로 추앙받는다. 보들레르가 남긴 유일한 시집 '악의 꽃'은 꽃을 피웠다. 이 시집은 예술가들의 지침서가 됐다.


'악의 꽃' 초판이 나오고 90년이 흘러 1947년이 됐다. 새 버전의 '악의 꽃'이 출간됐다. 이 시집엔 보들레르 시 옆에 삽화가 그려져 있다. 삽화를 그린 화가는 70세를 넘긴 노인이었다. 화가는 '악의 꽃'에 수록된 시 중 33편을 선별하고, 삽화까지 그려 책을 출간했다. 삽화 대부분은 여성을 그린 초상화다. 연필로만 그린 이 초상화들은 담백하다. 도화지에 연필을 쓱쓱 끄적거려 그린 그림 같다. 힘을 빼고 그린 작품답게 편안함이 느껴진다. 동시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시집 속 여성들은 신비스럽다. 망망대해처럼 아득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보들레르 시와 묘하게 어울린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야수'로 불릴 만큼 거칠고 화려한 색채를 구사한 앙리 마티스다. 강렬한 색으로 파리 미술계를 움켜쥐었던 마티스는 말년에 왜 색채의 세계를 떠나 간결한 그림을 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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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삽화가 실린 보들레르 시집 `악의 꽃`의 표지.

평범한 직장인에서 화가로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북부 카토에서 태어났다. 제법 성공한 곡물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사업을 이어받길 원했다. 하지만 허약 체질이었던 마티스는 사업보다는 조용히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공부하겠다는 자식을 나무랄 부모는 없다. 마티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에만 집중하도록 지원했다. 파리로 건너가 법률을 전공한 마티스는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고향으로 돌아와 법률사무소 조수로 취직했다. 삶은 사소한 우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마티스에게도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우연이 찾아왔다. 취직하고 얼마 안 돼서 마티스는 심한 맹장염에 걸렸다. 수술을 받고 꽤 오래 병상에 누워 있었다. 마티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미술 도구를 사줬다. 오랜 요양에 따분함을 느끼던 마티스에게 심심풀이로 그림이라도 그려보라고 건넨 선물이었다. 마티스의 삶이 새로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재미 삼아 풍경화를 그린 마티스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캔버스 위에 창조한 자신만의 세계에 마법처럼 푹 빠졌다. 마티스는 법률사무소에 복직했지만, 머리엔 온통 그림뿐이었다. 마티스는 시간만 나면 홀린 사람처럼 그림을 그렸다. 화가가 되기 위해 법조인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기로 했다. 모범생이었던 아들이 예술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하지만 마음을 굳힌 아들을 돌려세우진 못했다. 스물두 살의 마티스, 그림 기초도 모르는 화가 지망생은 천재들이 우글거리는 파리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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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 사조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 `모자를 쓴 여인`(1905).

강렬한 원색…야수파가 탄생했다

파리에 자리 잡은 마티스는 전통적인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학생들과 나란히 앉아 기초 회화를 배웠다. 그림 실력 자체는 나날이 발전했지만,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지는 못했다. 이 시기 마티스 그림은 전통적인 작품을 충실하게 모사하는 수준이었다. 마티스는 좋은 멘토를 만났다.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간 마티스는 그곳 교수였던 구스타프 모로의 눈에 들어왔다. 모로는 제자들에게 똑같은 그림을 그리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화가의 개성을 중시한 모로는 제자들이 자신만의 색을 찾도록 도왔다.


모로의 지도하에 마티스는 고전주의 그림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 미술계를 휩쓸었던 인상파 그림까지 골고루 연구했다. 거장의 작품 앞에서 마티스는 감탄했고, 한편으론 초조해했다. 자신의 그림은 평범해 보이기만 했다. 마티스는 빚까지 내며 선배 화가의 그림을 사들였고 밤새 연구했다. 그중엔 세잔 작품도 있었다. 세잔은 원근법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화가다. 세잔의 대표작인 사과 그림들은 언뜻 보면 평범한 정물화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이상한 구석이 많다. 어떤 사과는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고, 바로 옆 사과는 정면에서 바라본 시점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피사체를 한 캔버스 안에 담은 것이다. 세잔은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세상을 충실히 묘사하는 그림을 완벽히 거부했다. 후배 화가들에게 자유를 선사한 세잔은 현대미술의 길을 연 개척자다. 마티스는 세잔의 정신을 존경했다. 세잔처럼 규칙에 의문을 품었다. 마티스는 생각했다. '왜 화가들은 원색을 사용하길 꺼리지?' '왜 눈에 보이는 색만 묘사하는 걸까?' 마티스는 야수가 될 채비를 맞췄다.


20세기로 넘어온 마티스는 강렬한 원색을 사용했다. 1905년 작품 '모자를 쓴 여인'은 마티스의 시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초상화는 마티스가 아내를 모델로 그린 작품이다. 초상화 구도 자체는 평범하다. 하지만 마티스가 사용한 색채는 마치 불협화음 음악처럼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아내 얼굴을 살색이 아닌 녹색과 노란색 그리고 하늘색으로 덮었다. 배경 역시 화려한 색채들이 뒤엉켜 '색 잔치'를 벌이고 있다. 마티스에게 동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형태, 피사체, 구도보다는 색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을 무시하고 화가의 감정에 따라 색을 재창조했다. 마티스 무리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세 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한 비평가가 이들의 그림을 두고 "마치 야수처럼 포악하고 거칠다"라고 평가했다. 자연의 색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강렬한 색을 사용하는 화가들을 '야수'에 빗대 조롱한 것이다.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은 야수라는 비아냥거림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야수파' 사조는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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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의 대표작 `삶의 기쁨`(1906)과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1907). 둘은 각각 야수파, 입체파를 이끌며 세기의 라이벌이 됐다.

피카소 등장에…금세 흩어져 버린 야수들

야수파가 강렬한 색으로 맹위를 떨치던 때 마티스를 시기한 젊은 화가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회화의 문을 활짝 연 마티스를 보며 경쟁심을 불태웠다. 이 화가의 이름은 피카소다. 피카소 역시 마티스처럼 세잔을 존경했다. 세잔은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처럼 단순한 형태로 해석했다. 그는 기하학적 단위로 쪼갠 세상을 캔버스에 재배치했다. 피카소는 세잔의 아이디어를 가져와 자신의 화풍을 만들었다. 피카소는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마치 퍼즐 조각을 이어 붙인 듯한 그림이다. 피카소는 인간의 신체를 조각조각 낸 후 캔버스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조립했다. 그렇게 입체파가 탄생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파리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전위 예술 패러다임이 야수파에서 입체파로 넘어갔다. 피카소는 현대 예술 황제가 됐다. 실제로 야수파 화가들은 1907년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마티스와 함께했던 야수파 화가들은 피카소의 운동에 합류했다. 동료들이 떠나자 마티스는 낙담했다. 하지만 멈추진 않았다. 그는 묵묵히 색채 실험을 이어갔다. 야수파 운동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마티스 명성만큼은 끄떡없었다. 마티스가 색의 해방을 이끌었다면, 피카소는 형태 해방을 주도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그의 뱃속에는 태양이 들어 있다." 피카소가 마티스를 두고 남긴 유명한 말이다. 마티스는 태양을 녹여낸 듯한 찬란한 색채를 구사했다. 이 색채 앞에서 천재였던 피카소도 경이로움을 느꼈다.


마티스는 행복의 화가로도 불린다. 그의 대표작 '삶의 기쁨'(1906)은 따사로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평화로운 숲속에서 벌거벗은 사람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이 만끽하는 기쁨은 다채로운 색채를 타고 관객 마음에 스며든다. 마티스는 "내가 꿈꾸는 미술이란 노동자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하게 머리를 눕힐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마티스는 1910년대 후반 프랑스 남부 니스로 내려갔다. 지중해와 맞닿은 니스는 유럽 대표 휴양지다. 마티스는 그곳에 정착해 안락의자처럼 편안하고, 휴양지 햇살처럼 나긋한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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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수술 후 붓을 못 잡게 된 마티스가 색종이 작업으로 만든 작품 `이카루스`(1946).

꿋꿋하게 행복을 그린 화가

시간이 흘러 1939년이 됐다. 일흔이 된 마티스는 거장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마티스를 비판하는 후배 화가들도 있었다. 마티스가 공격당한 이유는 그의 그림이 아름다움, 편안함, 기쁨을 다뤘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선 히틀러가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로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암울한 현실과 동떨어진 그림만 그리는 마티스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1940년 파리는 나치에 함락당했다. 한때 화가를 꿈꿨다가 좌절당했던 히틀러는 예술가를 증오했다. 나치는 예술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화가들을 탄압했다. 유럽 예술가들은 미국으로 탈출했다. 나치 블랙리스트에는 마티스도 있었다. 마티스는 "도망자가 되고 싶지 않다"라며 프랑스를 떠나지 않았다. 히틀러가 증오의 힘으로 세력을 키우는 와중에도 마티스는 행복을 그렸다. 그것이 마티스가 거대한 악에 대항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마티스의 속은 편치 않았다. 나치에 붙잡히면 어떤 수모를 겪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가 머물던 니스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또 다른 불운이 마티스를 찾아왔다. 그는 대장암 선고를 받았다.


암 수술을 받은 마티스는 쇠약해졌다. 각종 합병증 탓에 걸을 수도 없었다. 관절염이 심해져 붓을 드는 것도 힘들어졌다. 폐 건강도 나빠졌다. 의사는 물감에서 나오는 성분 때문에 폐 건강이 더 악화할 수 있다며 유화를 그리지 말라고 했다. 몸이 나약해지면 정신도 시들기 쉽다. 그러나 마티스는 그렇지 않았다. 걸을 수도 없고, 붓과 물감도 사용하지 못하게 됐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마티스는 유화 대신 연필을 들고 간결하고 담백한 그림을 그렸다. 색채의 대가였던 그는 색을 버리고 연필을 이용해 시집, 소설 삽화를 그렸다. 보들레르 시집 삽화는 이 시기에 그린 것이다. 마티스는 색종이도 이용했다. 가위를 든 그는 원하는 모양으로 색종이를 오려 캔버스에 다닥다닥 붙이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마티스 후기 대표작 '이카루스'(1947)는 색종이 작업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루스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해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 태양에 날개가 녹아 추락했다. 물론 마티스는 날개를 잃고 추락 중인 이카루스를 묘사했다. 하지만 신화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림만 보면 추락하는 인간의 공포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무중력에 몸을 맡긴 인간이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날개를 잃고 추락하는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마티스는 절망 대신 낙관을 본 것일까. 몸이 무너져 붓을 들 수 없게 됐지만, 색종이를 오려 새 여행을 시작한 화가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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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대표작 `춤`(1909).

위로하는 그림

마티스는 고집스러웠고 동시에 유연했다. 본인의 그림을 안락의자에 비유한 화가답게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길 원했다. 야수파 동료들이 떠나고, 세상이 전쟁이라는 어둠에 뒤덮이고, 건강이 무너져 붓을 잡을 수 없는 상태에도 그의 작품은 고집스럽게 낙관적인 세계를 지켰다. 행복의 세계를 사수하기 위해 마티스는 유연하게 규칙을 바꿨다. 붓에서 연필로, 연필에서 색종이로 도구를 바꿔가며 기쁨을 그렸다. 1954년 마티스는 그의 그림과 닮은 아름다운 니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보들레르의 시가 말하듯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곳곳이 자갈밭이고, 여기저기서 악다구니가 들린다. 마티스는 세상 풍파에 지친 사람들에게 소소한 평화를 선물하려 했다. 마티스의 따스한 그림을 들여다보면 화가가 이렇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잠시 내 그림을 보고 쉬었다 가시오.' 안락의자처럼 편안한 이 화가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비록 아주 잠시일지라도. 마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그림에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으려 했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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