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 퍼부은 그림이 1800억...잭슨 폴록은 어떻게 신화가 됐나
잭슨 폴록 (화가, 1912~1956)
미국의 예술가
2차 대전의 파괴력은 1차 대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했다. 나치는 상상력마저 학살하려 했다. 그래서 예술가를 핍박했다. 전쟁 중 많은 예술가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피난을 떠났다. 뒤샹, 샤갈, 칸딘스키, 달리 등 유럽을 주름잡던 예술가들은 미국행 배에 올랐다. 이 남성 예술가 무리 중심에 페기 구겐하임이 있었다. 미국인 페기는 부유한 가문 상속녀였다. 그는 일찍이 유럽으로 건너가 화가들과 교류했고, 미술 컬렉터로 명성을 떨쳤다. 전쟁 중 페기는 쉰들러 리스트 작전처럼 예술가들이 미국 피난길에 오르는 걸 도왔다.
미국으로 돌아온 페기는 뉴욕에 '금세기 미술관'을 오픈했다. 그곳에서 자신과 함께 이 땅을 밟은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현대미술 중심지는 자연스럽게 파리에서 뉴욕으로 교체됐다. 하지만 미국이 현대미술 랜드마크가 된 건 유럽 예술가가 뉴욕으로 건너와 활동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페기와 그의 동료들은 한 젊은 미국인 화가를 발굴하고 그에게 기회를 줬다. 이 화가는 세상이 상상하지 못한 실험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미술계를 뒤집었고, 피카소와 맞먹는 슈퍼스타가 됐다. 전 세계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 젊은 예술가를 주목했다. 당연히 미국 예술의 위상은 눈부시게 치솟았다. 잭슨 폴록의 이야기다.
멕시코 벽화, 초현실주의…잭슨 폴록의 자양분
폴록이 20대 초반에 그린 `서부로 가는 길`(1935). 그가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그린 건 아니다. /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
미국 서부 와이오밍은 허허롭고 광활한 지역이다. 미국의 주 중에서 가장 인구수가 적지만, 그 대신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품고 있을 만큼 경이로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다. 원주민 문화 흔적이 선명한 땅이기도 하다. 폴록은 와이오밍 농가에서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폴록의 가족은 생계 때문에 서부의 여러 주를 전전했다. 그렇지만 폴록이 유년 시절 마음에 새긴 와이오밍 풍경은 훗날 그의 그림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화가의 길을 걸었던 형의 영향으로 폴록도 자연스레 붓을 잡았다.
폴록은 1929년 뉴욕에 가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 시기 멕시코에서는 벽화 운동이 한창이었다. 당시 멕시코는 혁명이라는 열기로 뜨거웠다. 벽화 운동도 혁명의 일부였다. 멕시코 벽화 운동을 이끈 화가는 프리다 칼로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다. 그는 민중봉기 등을 주제 삼아 거대한 벽화를 그렸다. 디에고와 함께 벽화 운동을 이끈 화가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다. 시케이로스는 1930년대에 뉴욕으로 건너와 벽화작업을 이어갔다. 폴록은 시케이로스 조수가 됐다. 시케이로스는 깡통에 물감을 담아 캔버스에 쏟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창조했다. 폴록은 생경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케이로스에게 큰 영감을 받았다. 훗날 그가 캔버스에 물감을 휘갈기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건 우연이 아니다.
폴록이 자양분으로 삼은 장르는 두 가지가 더 있다. 그는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에게 화두였던 무의식에 집착했다. 캔버스 위를 걸으며 직관과 충동적 에너지로 이미지를 만들어낸 폴록의 작업 방식은 초현실주의 화법과 닮았다. 와이오밍 출신답게 폴록은 인디언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형형색색으로 염색한 모래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창조한 서부 인디언의 미술은 폴록의 인상에 오래 남아 있었다.
멕시코, 유럽, 인디언 예술을 고루 받아들여 융합한 폴록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로 떠날 여정을 거의 마쳤다. 이 여정을 출발토록 만든 마지막 연료는 자기 자신이었다. 폴록이라는 인간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도 어려워할 만큼 산만했다. 알코올중독, 우울증, 강박증에 시달렸다. 폭력성도 짙어 툭하면 싸움을 벌였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잠들고, 아무 데나 소변을 갈기는 난봉꾼이었다. 정신과 치료를 오래 받았지만, 부글부글 끓는 폴록의 내면세계는 가라앉지 않았다. 자기 파괴적인 에너지는 그의 삶을 진창으로 끌어내렸다. 하지만, 캔버스 위에서만큼은 이 에너지가 창조 원동력으로 작동했다. 이 우주에 오직 나 혼자만 있다고 여기는 인간처럼, 광기에 가까운 몰입 속에서 그림을 만들었다.
"빌어먹을 피카소!"
완전한 추상표현주의 화풍으로 나아가기 직전에 그린 `열기 속의 눈`(1946). 이때까진 드리핑(물감 뿌리기)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 베니스 페기구겐하임컬렉션 |
유럽 예술가를 미국으로 데려오고, 1942년 뉴욕에 '금세기 미술관'을 연 페기 구겐하임은 미술계 큰손이 됐다. 페기의 비서가 주목할 만한 젊은 화가가 있다고 귀띔했다. 잭슨 폴록이었다. 페기는 약속을 잡고 폴록 작업실을 찾았다. 바깥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버린 폴록은 약속 시간을 한참 넘겨 작업실로 왔다. "애송이 주제에 나를 바람맞히다니!" 페기는 폴록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폴록 그림에서도 큰 매력을 못 느꼈다. 폴록 작품은 아직 추상표현주의로 나아가지 않은 상태였다. 피카소가 개척한 입체주의 화풍 영향을 받은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뒤샹은 의견이 달랐다. 뒤샹은 폴록의 그림을 보고 "나쁘지 않군"이라고 말했다. 페기가 유럽에 머무는 동안 그에게 예술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알려준 인물이 뒤샹이다. 그런 뒤샹이 폴록에게 뭔가를 발견하자 페기도 태도를 바꾸고 이 젊은 예술가를 후원하기로 한다. 페기는 폴록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한적한 곳에 집을 얻어줬다. 매달 일정한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폴록을 최대한 어르고 구슬리며 예술에 집중하도록 도왔다. 페기는 1943년 '금세기 미술관'에서 폴록 개인 전시회를 열어줬다. 폴록이 뉴욕 미술계에 공식 데뷔한 순간이었다. 반응은 미지근했다. 페기의 후광 덕분에 폴록은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지만, 이 전시회에서 폴록은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했다.
"빌어먹을 피카소! 그놈이 다 해 처먹었어." 데뷔전에서 실망한 폴록은 별안간 피카소를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폴록은 피카소를 존경했고, 두려워했고, 결국 저주했다. 피카소는 회화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실험을 했고, 거장이 됐다. 폴록은 자신이 발버둥 쳐봐야 피카소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페기라는 든든한 후원자까지 등에 업었지만 폴록의 불안감은 커졌다. 그러다 사건이 발생했다. 1947년 어느 날 폴록은 이젤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충동을 느꼈고,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눕혔다. 폴록은 캔버스에 물감을 들이부었다. 그렇게 현대미술의 신화가 탄생했다.
추상표현주의 vs 액션 페인팅
1949년 8월호 라이프지는 잭슨 폴록을 집중 조명한 기사를 실었다. 이를 계기로 잭슨 폴록은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
폴록이 그림을 그린 방식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거대한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캔버스 위를 종횡무진하며 말 그대로 물감을 뿌렸다. 당연히 결과물은 혼돈이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어린아이가 낙서를 한 듯하다. 미술계는 폴록의 그림을 '추상표현주의'라고 불렀다. 물론, 폴록 이전에도 추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있었다. 칸딘스키가 대표적이다. 칸딘스키는 회화가 어떤 대상을 재현해야 한다는 의무를 버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구체적인 피사체 대신 원, 면, 선처럼 순수한 도형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은' 칸딘스키 그림에서도 최소한 사각형, 삼각형, 원통이라는 도형은 느낄 수 있다. 폴록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도형이라는 회화 기초 언어마저 거부하고 물감을 덕지덕지 뿌렸다. 관객들은 폴록의 추상화 앞에서 직관적으로 압도됐다. 그림 크기가 벽화 수준으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감 흔적이 전부인 그림 내용에는 혼란을 느꼈다. 해석이 필요했다. 평론가들이 나설 차례였다.
폴록을 스타로 만든 일등 공신은 클레멘트 그린버그다. 그는 뉴욕에서 활동한 비평가 중 가장 영향력이 센 거물이었다. 그린버그 머릿속엔 '회화는 회화만의 순수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상향이 있었다. 폴록을 만나기 전까지 그린버그에겐 피카소가 영웅이었다. 피카소는 원근법이라는 족쇄를 파괴한 혁명가였다. 원근법은 회화가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기법이다. 피카소는 생각했다. "왜 그림이 세상을 그대로 담아야 하지? 세상은 3차원이고 캔버스는 2차원인데 말이야." 그리고 원근법을 버렸다. 우린 현실 세계에서 한 사람을 볼 때 좌, 우, 앞모습을 동시에 볼 수 없지만, 피카소 그림에선 볼 수 있다. 피카소는 여러 방향에서 본 사람의 모습을 한 화면에 그렸다. 조각난 파편을 모자이크처럼 이어붙인 모양새다. 세상은 이런 기법을 입체주의(큐비즘)라고 불렀다. 하지만 피카소 그림엔 어쨌든 피사체가 등장하고 배경도 있다. 피카소 그림에서도 어느 정도 3차원적인 공간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폴록 그림엔 피사체도 배경도 없다. 완벽한 평면이다. 그린버그는 폴록을 피카소에 맞먹는 혁명가로 치켜세웠다. 그린버그는 폴록 그림처럼 물감 배열로만 이뤄진 순수한 2차원 세계가 회화의 본질이라 여겼다. 그린버그는 폴록과 그의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예술의 미래라고 선언했다.
그린버그와 이름이 비슷한 또 다른 스타 평론가 로젠버그도 폴록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그린버그와 달리 폴록의 그림은 중요하지 않았고 여겼다. 그 대신 작품을 만들어내는 폴록의 '행위'에 중점을 뒀다. 화가의 고민, 에너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 등 예술가의 운동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봤다. 작품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어떤 흔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독특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낸 폴록의 작업은 로젠버그를 사로잡았다.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폴록의 '행위'를 예술로 승격했다.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로,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으로 폴록을 이해하려 했고, 누구의 이론을 적용하든 폴록은 혁명가였다.
미국의 영웅이 됐지만…
폴록의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품 `No. 5`(1948). 2006년에 경매에서 한화로 약 1800억원에 낙찰된 작품. / 개인 소장 |
미국이라는 나라는 온 힘을 다해 폴록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2차 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미국은 유럽 강대국을 제치고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여전히 삼류 취급을 받았다. 문화 패권마저 쥐고 싶었던 미국은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스타 예술가가 필요했다. 당연히 잭슨 폴록이 최적 후보였다. 1949년 미국 유명 잡지 '라이프'는 8월호에서 대중적으론 무명에 가까웠던 잭슨 폴록을 집중 조명했다. '그는 생존하는 미국인 화가 중 가장 위대한가?'라는 제목의 기사로 폴록을 소개하고 치켜세웠다. 미국 전역에 잭슨 폴록이라는 이름이 퍼졌다. 미국 정부도 전시회 개최를 전폭 지원하며 폴록의 비상을 도왔다. 추상표현주의는 유럽 예술을 한물간 유물로 만들 만큼 위세가 커졌다. 폴록 뒤를 이어 '추상표현주의' '액션 페인팅' 타이틀을 단 예술가가 속속 등장했다.
폴록은 한순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됐다. 하지만 피폐한 삶은 그대로였다. 폴록의 추상화를 사려는 컬렉터가 줄을 섰다. 폴록은 한 군데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바닥에 내려놓은 캔버스를 다시 이젤에 올려놓고 새로운 장르의 그림을 그리려 했다. 그렇지만 세상이 폴록에게 기대한 건 추상화뿐이었다. 한때 피카소를 넘어서지 못하리란 공포에 시달렸던 폴록은 이번엔 자신이 쌓은 벽에 부딪혔다. 오랫동안 그림을 못 그릴 정도로 절망에서 허우적거리고 술을 퍼마셨다. 폭력성, 우울증, 강박증이 다시 심해졌다. 1956년 8월 폴록은 술에 취한 채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힘껏 밟으며 나무로 돌진했다. 그렇게 폴록은 44세 나이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천재 예술가의 요절'이란 서사를 적절히 이용했고, 폴록을 아예 신화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폴록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로 꼽힌다. 작품 한 점이 1800억원에 팔리기도 했다.
폴록은 우리나라 미술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한 예술가지만, 여전히 그가 남긴 그림은 쉽지 않다. 물감 자국으로 가득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 누군가는 문득 우주를 떠올리며 경이로움을 느끼고, 누군가는 고통만을 느낄 수도 있다. 또는 '그림에서 꼭 무언가를 느껴야만 하는가'라는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다만, 태어났을 때부터 죽기 1초 직전까지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떠안고 살았던 예술가를 한번쯤 떠올려보자. 격투기장 한복판에 뚝 떨어진 사람처럼 맹렬히 싸우다 전사한 폴록을 상상하면 그가 그린 혼돈 앞에서 왠지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