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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매일경제

대자연 경이…차 몰고 달려야 제 맛 느끼는 미 서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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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애리조나 주 페이지 근처의 엔텔로프 캐니언 입구. /사진=송경은 기자

[랜선 사진기행-37] 밤 11시가 넘어선 늦은 밤 우리는 미국 애리조나주 89번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굽이굽이 바위산을 낀 편도 2차로 도로는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했다. 이따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차들의 전조등에 차선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그 시각 함께 달리는 차들은 대부분 화물을 실어 나르는 대형 트레일러였다. 매 순간이 아찔했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1시간 더 남아 있었다. 느닷없이 '죽음의 레이스'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재작년 여름이었다.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출발해 자동차로만 꼬박 2박3일간 그랜드캐니언 등이 있는 미국 서부 '그랜드 서클(Grand Circle)' 지역을 돌았다. 핵심 관광지만 빠르게 순회하는 당일치기 버스투어 상품도 있었지만 직접 운전해 다니며 주변도 둘러보고 뻥 뚫린 도로를 달려보고 싶어 로드 트립을 택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얼마나 먼 거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달려야 하는지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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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에서 출발해 애리조나 주 커튼우드로 가는 길(왼쪽). 오른쪽은 엔텔로프 캐니언이 있는 애리조나 주 페이지의 도로 풍경이다. /사진=송경은 기자

그랜드 서클은 미국 서부 콜로라도주와 유타주, 뉴멕시코주, 애리조나주, 네바다주 등에 걸쳐 있는 국립공원 10개를 이은 것으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로드 트립 코스로 꼽힌다.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을 비롯해 자이언 국립공원, 브라이스캐니언 국립공원, 캐피톨리프 국립공원 등이 포함돼 있다. 주변에 함께 들릴 만한 관광지가 많아 전부를 제대로 즐기려면 2주 이상이 적당하다고 알려져 있다(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여행 일정은 계획하기 나름이다).


우리는 크게 그랜드캐니언과 앤털로프캐니언, 호스슈벤드 정도를 돌아보기로 하고 라스베이거스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첫날은 와이너리(와인 양조장)가 모여 있는 애리조나주 코튼우드까지 4시간 반을 쉬지 않고 달려 도착했다. 평평한 사막 한가운데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 간간이 다른 차가 스쳐 지나간 걸 제외하면 사방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만끽해보는 완연한 해방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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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과 와인 양조장이 모여 있는 애리조나 주 커튼우드의 풍경. /사진=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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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주에는 포도원이 딸린 양조장을 둘러보거나 다양한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와이너리 촌이 여럿 있는데 코튼우드도 그중 하나다. 코튼우드 올드타운 중심부에는 길가에 와인 가게와 테이스팅 룸이 블록마다 줄지어 있었고 와이너리 투어를 안내하는 표지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 지역 와인 테이스팅 룸에서는 보통 10달러 정도를 내면 5가지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오후 3시께 체크인을 하고 숙소에서 걸어 나와 가볍게 와이너리 투어를 하고 났더니 밤이 됐다.


둘째 날 아침에는 플래그스태프를 거쳐 그랜드캐니언으로 향했다. 그랜드캐니언에서 불과 97㎞ 떨어진 플래그스태프는 그랜드캐니언 관광 거점 중 하나다. 자유 여행으로 이곳에 왔더라도 플래그스태프에서 현지 가이드 투어 상품을 선택하기도 한다. 플래그스태프는 그 자체로 좋은 여행지다. 아름다운 호수와 산으로 둘러싸인 그림 같은 대자연 속에서 하이킹, 캠핑, 다운 힐 스키 등을 즐길 수 있다. 북애리조나 박물관과 로웰 천문대도 가볼 만하다. 또 가까운 거리에 선사시대 원주민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월넛캐니언 국립기념지와 우팟키 국립기념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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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니언 사우스림 `마더 포인트`에서 본 풍경. /사진=송경은 기자

그랜드캐니언은 노스림과 사우스림, 웨스트림으로 나뉘는데 노스림과 사우스림이 만나는 지점에 그랜드캐니언 방문객 센터가 있다. 우리는 이곳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트레일을 따라 걸으며 사우스림 주요 뷰포인트를 둘러봤다. 메인 방문객 센터에서 오솔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었더니 '마더 포인트'가 나왔다. 눈앞에 깊은 협곡과 퇴적층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수직 절벽이 펼쳐졌다. 뷰포인트 간 거리는 짧게는 5분, 길게는 20분 정도였는데 수시로 셔틀버스가 다녀 여러 지점을 다니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랜드캐니언에서 나온 뒤였다. 마지막 날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가는 길에 앤털로프캐니언과 호스슈벤드를 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 전 그쪽에 가까운 애리조나주 페이지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그랜드캐니언에서 일몰까지 보고 나오니 주차장에서 줄이 길어져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 그랜드캐니언에서 페이지까지 걸리는 시간은 3시간30분. 경로는 단순했지만 초행 길인 데다 늦은 밤 쌩쌩 달리는 대형 트럭들 사이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결국 자정이 다 돼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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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니언에서 페이지로 가는 길. 날이 어두워지자 조명 없는 캄캄한 도로에서 협곡의 실루엣이 보인다. /사진=송경은 기자

페이지 시내에서 앤털로프캐니언 입구까지는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앤털로프캐니언의 모든 투어는 이 지역 원주민(나바호족)의 가이드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투어 프로그램은 회차별 예약제로 진행된다(간혹 한산한 때는 현장 예약도 가능하다). 앤털로프캐니언 입구와 페이지 시내 등에 원주민이 운영하는 투어 집합 장소가 있고 이곳에 차를 세운 뒤 투어 차량을 타고 앤털로프캐니언 안쪽으로 이동하는 식이다. 투어 업체마다 볼 수 있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업체를 비교해보고 선택하는 것이 좋다.


앤털로프캐니언은 페이지 동쪽 나바호 땅에 있는 슬롯 협곡으로, 수백 년에 걸쳐 사암을 관통한 물에 의해 침식되면서 형성됐다. 특히 몬순 기간 범람한 빗물이 모래를 휩쓸어가면서 계곡이 더 깊어졌다. 나바호족 언어로 ‘바위를 통해 물이 통과하는 곳(Tsé bighánílíní)’으로 불린다. 어퍼캐니언 기준으로 깊이가 1200㎞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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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에서 오후 12시로 넘어가는 시간대의 엔텔로프 캐니언 사암층.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빛에 물이 거칠게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진=송경은 기자

앤털로프캐니언은 어퍼캐니언과 로어캐니언으로 나뉜다. 어퍼캐니언은 협곡 사이의 평평한 길을 다니면서 풍경을 즐길 수 있고, 로어캐니언은 상대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을 다니면서 체험하기 때문에 각각 장단이 있었다. 우리는 어퍼캐니언으로 갔다. 앤털로프캐니언 안쪽으로 들어가자 마치 바위에 휩싸여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전 11시 전후에는 바위 틈으로 햇빛이 비스듬하게 내려오면서 광선을 이뤘고 물이 거칠게 흘러간 흔적과 굴곡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앤털로프캐니언 인근의 호스슈벤드는 주차장에서 꽤 먼 거리였다. 계단이 있긴 했지만 그늘 하나 없는 오르막길을 편도 30분을 가야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뷰포인트. 아래를 내려다보니 굵은 콜로라도 강줄기가 아찔한 협곡 사이를 휘감아 흐르고 있었다. 이 잠깐의 한 장면으로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호스슈(horseshoe)'라는 이름처럼 그 모습은 정말 말발굽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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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줄기의 모습이 말 발굽을 닮은 `홀스슈벤드`를 내려다 본 모습. /사진=송경은 기자

모든 투어를 마치고 나오니 오후 4시. 다시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가는 장거리 운전이 시작됐다. 쉬지 않고 4시간30분을 달려 저녁께 라스베이거스 도심에 도착한 우리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구글맵 히스토리를 보니 지난 3일간 차로만 873마일(약 1405㎞)을 이동한 것으로 나왔다. 서울~부산 거리를 2번 왕복한 셈이다. 하지만 다시 서부 여행을 간다고 해도 자동차 여행을 택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물론 여행 시간이 하루라도 더 늘어난다면 금상첨화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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