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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후보 中소설 거장 옌롄커 인터뷰 "어둠 없이는 아름다움도 무의미"

`레닌의 키스` `침묵과 한숨` 소설·강연집 동시 출간, 中서 금서 8권 논란의 작가

욕망앞에 미쳐가는 인간들, 죽음이 사물화되는 비극 그려

역병에 제압 당한 오늘도 작가는 인류애로 글쓰기 계속

매일경제

중국 소설 거장 옌롄커(62)는 현존 동아시아 작가 가운데 가장 묵직한 질량감의 소설로 정평이 나 있다.


역사와 세월의 더께를 한 꺼풀 벗겨 응시하는 소설 때문이다. 대지에 펼쳐진 마을을 배경 삼으면서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모순을 그는 비극적인 서사와 입체적인 형식으로 담아낸다. 마을(閻)과 이어진(連) 한 그루(科)의 초목이라는 본인 이름처럼, 옌롄커는 늘 세계로부터 한 걸음 비껴 서는 시각을 유지하며 진정 성실하게 써왔고 이는 그를 '21세기 중국의 카프카'로 자리케 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기대감 덕분인지, 이번에는 책 두 권이 동시 출간됐다. 27년간 생업으로서 직업군인이던 그가 결국 군복을 벗게 만든 반(反)체제 장편소설 '레닌의 키스'(문학동네)와 하버드·예일·뉴욕대 강연집 '침묵과 한숨'(글항아리)이다. 중국에 거주 중인 옌롄커를 4일 서면으로 만났다. 인터뷰 키워드는 '역병'이었다. 이번 책 서문의 제목을 그는 '문학의 역병'으로 썼다.


"역병의 세월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문학이야말로 한 시대의 역병이어야 한다. 인간과 악, 시대의 괴질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문학은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카인이 아벨을 모살함으로써 인간이 인성의 복잡함을 인식한 것처럼 어둠 없이는 아름다움도 무의미하다는 인식 위에서 소설을 썼다."

매일경제

신작 '레닌의 키스'에는 레닌이 나오지 않는다. 소설은 중국 산골마을 서우훠(受活)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서우훠를 관할하는 현장(縣長)은 레닌의 유해를 사들여 현 일대를 국가급 관광지로 키운다는 욕망을 품는다. 이념의 상품화를 위한 자금 출처는 서우훠의 병든 주민들이다. 현장은 서우훠 장애인 묘기공연단을 꾸리고, 일확천금에 눈이 뒤집힌 주민들도 협잡과 모의로 일관한다.


"마을은 땅의 가장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문화 영역이다. 마을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땅의 존재도 불가능하다. 서우훠 주민들은 생존과 미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과도하게 희생한다. 역사가 인간에게 강요했듯 말이다. 실현될 수 없는 과도한 욕망들은 중국에서 벌어졌던, 집단과 개인이 경험했던 '거대한 가위눌림' 같은 것이기도 하다."


5위안이던 공연단 입장료의 암표가격은 265위안까지 치솟는다. 공식 입장료는 500위안, 700위안으로 오른다. 소설 시점은 30년 전이다. 관중이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겠다는 광기는 서우훠마을의 '아홉 쌍둥이'를 날조해내더니 '241세 할머니'라는 거짓까지 동원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결국 사기를 당하고 한 공간에 갇히는데, 저들은 굶어죽을 위기 속에서도 쌈짓돈을 안 꺼낸다.


"돈이 삶의 생명, 미래의 신(神)이 돼버렸다. 사람들에게 돈을 내라고 하는 건 신도들에게 신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같아졌다. 중국은 공산주의 유토피아에서 깨어나온 뒤로 다시 자본주의의 유토피아로 진입했다. 굴욕과 존엄 사이에서 돈이 신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현실을 풍자하려 했다."

매일경제

옌롄커 작품엔 인간과 공간,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 자주 등장한다. 터무니없는 욕망 앞에서 인간은 광인으로 미쳐간다. 죽음마저 사물화되는 그의 소설엔 근현대사가 펼쳐진다. 3000만명이 아사한 1960년대 대기근이 이번 소설에 형상화됐는데 옌롄커로 가는 지름길인 이번 신작 강연집 '침묵과 한숨'에서 그가 "캄캄한 어둠은 일종의 색깔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고 회고한 이유도 그와 같다.


"역사는 항상 또는 결국 앞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는다. 이른바 '민감함' 때문에 글쓰기에서의 어떤 사유를 포기하거나 축소하진 않을 것이다. 작가는 문학에서 자기 고유의 존재의 좌표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작가에게 자기 좌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문학이라는 바다 위에서 정처 없이 길을 잃고 말게 된다."


다시 역병의 키워드로 돌아가, 문학은 팬데믹 시대의 한 위로의 형식이 될 수 있을까. '문학은 정신의 밥'이라는 옌렌커의 옛 인터뷰를 회고해보면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건 어떤 정신적인 위안과 해방이 아닐까. "문학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희망의 대지 위를 흐르는 가는 물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제가 글을 쓰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제가 인류에의 사랑을 재현하기 위해서다. 역병에 제압 당한 오늘이나 그 이후의 미래에도, 문학이 표현 가능한 유일한 것은 작가의 생명 속에서 꺼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에의 사랑으로 글을 쓰겠다."

중국 소설가 옌롄커 매경 인터뷰 전문(全文)

매일경제

1. 현실주의에 관한 비판이 담긴 신작 ‘레닌의 키스’의 ‘후기’부터 기억해 봅니다. 후기에 기대어 생각해보건대, 신작 한국어판 서문의 “문학의 역병”이란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도 2020년의 인간이 역병의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그 비유가 와닿는지도 모르겠습니만 그것은 마치 ‘문학은 한 시대의 역병과도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동의하실까요.


우선 제 작품을 읽어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특별히 문학화된 질문들을 제시해주신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학은 시대의 역병이다”라는 명제는 아주 훌륭한 견해하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인간과 시대, 사회의 괴질과 악, 파괴를 위해 생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이 현실의 이런 요소들을 직시하지 않으면 문학 자체가 붕괴하고 그 전체적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현실에서의 모든 사람과 사물, 사건들이 건강하고 안전하다면 우리가 굳이 악과 파괴, 어둠, 혼돈, 혼란 등을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카인이 동생 아벨을 몰래 모살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모살(謀殺) 사건이자 인간에게 최초로 사악함과 괴질, 질투 등의 심리현상이 발생한 사례이지요. 카인의 출현이 없었다면 우리는 인성의 기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동생 아벨에 대한 카인의 질투와 모살로 인해 우리는 인성의 복잡함을 인식하게 되었지요.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인간과 역사, 사회의 악과 질투, 어둠 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아름다움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이 점을 인식해야만 우리는 풍부하고 복잡하고 다면적인 의미에서의 소중함과 아름다움, 선량함, 사랑의 고귀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2. 장편 ‘레닌의 키스’ ‘딩씨 마을의 꿈’ ‘사서(四書)’ 등 선생님의 작품에는 이룰 수 없거나 이뤄서는 안 되는 공동목표와 이를 수행하려는 주민들의 비뚤어진 욕망, 그리고 저 욕망에 반기를 드는 인물이 자주 등장합니다. 마을을 중심으로 서사가 구성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구도가 발견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위 세 작품의 면밀한 차이점을 살펴본다면 선생님 작품은 최신작으로 갈수록 일련의 공동 목표를 반대하는 인물(이번 소설 ‘레닌의 키스’에서의 마오즈 할머니)의 역할이 줄어들고 소극적인 인물(‘사서’에서의 화자 ’작가’와 같은)로 중심 인물상이 무력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변화에 동의하시는지요. 변화에 동의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의 소설들에 대한 분석과 인식이 대단히 훌륭하시군요. 저의 글쓰기에서는 이야기와 인물이 땅과 흙을 벗어나서 멀리 날거나 서있거나 풍부하고 윤택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거인 안타이오스가 땅을 벗어나서는 힘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마을은 땅의 가장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문화의 영역이자 존재입니다. 마을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땅의 존재도 불가능하지요. 땅은 인간에게 자양을 제공하고 성장을 보장해주는 거대한 토양이자 물이요, 산맥일 뿐만 아니라 그 땅 위에서 생장하는 미세하지만 왕성하게 팽창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력의 문화이기도 합니다. 이런 땅 위에서 살아가는 마을과 사람들은 세대를 이어가면서 생존과 미래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력을 과도하게 희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은 때로는 생존의 본능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역사가 그들에게 부득이하게 강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딩씨 마을의 꿈’과 ’레닌의 키스’, ’작렬지’ 같은 작품에 나타난 ‘욕망의 꿈’처럼, 실현될 수 없는 과도한 욕망의 목표들은 대부분 집단으로서의 중국과 중국의 개인들이 벗어날 수 없는 백년의 거대한 가위눌림이자 역사가 거의 모든 땅에 심어놓아 제거할 수 없게 된 가위눌림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중국의 한 개인으로서 점점 더 이런 악몽의 씨앗들이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확장되면서 중국의 한 개인으로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는 그 씨앗들이 아주 먼 역사에서 왔을 뿐만 아니라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우리 모든 개인의 피와 생명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글쓰기에서 어떤 비판이나 반대의 힘이 길수록 축소되고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점차 그런 힘이 우리 개인들에게서 분리해낼 수 없는 일부분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쁜 세포가 우리 개인들 몸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지요. 때로는 화해와 공존이 이러한 세포를 잘라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의 저의 글쓰기에서 보다 명확하고 분명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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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번 신작의 내용적인 부분을 여쭙겠습니다. 독자로서의 궁금증이기도 합니다. 질문은 세 가지입니다.


(1) 레닌기념관에 갇힌 마을 주민들은, 6만4천 위안(1인당 8천 위안, 8인으로 계산시)을 주고 풀려나면 될 일을 행하지 않고 자신의 소변을 마시거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당장의 급한 끼니만 해결합니다. 사실 이 대목에서 모순된 인간상을 뼈저리게 지적하시리라 예상했는데 결국 지적하지 않으시고 읽는 이의 판단으로 남겨두신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모든 사람이 8천 위안이면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언의 곤경’에 갇혀 있으면서 왜 돈을 내지 않음으로써 굴욕적이고 존엄이 없는 방식을 선택한 것일까요? 첫째, 30년 전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8천 위안은 실제로 8천 위안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의 화폐가치로 환산하자면 8만 혹은 80만 위안이 넘을 수도 있는 금액이지요. 요컨대 천문학적인 숫자인 셈입니다. 둘째,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이 몇 십 년 동안 중국인과 중국사회가 공산주의 유토피아에서 깨어 나온 뒤로 다시 자본주의의 금전만능주의 유토피아로 진입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돈에 대해 미신 같은 종교적 신앙을 갖게 되었고 돈이 삶의 생명이자 마래의 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에게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신을 믿는 신도들에게 신(神)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같지요. 오늘날에는 돈이 물질이자 문화가 되어 대부분 사람들의 정신 속에 존재하면서 신의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2) 아울러 내용적인 측면에서, 스 비서는 헛소문을 퍼뜨려 류 현장을 곤혹스러운 상황으로 만들지요. 이미 풀려난 상황에서 스 비서가 류 현장에게 복수할 동인은 조금 부족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그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한 가지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국어판 ’레닌의 키스’에서는 짝수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 속의 모든 숫자는 홀수입니다. 심지어 책의 페이지 표기도 1, 3, 5, 7…의 홀수로만 기재되어 있고 2, 4, 6, 8…의 짝수는 없습니다. 짝수와 홀수가 중국의 민간에서는 숫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이자 상징이며 우언입니다. 동시에 이 소설 ’레닌의 키스’에서는 모든 사람의 성과 이름이 중국인들의 성씨를 이용하여 한자를 가르치는 고전 ’백가성(百家姓)’에 나오는 성과 이름이 아니라 전부 식물이나 나무, 동물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류잉췌(柳鹰雀)나 마오즈 할머니(茅枝婆)도 마찬가지입니다. 스 비서의 ‘스(石)’는 돌을 의미하고 류잉췌의 ‘류’는 버드나무이고 ‘잉췌’는 새를 의미합니다. 중국어 발음을 사용하면 한국어로는 체현하기 어렵겠지만 중국어에서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닙니다. 스 비서와 류 현장 사이의 갈등을 표현한 것은 사실 스 비서가 류 현장의 아내와 애매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애매한 남녀관계를 생각하면 스 비서와 류 현장의 갈등과 분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3) 류 현장의 차량 교통사고는 자의적인 선택이었을까요, 타의적인 운명이었을까요.


류현장의 자살은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의 운명에 더 나아갈 길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해야만 그는 서우훠 마을에 들어가 그 일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이게 천당이에요? 이게 사람들을 인민공사에 가입시키면서 말했던 그 천당이냔 말이에요!”(’레닌의 키스’ 424쪽)라는 주민들 항의는 인간의 이념이 인간을 구원하지도 해방시키지도 못한다는 은유로 들렸습니다. 위험한 발언일 수 있지만, 동의하시는지요. 인간이 만든 이념이 인간을 오히려 구속했고 핍박했음을 질타하고 확인하기 위해 글을 쓰셨다고 생각하기에 여쭙습니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이 문제는 확실히 ‘민감한’ 것 같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레닌의 키스’의 창작과 출판이 중국이 상대적으로 개방된 2003년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닌의 키스’는 중국에서 재판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독자들은 이 책을 살 수 없게 되었지요. 하지만 저는 한 순간도 중국의 개방에 대해 믿음을 잃었던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역사는 항상 또는 결국 앞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른바 민감함 때문에 글쓰기에서의 어떤 사유를 포기하거나 축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작가가 반드시 가져야 할 독특한 감수성과 독립된 사유를 포기한다면 정말로 순수한 ‘부호와 문자의 인간’이 되고 말 겁니다.


5. ’만터우’는 선생님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소설에 만터우가 등장하지요. ‘레닌의 키스’에서는 기사들이 1천 위안까지 만터우 가격을 높이지만 주민들은 값을 치르고서라도 만터우를 먹습니다. 만터우는, 다소 외람됩니다만, 선생님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여성 신체 일부로 은유되기도 합니다. 성적인 측면을 떠나서, 성욕과 식욕의 등가관계, 바꿔 말하자면, 극한과 절망에 놓인 인간의 태생적인 욕망의 상징적인 기호가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만터우의 의미를 직접 여쭙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 소설 속의 만터우가 은유이자 상징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만터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조건인 식(食)과 성(性)을 상징하지요. 이는 인류가 의존하여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인간에게는 살아가는 행위를 이어갈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제 작품을 아주 세심하게 읽고 체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6. 형식적인 측면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신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레닌의 키스’는 각주의 활용이 돋보였고 ‘사서(四書)’는 네 권의 책이라는 서사적 구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모든 소설 가운데 어떤 소설이 가장 형식적인 완성도가 높았다고 여기시는지요.


저는 ’일광유년(日光流年)’과 ’레닌의 키스’, ’사서’, ’해가 죽다(日熄)’의 구조와 서사가 대부분 만족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만족은 저의 문제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독자들의 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7. 이번 산문집 ‘침묵과 한숨’에서 ’어둠’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나는 어둠을 가장 잘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중략) 이리하여 나는 너무나 일찍 어둠을 이해하게 되었다. 캄캄한 어둠은 일종의 색깔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16~17쪽) 삶과 문학에서의 어둠 속에 거주하는 사람이 소설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문장입니다. 문학은 어둠과 관계되는 행위일까요.


모든 문학이 ‘어둠’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문학과 일부 작가의 글쓰기는 ‘어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생존과 생활의 좌표를 갖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중생, 평범한 백성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미천한 사람들도 전체 인류 가운데서는 ‘독특한 하나’입니다. 다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작가는 문학에서 자기 고유의 존재의 좌표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작가에게 자기 좌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문학의 바다에서 길을 잃게 되고 말거든요.


‘어둠을 느낀다’는 것은 남들에게 어떻게 쓰리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학의 좌표가 어디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루쉰이 스스로 인정했던 ‘국민성비판’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어둠을 느낌으로써 저는 자신을 인식하고 어떻게 수천수만의 작가들 가운데 ‘독특한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어둠은 빛을 제거한 상태의 존재가 아닙니다. 어둠도 빛을 발할 수 있고 어둠 때문에 빛이 더 밝아지고 뚜렷해지면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지요. 저는 ‘어둠’을 통해서 사람과 세계를 인식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했던 말을 반복하자면 저는 하늘이 인간과 세계의 어둠을 가장 잘 느끼도록 지정한 사람, 어둠 속에서 빛을 느끼는 작가라고 할 수 있지요.


8. 가벼운 질문으로 잠시 넘어가 보겠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소설을 쓰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또 어떤 방금까지(어제까지) 어떤 책을 읽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장편산문 ’그녀들(她们)’을 완성하여 출간했습니다. 저의 가족과 제 고향 대지에서 지난 백 년 동안 살아온 수십 명의 여성들에 관해 쓴 글입니다. 어쩌면 이 책은 ‘페미니즘’과 별로 관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여성’에 관한 논쟁이 비교적 많이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요. 이 책은 출간 이후로 줄곧 아주 잘 팔리고 있습니다. 이 외에 신작 장편소설 ’중국이야기(中国故事)’를 수정하고 있습니다.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2021년 초에는 독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으로는 20세기 초엽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의 ’특성 없는 남자’를 들 수 있겠네요. 우리의 글쓰기에 계시적인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는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길다는 게 흠이지만 말이에요. 중국어로 80만 자가 넘으니까요. 한국에도 이 책이 번역되어 있는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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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매년 반복되는 질문이고, 또 공허한 질문일 것도 같습니다. 노벨문학상이 문학적 성취의 바로미터 혹은 준거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유럽의 작은 나라가 세상의 모든 문학을 평가하는 자격을 획득하는지도 개인적으로 의문이긴 합니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그 상이 세계 독자들에게 주는 인상은 명백하게도 성취와 관련됩니다. 그런 점에서 질문 드리자면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데 그때마다 어떤 기분이 드시는지요. 또 올해 10월 수상자로 호명되면 가장 먼저 어떤 발언을 남기시겠습니까.


이 문제는 너무나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현대 세계에서, 세계의 갖가지 문학상이 이미 세계문학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는 모든 문학상의 수상자가 100퍼센트 정확한 기준과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문학의 복잡성과 매력이 다른 과학과 다르기 때문이지요. 문학상이 문학의 가치를 정확하게 측량하고 평가할 수 있다면 문학은 아주 단순하고 밋밋한 것이 되고 말 겁니다. 저로서는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정력을 글쓰기에 쏟아 부을 뿐입니다. 한 마디 꼭 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건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글쓰기에만 몰두해야 한다.’


10.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번 산문집 ‘침묵과 한숨’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문학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132쪽) 그럼에도 끊임없이 소설을 써 오셨습니다. 문학은 우리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신음하는 오늘날, 문학의 역할 혹은 소설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의 문학은 17세기, 18세기, 19세기의 문학과는 다릅니다. 문학은 이미 빠른 속도의 변화와 발전을 거쳐 20세기를 지났고 또 다시 빠른 변화와 발전을 거쳐 21세기에 도달해 있습니다. 문학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모든 기대는 희망의 대지 위를 흐르는 가는 물줄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로 날아가 은하가 되겠다는 꿈과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제가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제가 생명의 사랑에서 왔다는 것을 재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마음속에 아직 사랑이 있다는 것을 체현하는 것이 제 글쓰기의 목적입니다. 이러한 글쓰기의 의의는 독자들에게 사랑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역병에 제압된 오늘이나 그 이후의 미래에도 저는 문학이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작가의 생명 속에서 꺼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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