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조건 없는 사랑`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교수
"한국정치, 진영 떠나 극단으로… 우리끼리 갈등할 여유 없어"
최근 김포시 홍보대사가 된 인요한 교수는 "김포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굉장히 복 받은 위치로, 개화기 때는 선교사들이 꼭 김포의 나루터를 들러서 갔다"며 "장래에 남북관계가 풀리면 김포가 미래지향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활발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포시 제공 |
복도 멀리서부터 통화를 끊지 않고 그는 나타났다. 출입문에 닿을 듯 큰 키의 노신사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다른 한 손으로 악수를 먼저 건네며 양해를 구했다. 잠시 후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전화 상대방에게 "네네. 그러니까 제가 김영란법을 위반하고 도와드리면 된다는 거죠?"라고 조크를 던졌다. 통화가 끝난 뒤 명함을 주고받는 것도 잊고 서로 한참을 웃었다.
희생과 헌신, 신념과 의지. 인요한(63)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 교수는 128년째 한국에서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정확히는 그의 가문이 외증조부로부터 이어져 온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4대째 한국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인 교수의 남도사투리는 언론을 통해 익히 알려졌지만, 그 구수한 억양 속에는 가문의 역사와 한국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인 교수는 자신을 '받은 게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기에 사회에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늘 잊지 않았다고 했다. 인 교수는 "우리 조상은 한국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인요한은 의대 진학부터 해서 32년째 국제진료소 소장으로 일하고 특별귀화도 하는 등 한국에 준 것보다 받은 게 많다"고 말했다.
휴 린튼·로이스 린튼과 여섯 자녀가 함께 한 가족사진.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가 인요한 교수다. /인요한 교수 제공 |
국내지형 맞춘 개조 차량… 한국구급차 모태5·18민주화운동 현장 통역… 추방명령 받아
정책자문위원장 활동 국가보훈처 격상 기여
김병수 시장 지리산 인연… 김포 홍보대사로
본인은 시종일관 자세를 낮췄으나 인 교수는 대한민국 근대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평범하지 않은 발자국을 남겼다.
대표적인 게 한국형 구급차 개발이다. 당시의 구급차는 장비를 못 실을 만큼 비좁아 단순히 환자 운송 기능만 하고 있었다. 지난 1992년 인 교수는 골목길과 오르막길이 많은 국내 지형에 맞춰 승합차를 개조, 이동 중에도 응급처치가 가능한 전문구급차를 제작해 전남 순천소방서에 기증했는데 이는 현 소방구급차의 모태가 돼 수많은 인명을 살렸다.
인 교수는 "1984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을 때 이송할 차량이 없어 택시로 순천에서 광주로 이동하던 중 뒷좌석에서 돌아가셨다"며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드리고 상심이 컸는데 훗날 아버지 친구분들이 기부해주신 돈으로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이보다 앞서 의대 재학시절에는 신분을 숨기고 5·18민주화운동 현장 한가운데서 통역을 했다.
인 교수는 "의예과 1학년 때 휴교령이 떨어지고 공수부대가 연세대학교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수업은커녕 도서관도 갈 수가 없었다"며 "짐을 싸서 순천에 내려왔는데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더라.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신분을 속이고 5월 25일에 검문소 7개를 뚫고 광주에 들어갔다"고 상황을 묘사했다.
이어 "광주에서 만난 젊은 뉴스위크 기자가 통역을 제안하기에 '못 할 게 없다'고 하고 전남도청 3층에서 광주항쟁 기자회견 통역을 하게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정권의 미움을 산 의대생 인요한에게는 이후 미행이 붙었다. 인 교수는 "미 대사관에서 호출해 가봤더니 한국정부에서 나를 데모 주동자로 지목했더라. 추방명령까지 받았는데 출국 안 하고 버텼다"고 회상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 당시 인요한 교수. /인요한 교수 제공 |
인 교수는 동교동을 여러 차례 드나들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치료한 인연이 있다.
인 교수는 "나중에 그를 독대한 자리에서 왜 (과거 정권 관계자들에게)보복을 안 하는지 물었더니 내게 '보복은 못 쓰는 것이여'라고 했다. 자기를 죽이려 한 사람들을 포용한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며 "지금 우리는 외국과의 경쟁이 시급하고 생존이 급하다. 언젠가부터 한국 정치가 진영을 떠나 정도를 걷지 않고 극단으로 가고 있다. 우리끼리 이렇게 갈등할 여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인 교수는 북한의 결핵 퇴치에도 힘을 쏟았다. 국가보훈처 정책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는 보훈처의 보훈부 격상 추진에 보이지 않게 기여했다.
인 교수는 "핵과 미사일 만드는 북한 정권은 미워해도 북한 사람들은 미워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며 "나이가 들어가며 내 생각도 보수적으로 변했지만 그런 부분에서는 진취적이다. 한국에 와있는 북한 이탈주민이나 중국 교포들의 말이 북한에 전해지면 주민들의 민심을 녹일 수 있지 않겠나. 나는 다문화가 통일연습이라고도 생각한다. 한국의 미래를 논하려면 결국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 교수 집안의 한국사랑은 이제 4대를 지나 5대로 넘어가고 있다. 외증조부 유진 벨 선교사는 1895년 전라도 남부지방으로 건너와 일제의 억압에 고통받던 조선사람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했다. 유진 벨은 선교 도중 부인과 아들을 잃기도 했으나 평생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과 할머니 샬롯 벨(유진 벨의 딸)은 전주와 군산 일대에서 교육·의료사업에 투신했다. 특히 윌리엄 린튼은 백범 김구 선생의 주치의 역할도 하고 3·1운동을 돕기도 했다.
인 교수는 "제이슨 서(독립운동가 서재필)와도 친분이 있던 외증조부는 광주·전남지역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 제중병원(광주 최초의 병원) 등을 설립했다"며 "할아버지는 조지아공대를 수석 졸업하고 1912년에 군산에 왔는데 몇 년 후 3·1운동을 목격하고 미국 교계 특사로 평신도회의에 참석해 '비폭력으로 저항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했다'는 내용의 보고도 하고 신문에 기고도 했다"고 설명했다.
호남지역에서 봉사한 선교사였던 아버지 휴 린튼은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장교로 복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고, 어머니 로이스 린튼은 순천기독재활원과 요양원을 설립해 결핵 치료와 선교에 헌신했다. 인 교수의 형 스티브 린튼은 1995년 북한 어린이들에게 의약품을 보내는 유진벨재단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전주 예수병원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인 교수는 지난 2012년 한국사회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특별귀화 1호로 한국인이 됐다. 외국인 환자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연세대 국제진료소 소장과 천리포수목원 이사장을 겸직하며 사회에 이로운 기운을 퍼뜨리고 있는 인 교수는 최근 김포시 홍보대사가 됐다.
고향에서 열리는 순천만정원박람회 홍보대사 외에 특정 지자체의 홍보를 맡은 건 처음이다. 1990년대 중반, 지리산 해발 1천200m 고지에서 시작된 김병수 김포시장과의 인연으로 그는 김포시 측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인 교수는 "천리포수목원을 일군 민병갈 박사에게 아버지가 투자 좀 해 달라고 1만달러를 맡겼고 민 박사가 그 돈을 불린 덕분에 우리 6남매가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며 "천리포수목원에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1만7천종 수목이 있는데 김포시 공무원들을 데리고 가서 협력할 방법을 찾아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꾸밈없이 소탈하게 이야기를 풀던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며 마지막 조크로 좌중을 웃게 했다.
"어머니가 내 바로 위 형을 낳고 하혈이 심해서 의사가 그만 낳으라 하니까 울었다고 해요. 그땐 의사 권위의 시대였거든. 외과 실수로 나팔관이 제대로 묶이지 않아 내가 생겼다고 들었는데 나오지 말아야 할 사람이 나온 건지 꼭 나와야 할 사람이 나온 건지 모르겠어."
인터뷰를 끝내고 김포시청사 앞에서 촬영에 응한 인요한 교수. /김포시 제공 |
글/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
■인요한 교수는?
▲1959년 전북 전주 출생
▲2012년 대한민국 특별귀화
▲연세대학교 의학과 학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생리학 석사·박사
▲연세대의료원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 소장
▲연세대의료원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실 교수
▲재단법인 로이스기독재활원 이사장
▲천리포수목원 이사장
▲국가보훈처 정책자문위원장
▲전 유진벨재단 이사장
▲전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