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베토벤’ 황현 작곡가 “내 감성의 뿌리는…”
쿠키인터뷰
‘황토벤’ ‘황차르트’ ‘황버지’ ‘수록곡 맛집’…. 프로듀서 황현을 향한 K팝 팬들의 찬사다. 그룹 온앤오프를 데뷔 때부터 전담으로 프로듀싱해 팬들에게 ‘황버지’(황현+아버지)라고 불리던 그는 지난 6월 종영한 Mnet ‘로드 투 킹덤’에서 개성 강한 편곡으로 화제를 모으며 ‘K팝의 베토벤은 황현이고 베토벤이 독일의 황현이다’라는 밈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한양대에서 작곡을 전공한 그는 대학교 3학년 때 가수 정재형의 어시스턴트로 일한 것을 계기로 대중음악계에 발을 들였다. 가요 스트링 편곡을 아르바이트로 병행하다가 차츰 대중음악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고, 이후 그룹 동방신기·소녀시대·샤이니·레드벨벳 등 인기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만들었다. 온앤오프의 프로듀싱을 맡은 지도 벌써 4년째다. 작곡가, 프로듀서, 회사 대표, 제작자로 겸업하며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그를 최근 서울 압구정로79길 모노트리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Q. 작곡가님을 ‘로드 투 킹덤’의 비밀 병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경연은 어땠나요?
“저한테도 도전이었어요. 이번처럼 편곡만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순위를 겨루는 프로그램이라 저도 전투력을 좀 더 불태웠죠.(웃음)”
Q. 특히 ‘잇츠 레이닝’(It’s Raining)을 편곡하며 온앤오프의 ‘컴플리트’(Complete)를 매시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곡이 자연스럽게 붙겠다 싶었어요. 경연 무대까지 시간이 부족해서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다행이네요. 대면식 때 온앤오프의 노래를 메들리로 엮는 게 (매시업의) 시작이었어요. ‘에브리바디’(Everybody) 무대에선 온앤오프의 구호 ‘라이트 온’(Light on)을 넣으면서 슬슬 재미를 붙였죠. ‘더 사랑하게 될 거야’ 땐 ‘모스코 모스코’(Moscow Moscow)를 붙이기도 했고요.”
Q. ‘로드 투 킹덤’의 영향인지, 지난달에 나온 온앤오프의 새 음반도 역대 가장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해왔던 것들에 대한 성적표를 받는 느낌이에요. 아쉬운 면도 물론 있지만, 그래도 ‘로드 투 킹덤’에서 열심히 한 보람이 있다, 싶어요.”
▲ 그룹 온앤오프 |
Q. 개인적으로 그동안 온앤오프의 노래를 들으면 소년의 이미지가 떠오르곤 했는데, 이번 타이틀곡 ‘스쿰빗 스위밍’에선 주인공이 성숙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랑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여유롭게 느껴졌다고 할까요.
“자연스러운 변화인 것 같아요. 사실 ‘스쿰빗 스위밍’이 소화하기 굉장히 힘든 노래거든요. 그루브를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이런 비트에서 안무를 추기도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동안 쌓아온 실력이 뒷받침돼야만 하는 곡이었어요.”
Q. 멤버들은 이번 음반을 온앤오프 세계관의 번외편이라고 표현하던데, 이런 변화가 곡 작업에도 영향을 줬나요?
“‘스핀오프’(번외)가 제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작업하는 게 훨씬 쉽고 재밌긴 했어요. 가령 이번 음반에 실린 ‘첫 키스의 법칙’은 온앤오프가 예전에 발표했던 ‘첫사랑의 법칙’의 스핀오프로 생각할 수 있겠죠. 이 정도 나이와 연차가 찬 아이돌 그룹이 첫 키스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게 일견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스핀오프 음반에선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제페토’라는 노래나 ‘벨 에포크’라는 부제도 스핀오프 음반이기에 더욱 재밌게 해석될 여지가 있겠더라고요.”
Q. 노래의 제목을 정할 때 부르는 사람의 나이와 연차도 고려한다는 것 역시 흥미롭게 들립니다.
“제 성향일 수 있는데요. 저는 그런 게 재밌더라고요. 최근엔 노래 가사에 ‘그녀’처럼 성별을 나타내는 대명사를 많이 쓰지 않으려고 해요. 듣는 사람이 훨씬 다양하게 노래를 해석할 수 있잖아요. 노래나 음반에 ‘떡밥’을 뿌리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에요. 팬들만 알아볼 수 있는 작은 장치들요. 백화점식으로 음반을 구성하기보단, 이런 장치들을 심어놔야 전담 프로듀싱의 의미도 있는 것 같고요.”
Q. 작곡가님의 노래는 타이틀곡이 아니더라도 완성도가 워낙 뛰어나 ‘숨은 명곡’으로 자주 회자되곤 합니다. 함께 작업한 가수에게서 빤하지 않은, 새로운 매력을 발굴해내는 데 일가견이 있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SM엔터테인먼트의 영향이 커요. 제가 초창기에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의 노래를 많이 썼는데, 저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성을 굉장히 좋아해 주셨어요. ‘요즘 이런 음악이 유행하니까 비슷한 걸 하면 좋아하지 않을까’가 아니라, 남들이 못하는 걸 해야 (작곡가로서) 나의 생명력이 유지된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고요.”
Q. 그렇지 않아도 작곡가님의 음악에는 기존 K팝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는 평가가 자주 나옵니다. 작곡가님은 그 ‘다름’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시나요?
“결국 감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감성을 만드는 건 경험이겠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윤상 형이나, 김동률·정재형·유희열 형의 음악을 들으며 감성의 자양분을 얻었어요. 한때 비주얼 록에 빠져 있던 것이나 대학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것도 아이돌 음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 것 같고요. 글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알렝 드 보통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형도의 시를 좋아하는데, 공통적으로 마냥 밝지만은 않다는 특징이 있죠. 저도 거기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Q. 뮤즈라고 할까요. 창작욕을 자극하는 사람을 만난 적도 있나요?
“우선 정승환의 목소리가 그랬고요. 친한 동생이기도 한 범주와 정말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어요. 저한텐 범주가 프로듀싱 선생님과 다름없어요. 콕 집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범주가 없었으면 온앤오프의 음반들을 프로듀싱 하는 과정에서 고난이 많았을 거예요. 이번에 세븐틴의 ‘좋겠다’를 범주·우지와 함께 만들었는데, 같이 작업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Q. 지난 10여년 간 송캠프를 통한 해외 작곡가들과의 작업도 활발해졌습니다. 초창기와 비교하면 지금 해외 작곡가들과의 협업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예전엔 (해외 작곡가들과 만든 곡이) 일종의 레퍼런스 같은 느낌도 있었어요. 완성형의 해답지랄까요. ‘저런 노래 같은 곡, 저런 사운드와 비슷한 소리를 내보자’라는 느낌이 컸죠. 하지만 이젠 K팝이 오롯이 독립적인 장르가 돼 혼자만의 길을 개척해가고 있어요. 오히려 해외 작가들이 K팝을 더욱 잘 알아서 ‘여기에서 터져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하고요.(웃음) 부담이 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요. 우린 선진국에 대한 환상이 있는 세대잖아요. 그런데 방탄소년단의 성공 사례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잘못된 게 아니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죠.”
Q. 2014년 작곡가 지하이(G-high), 이주형과 모노트리를 설립해 현재 대표로 재직 중이십니다. 처음엔 친한 작곡가들이 뭉친 크루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규모가 제법 큰 회사로 성장했어요.
“창작가들에게도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일본의 작가 사무소 소속으로 꽤 오래 있었거든요. 일종의 에이전시였던 거죠. ‘어떤 가수가 이런 스타일의 노래를 찾고 있다’고 소개해주는…. 그걸 경험해보니 시스템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어요. 기존의 도제식 문화가 정말 싫기도 했고요.”
Q. 창작자들에게 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나요?
“좋은 시스템은 결국 인간을 위한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엔 작곡가들이 히트곡을 빵!빵!빵! 내고 사라졌거든요. 저는 그게 무서웠어요. 시스템이 있어야 음악을 오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처음 업계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작곡가가 곡만 쓰는 게 아니라 비즈니스도 해야 했어요. 그런데 그게 굉장히 고되거든요. 반면 비즈니스를 회사가 해주면, 창작자들은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돼요. 후배들에게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Q. 회사에 소속돼 일을 하면 안정감도 클 것 같습니다. 창작자들은 대부분 프리랜서로 일하잖아요.
“맞아요. 저작권이라는 게, 이번 달에 1000만원이 들어와도 다음 달에 10만원이 들어올까 말까거든요. 수입이 불안정하면 삶의 사이클이 망가지고, 심신이 건강하지 못한 상황이 되면 음악도 망가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제가 쓴 곡이 엄청나게 히트해도 목돈을 한 번에 받지 못해요. 여러 번 쪼개서 받고 있죠. 목돈을 받는 건 물론 좋지만, 그것으로 수명을 단축시키고 싶진 않았어요.”
Q. 유튜브에 모노트리 채널도 개설하신 것으로 압니다. 연예인이 아닌, 창작자가 주인공이 되는 콘텐츠가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저와 지하이 형이 술자리에서 만담 비슷한 걸 많이 해요. 주변에서 재밌어하면서 그걸 방송에서 해보라고 한 게 유튜브의 시초였죠. 정말 만담을 할 순 없으니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만들어보자 싶었어요. [뒤풀이] 콘텐츠는 일종의 해설이에요. 미술은 예전부터 해설이 많았잖아요. 학교에서도 문학 시간에 작품을 해석하는 법을 배웠고요. 그런데 음악 소개는 음원사이트에 나온 몇 줄이 다예요. 그래서 아티스트 이미지에 손상이 없고 회사에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은 이야기해주자며 시작했어요.”
Q. 창작자의 수명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시는 것처럼 느껴져요. 오랫동안 음악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태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도 스스로 고갈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때가 있어요. ‘내가 예전엔 곡을 어떻게 썼지?’하며 백지장 위에 놓인 기분이 들 때도 있고요. 그럼에도 이 일을 오래 하려면, 결국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재밌어해야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음악이 좋고, K팝 문화가 좋고, 뮤직비디오를 보는 게 좋거든요. 그냥 이렇게, 이 파도 위에 계속 같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 wild37@kukinews.com / 사진=박태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