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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엔 안 봤으면 하는 순간들

“자자, 선수입장하시고~!” 이 대사에 흠칫하는 당신. ‘아버지’라는 단어에 가족보다 배우 황정민을 먼저 떠올리는 당신. 오디션 프로그램 속 ‘악마의 편집’이 눈에 훤하고, 이경영의 얼굴만 봐도 “진행시켜”를 읊조리는 당신. 혹시 내가 K-고인물이 아닐까 고민하게 된다면, 괜찮다. 이건 당신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고 시대 변화에 둔감한 제작자의 문제니까. 새해를 맞아 쿠키뉴스 대중문화팀 기자들이 싫어도 올해 또 보게 될 것 같은 대중문화 속 관습들을 꼽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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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예능 ‘아내의 맛’에서 다른 출연자에게 “뒷모습 보고 맞은 적 없어요?”라고 말하는 코미디언 박명수. TV조선 캡처

놀려서 얻는 웃음, 최선입니까

폭력적이거나 가학적인 개그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지만, 타인을 놀리고 조롱하며 웃음을 유발하려 하는 것은 예능 프로그램 안에 관습처럼 남아 있다. 출연자를 향한 무례나 조롱은 때때로 “예능이라서 괜찮다”고 포장된다. 이것을 지적하면 “웃자고 보는 예능에 죽자고 달려든다”라고 맞서는 시선도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예능은 “웃자고”하는 방송이다. 그렇기 때문에 웃음의 시작점을 더욱 섬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타인, 특히 약자를 희화화하거나 질타해서 얻어낸 웃음이 브라운관에서 아무렇지 않게 여겨진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도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괜찮다’고 여길 가능성이 커진다. 웃기기 위해서는 뭐든 괜찮다는 결과론적인 사고보다, 무해하고 건강한 웃음을 시청자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해야 할 시기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놀리거나 타인에게 도에 넘는 말을 해서 누군가를 웃기는 것은 쉬운 일이겠지만, 그것이 지금과 다음 세대가 원하는 웃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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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드라마 ‘시그널’ 14회에서 장영철(손현주)이 김범주(장현성)에게 “쓸모 없어진 사냥개”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 tvN 캡처

‘주인을 문 개’는 지겨워요

“주인을 문 개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 시청자와 관객은 이미 알고 있다. 너무나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이 같은 대사를 들어왔고, 이후의 전개를 봤기 때문이다. 자신을 주인에 비유한 인물이 개에 비유된 인물을 위기에 빠트릴 테지만, 이 대사를 들은 사람은 “저는 더이상 의원님(혹은 회장님)의 개가 아닙니다” 류의 대사를 남기며 그 곤경을 빠져나올 것이다. 모두가 다 아는 이 사실을 드라마나 영화 제작진만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는 것 같기도 하다. 보편적인 정서를 추구하는 대중문화 미디어의 특성상 어디선가 본 듯한 비슷한 대사나 장면이 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특성이 안일한 태도의 창작과 구태의연한 창작물의 핑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대사를 빈자리에 복사하고 붙여넣기 하듯 써도 된다는 의미도 아닐 것이다. 창작자와 제작진은 조금이라도 더 참신한 표현을 찾아 시청자에게 새로운 재미를 줘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게 어렵다면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사람과 사람을 주인과 개에 비유해야 하는 서사 말고도 해야 할 이야기는 여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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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더 킹-영원의 군주’ 8회에서 커피를 맛보고 놀라는 이곤(이민호). SBS 캡처

광고, 선 넘지 마라

지난해 6월 종영한 SBS ‘더 킹-영원의 군주’는 ‘더 킹-PPL의 군주’로 불렸다. 드라마 속 과도한 PPL를 본 시청자들이 이를 비꼬며 붙인 제목이다. ‘더 킹’은 평행세계를 넘나드는 주인공이 대한민국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맛보고 “황실 커피랑 맛이 똑같군”이라고 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화장품과 김치, 치킨 브랜드 등이 드라마 대사에 꾸준히 등장했다. ‘드라마를 보는 건지, 광고를 보는 건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나왔다. 현재 방송 중인 tvN ‘철인왕후’엔 중국 기업 PPL이 계속 등장해 ‘중국 드라마 같다’는 반응을 얻었다. 예능도 다르지 않다. 한 브랜드의 라면을 계속 먹은 tvN ‘라끼남’을 비롯해 KBS2 ‘신상출시 편스토랑’, TV조선 ‘미스터트롯’이 과도한 PPL로 방심위의 법정 제재를 받았다. 과거와 달리 요즘 시청자들은 방송 프로그램에 PPL이 필수적이란 걸 알고 있다. 다만 같은 PPL도 풀어내는 방법에 따라 불편하지 않게 녹일 수 있다. MBC ‘놀면 뭐하니’는 이건 광고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준 다음 대놓고 보여주는 ‘앞광고’ 전략으로 호응을 얻었다. 이젠 PPL을 대하는 태도에서 제작진이 시청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읽히는 시대다. 적당히 하자. 다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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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펜트하우스' 2회에서 학생들에 의해 차에 갇힌 민설아(조수민). SBS 캡처

폭력은 이제 그만

중학생들이 신분을 속인 과외교사를 납치해 차에 가둔다. 괴로워하는 모습에 샴페인을 뿌리며 즐거워하고 그 모습을 영상으로 찍는다. 가해 학생의 아버지는 과외교사를 발로 짓밟으며 “근본도 없는 고아”라고 말한다. 평일 오후 10시에 방송된 ‘15세 이상 시청가’ 드라마인 SBS ‘펜트하우스’의 한 장면이다. 지난해 5월 종영한 JTBC ‘부부의 세계’에선 여성 주인공의 집에 침입한 괴한이 피해자를 폭행하는 장면을 가해자 입장에서 묘사하기도 했다. 이 역시 ‘15세 이상 시청가’로 방송된 회차였다. 두 드라마 모두 3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한 지난해 최고 흥행 드라마였다. 폭력적인 장면을 일부러 더 자극적으로 연출한 드라마들이 2020년 전파를 탔다. 이는 드라마를 더 재밌게 하려다가 생긴 실수나 실제 일어날 법한 일을 충실히 그리다 받은 오해가 아니다. 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감수성 부족, 여성을 비롯한 약자를 향한 혐오가 있어 가능한 장면들이다. 이밖에 별다른 고민 없이 폭력을 전시한 장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혹시 아직도 자극적인 묘사가 있어야 시청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제작진이 있다면, 새해엔 부디 일하지 말고 편히 쉬시길.


인세현, 이준범 기자 = inout@kukinews.com/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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