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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누드·카메라···그녀를 담았던, 그녀가 그렸던

김창길의 사진공책

혁명·누드·카메라···그녀를 담았던,

까미유 끌로델, 1883.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들이다.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웨스턴과 티나 모도티. 스승과 제자로 만나 연인이 됐으며,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반자들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들의 평가는 동등하지 않았다. 적어놓은 이름의 순서처럼 후자의 여성들은 살아생전 자신들의 연인이었던 남성들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된 예술성을 평가받지 못했다. 세 명 모두가 기구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점도 안타깝다. 카미유 클로델은 정신병원에서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고, 교통사고 후유증을 앓던 프리다 칼로는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티나 모도티는 혼자 택시를 타고 가다 심장마비로 숨졌다.

혁명·누드·카메라···그녀를 담았던,

청년 공산주의자 연합 로고. 왼쪽부터 훌리오 안토니아 멜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체 게바라. 쿠바 아바나 벽화. 2009. ⓒ Marcel

1929년 1월 멕시코시티 한복판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38구경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쿠바 망명객의 왼팔을 관통하고, 나머지 한 발은 오른쪽 폐를 파열시켰다.


“모두들 잘 들어. 쿠바 정부가 날 죽이라고 한 거야!”


암살범의 표적은 훌리오 안토니오 멜라의 심장. 고국의 민주화를 꿈꾸며 쿠바 공산당을 조직했던 그는 스물다섯 살의 잘생긴 법학도였다. 체 게바라 이전에 라틴 아메리카 혁명의 아이콘이었던 멜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은 그의 연인이었다. 멕시코 경찰은 혁명가의 연인을 추궁했다. 처음에는 범인으로 지목했고, 증거가 부족하자 암살극을 치정극으로 몰아갔다. 냄새를 맡은 멕시코 언론은 경찰의 혐의에 바탕을 둔 소설을 썼다. 에로틱한 그녀의 누드 사진들은 삽화로 첨부됐다.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웨스턴이 찍은 티나 모도티의 사진들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뮤즈라고도 했고, 모델 또는 아주 아름답고 관능적인 할리우드 스타라고도 했으며, 아주 민감하고 창조적인 예술가,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운 불굴의 투사, 피도 눈물도 없는 스탈린 시대의 스파이라고도 했다.”(마거릿 훅스, <티나 모도티>, 해냄, 8쪽)

혁명·누드·카메라···그녀를 담았던,

하얀 붓꽃, 티나 모도티 (The white Iris ‘Tina Modotti’) 1921. ⓒ Edward Weston / 퍼블릭 도메인

티나 모도티는 에드워드 웨스턴에게 사진적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뮤즈였다. 사진 고유의 형식미를 구축했던 웨스턴은 사진가로서는 최초로 구겐하임 재단 상을 받은 미국 근대사진의 대표 주자다. 관능적인 누드처럼 보이는 ‘피망(Pimiento no.30, 1930)’ 사진은 그의 독특한 형식미가 돋보이는 대표적인 작품. 지금도 회자되는 상당한 누드 사진들을 남겨놓은 에드워드 웨스턴이 몸과 마음으로 교감했던 모델이자 연인이 바로 모도티였다.


모도티와 웨스턴은 1923년 멕시코행 증기선에 올랐다. 둘 사이에는 한 가지 약속이 있었다. 웨스턴의 모델에 대한 대가로 모도티는 사진술을 배우기로 했다. 웨스턴의 아들 챈들러도 동행했다. 부둣가에 배웅 나온 웨스턴의 부인 플로러는 모도티에게 부탁했다. “내 아들을 잘 부탁해요!” 사진작가와 그의 아들, 그리고 작가의 연인이라는 조합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하지만 둘의 연인관계는 지속됐다. 모도티의 누드 사진들에 찍혀 있는 날짜는 그녀가 멕시코에서도 웨스턴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린 감시자였던 웨스턴의 아들 챈들러의 머릿속에도 아버지와 모도티의 에로틱한 장면들이 남아 있다.


어색한 세 식구의 멕시코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웨스턴의 스튜디오가 경영난에 빠졌지만, 그의 파트너는 스튜디오 바깥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순수 예술만 고집했던 웨스턴은 정치적인 인물들과 어울리는 파트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국에 남겨둔 세 자식들도 그리웠을 것이다. 멕시코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겨울, 웨스턴은 아들 챈들러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웨스턴은 일기장에 적었다. “이제 멕시코에서 내 시간은 끝났으며, 티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혁명·누드·카메라···그녀를 담았던,

혁명군을 이끌고 있는 판초 비야. 1913. 작자미상 / 퍼블릭 도메인

유럽을 배회하던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러시아에 이어 멕시코에도 도착했다.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흥겹게 울려 퍼지던 혁명 민요가 라쿠카라차. 독재자 디아스를 쫓나낸 혁명이 지나간 1920년대의 멕시코는 바퀴벌레(‘쿠카라차’는 바퀴벌레를 뜻하는 스페인어) 대신 유령들이 몰려들었다. 국제연합 코민테른의 인사들과 혁명을 꿈꾸는 사상가와 예술가들. 고국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를 증오했던 티나 모도티에게 멕시코로 몰려든 유령들은 동지였다. 모도티의 집은 유령의 집이 됐다.


거구의 공산당원 한 명이 유령의 집 문을 두드렸다. 멕시코 벽화 르네상스의 선봉자 디에고 리베라였다. 혁명은 예술도 변화시켰다. 화랑과 미술관에 갇혀 있던 예술이 거리로 나와 담벼락에 구현됐다. 멕시코 혁명정부는 대중 계몽을 위한 공공미술인 벽화 르네상스를 지원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유령의 집 주인 티나 모도티의 모습도 벽화에 남겼다. 1928년 교육부 청사에 그려진 벽화 ‘병기고’에는 붉은 상의를 입은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오른쪽의 붉은 여인은 쿠바 혁명가 멜라에게 탄띠를 건네고 있다. 혁명가의 연인 티나 모도티다. 벽화 중심에는 화가의 연인이 등장한다. 티나 모도티가 선물한 공산당 배지를 단 프리다 칼로의 모습이다. 칼로는 혁명군에게 소총을 지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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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였던 아버지가 찍은 프리다 칼로 1932. ⓒ Guillermo Kahlo / 퍼블릭 도메인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만남은 티나 모도티 집에서 이루어졌다. 21살의 칼로는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리베라에게 다가갔다. 중년의 리베라도 짙은 눈썹의 당돌한 처녀에게 빠져들었다. 칼로의 부모는 이들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21년이라는 나이 차이는 물론 커플의 외모도 너무 상반됐다. 1929년 코요아칸에서 열린 결혼식을 지켜본 부모는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혼’이라며 아쉬워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결혼이었지만 칼로에게 그녀의 선택을 미치도록 후회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리베라가 칼로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웠던 것. 그녀의 분노는 그림으로 표현됐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을 칼로 찌르는 남성을 그린 ‘몇 번 찔렀을 뿐’(1935)이라는 그림이다. 칼로는 당시 일어났던 살인사건의 신문 기사를 읽고 그림을 그렸다. 신문은 법정에 선 살인자의 말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된다고요.”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칼로의 생이 끝날 때까지 지속됐다. 칼로의 ‘평생 소원은 단 세 가지, 리베라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었다.


행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칼로의 두 가지 소원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혁명가가 되는 꿈에는 칼로의 몸이 허락하지 않았다. 18세 때 당한 교통사고를 그녀는 ‘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사건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칼로는 좌절하지 않았다. 상체를 지탱할 수 있는 척추를 대신해 코르셋을 착용하고 잘려나간 오른쪽 다리에는 의족을 끼워 넣고 일어섰다. 그리고 붓을 들었다. 그림의 세계로 접어든 그녀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은 리베라였다. 비록 바람둥이였지만 리베라와 짧았던 한평생을 살았던 것은 그가 바로 칼로의 예술적 스승이자 동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칼로가 그린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1943)에는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은 그녀의 이마에 리베라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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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우안테펙 여성 (Woman from Tehuantepec) 1929. ⓒ Tina Modotti / 퍼블릭 도메인

테우아나 복장을 한 원주민 여성의 눈빛이 당당하다. 흑백이지만 그녀가 입은 전통의상의 무늬는 화려하다. 동그란 귀걸이와 커다란 목걸이도 그녀의 꼿꼿한 품위를 더해준다. 머리에 이고 있는 호박도 평범하지 않다. 미술작품같이 다양한 꽃과 잎사귀들이 그려진 커다란 호박을 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이색적인 패션쇼 무대에 오른 모델을 떠오르게 만든다. 1929년 티나 모도티가 찍은 ‘테우안테펙 여성’이다. 멕시코 남부지방 테우안테펙은 모계사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모도티의 렌즈는 원주민들의 여성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항아리를 이고 가는 여인, 아기를 안고 있는 한 여성의 튼튼한 팔, 빨래하는 손…. 에드워드 웨스턴의 스튜디오에 갇혀 있던 모도티의 시선은 바깥으로 향했다. 초점의 이동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하나의 신념이 생겼다.


멕시코 공산당 기관지 ‘엘 마체테’ 사무실에서 훌리오 안토니오 멜라가 쓰던 타자기에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영감’ ‘예술’ ‘통합’ ‘그 사이에 존재하는’.


1928년 모도티는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멜라의 타자기’를 사진 찍었다. 프레임 바깥의 단어들을 조합해 완성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완성된다.


“기술이 ‘예술’ 작품을 위한 보다 강력한 ‘영감’이 될 것이다. 기술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고도의 ‘통합’ 속에서 해결될 것이다.” (사라 마거릿 로위, <티나 모도티의 비전>, 1996)


러시아 일국의 공산주의가 아닌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호소했던 레온 트로츠키의 생각을 멜라가 타자기로 기록했다. 모도티가 트로츠키를 추종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카메라 렌즈가 스튜디오를 벗어나 멕시코 민중의 삶을 기록했던 시점은 그녀가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했던 때와 일치한다. 모도티의 전기를 쓴 마거릿 훅스는 그녀의 사진이 스트레이트 포토로 바뀐 것은 멜라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트로츠키의 문장에서 ‘기술’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쓴 독일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에게 사진술을 의미했고, 모도티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른 생산수단과 달리 카메라 기술은 프롤레타리아를 소외시키지 않고 그들을 위한 혁명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벤야민은 기대했다.


글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티나 모도티 역시 사진술과 자연의 관계를 고민했을 것이다. 혁명 사상을 어떻게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장미, 백합, 유리잔 등 정물사진을 찍던 그녀의 카메라는 상징성이 강한 정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멕시코 농민을 떠올리게 하는 옥수수와 기타, 솜브레로 위에 얹어 놓은 낫과 망치는 구소련의 붉은 깃발처럼 멕시코 혁명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정물이 아닌 사회의 움직임도 포착했다. 집회 참가자들이 쓴 멕시코 전통모자 솜브레로의 행렬, 사탕수수를 자르던 농민들의 칼을 뜻하는 ‘엘 마체테’ 신문을 읽는 시민들, 혁명기를 들고 가는 여성…. 사물의 질감을 오롯이 잡아내는 사진의 물질성은 에드워드 웨스턴에게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과감한 하이 앵글과 역동적인 사선 구도는 사진 스승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도티의 안목이었다.


혁명을 향한 모도티의 사진작업은 지속되지 못했다. 비록 혐의를 벗어났지만 멜라의 암살에 대한 풍문은 모도티를 계속 괴롭혔다. 혁명의 흐름도 바뀌고 있었다. 공산주의 본국, 러시아는 스탈린 시대가 됐다. 트로츠키를 쫓아낸 스탈린 추종자들이 트로츠키 사상에 동조한 훌리오 안토니오 멜라를 암살했다는 추측도 있다. 그와 연인 관계였던 모도티도 감시 대상이었다. ‘멜라의 타자기’ 사진은 의혹을 살 만했다. 러시아 본국으로 입성한 모도티에게 스탈린 추종자들은 당의 공식 사진가로 일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모도티는 거절했다. 스탈린 정부가 표방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거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카메라를 러시아에 남겨놓고 다시 멕시코로 돌아간 그녀는 다시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혁명·누드·카메라···그녀를 담았던,

무성영화 ‘호랑이 코트’에 주연 출연한 티나 모도티. 1920. / 퍼블릭 도메인

티나 모도티와 사진들과 삶을 관찰했던 2주 동안 나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고 싶었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누드 사진의 피사체였던 여성이 카메라를 들고 사회 이면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쓰기에는 모도티의 삶과 사진은 다양했다. 영화배우, 누드모델, 사진가, 공산주의 활동가…. 혁명의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서 모도티는 여러 개의 가면이 필요했다. 그래도 대표적인 가면을 선택해보라고 누군가 물으면 머리에 호박을 이고 가는 ‘테우안테펙 여성’을 선택하겠다. 사진 속의 원주민 여성은 모도티 자신이었다. 저 높은 곳을 응시하는 모도티의 눈빛.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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