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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몰던 아버지의 감수성, 아들 박준의 시로 피었다



경향신문

박준 시인(오른쪽)이 지난 16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다 아버지 박상수씨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촬영을 위해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 우철훈 선임기자

소년이 있다. 초등학교를 나와 10대 때부터 일을 했다. ‘아이스께끼’ 장사가 시작이었다. 서울 을지로와 청계천의 ‘메리야스’ 공장에서 일했다. 옆구리에는 ‘현대문학’을 끼고 다녔다. 청마 유치환과 노산 이은상의 시가 좋았다. 독학으로 기타도 배웠다. 운전면허를 딴 뒤 구청 기능직 공무원이 됐다. 트럭으로 생활쓰레기를 서울 난지도까지 실어날랐다. 40대에 들어서며 구청을 그만두고 15t 덤프트럭을 몰기 시작했다. 60대 후반 은퇴한 뒤 자재 창고 경비를 맡았다. 지금은 성인을 위한 중학교 과정에 다닌다.


소년이 있다. 트럭을 모는 아버지는 비가 오면 일을 쉬곤 했다. 그런 날엔 수건 하나씩 목에 걸고 함께 북한산에 올랐다. 맨몸으로 세찬 장대비를 맞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감기에 걸릴까 염려했다. 아들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주’가 좋았다. 공치는 날, 아버지는 경복궁이나 덕수궁에 아들을 데려가기도 했다. 빗방울 듣는 처마 끝을 함께 바라봤다. 소년은 자라서 시 쓰는 사람이 되었다. “비 온다니 꽃 지겠다// 진종일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시 ‘생활과 예보’)


박준(38)은 문학적 평가와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누리는 드문 시인이다. 2012년 펴낸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지난달 50쇄를 돌파했다. 2000년 이후 데뷔한 밀레니얼 세대 작가로선 처음이다. 누적 판매 부수도 16만부를 넘겼다.


박준의 작품 속에는 아버지 박상수씨(72)의 목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미감(美感)을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부자가 공유하는 심미적 감수성은 부르디외의 ‘문화자본’과 다르다. 박준은 아버지가 그리움과 연민 같은 감정을 알려줬다고 했다.


“5년 전쯤 창고 경비 일을 하실 때, 운전해서 가면 40분이면 직장에 도착하는데도 1시간 반씩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곤 했어요. 왜 그러냐 여쭤봤더니 처음엔 얘기를 안 하세요. 한 번 더 여쭤보니 ‘지하철을 타면 누군가 그리운 사람을 만날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지난 16일 박준의 경기 고양시 자택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만났다.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시인 같았다.

아버지를 닮아…아버지를 담아…나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다. 1992년 가을 북한산에서 박상수(왼쪽)·박준 부자. 박준 시인 제공

시인 아들이 말하는 아버지

영화 속 ‘신스틸러’ 같아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의미가 무엇일지

나도 모르게 관심 가지게 돼


정보가 아닌 ‘정서적 교류’

그 속에서 연민과 공감 배워


시인 박준은 아버지 박상수씨를 살갑게 챙겼다. 야외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동안 겉옷을 정성스럽게 여며줬다. 인터뷰 중에도 마스크가 흘러내릴라치면 벌써 아들의 손길이 가 있었다. 성인이 된 아들과 늙어가는 아버지가 이토록 다정할 수 있을까. 아들에게 먼저 물었다.


- 박상수 선생님은 어떤 아버지인가요.


“일상 속의 아버지는 ‘손이 많이 가는’ 분입니다. 영화로 말하면 ‘신 스틸러(scene stealer)’라고 할까요…. 저도 모르게 계속 관심이 갑니다. 하시는 말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요. 아버지의 말과 행동은 어떤 의미일까, 자꾸 생각하게 만듭니다.”


- 시를 쓸 때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 ‘연민’과 ‘공감’에 대해 알려주신 것 같아요. 아버지는 당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슬픔을 놓고 같이 슬퍼하곤 했어요. 동네 할머니 보시면 괜히 우시기도 하고….”


- 어린 시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트럭 운전하실 때, 비 오는 날은 일을 안 나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아버지는 유흥을 즐기지 않으셨어요. 술도 별로 안 드시고요. 남자 어른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일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집에서 신문 보거나, 산에 가거나, 고궁에 가거나…. 아버지와 함께 북한산에 가서 세찬 비를 맞곤 했어요. 경복궁이나 덕수궁에 가서도 궁궐 구경 대신 비 오는 처마 끝을 바라보고요. 아이로선 심심한 일이죠. 사람도 없고…. 그런데 이상하게 멋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시의 여백 같은 느낌이에요.”


“아버지는 오전 내내

마당에서 밀린 신문을 읽었고

나는 방에 틀어박혀

종로에나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날은 찌고 오후가 되자

어머니는 어디서

애호박을 가져와 썰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마을버스 차고지에는

내 신발처럼 닳은 물웅덩이

나는 기름띠로

비문(非文)을 적으며 놀다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바퀴에

고임목을 대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족의 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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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아버지가 모는 트럭 조수석의 단골이었다. 2017년 3월 트럭에 탄 박상수(오른쪽)·박준 부자. 박준 시인 제공

시인보다 더 시인 같은 아버지

국민학교 졸업 후 일터로

다들 어려웠던 그 시절

청년 땐 문학과 음악 즐겨


아들아, 더 바랄 게 없다

어려운 사람 도와주며 살아라


박준은 또 다른 기억도 꺼냈다. 1990년대 중반, 서울 예술의전당에 오페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무대에 올랐다. 가난한 아버지는 아들과 딸을 위해 거금을 투자했다. 처음 보는 뮤지컬은 낯설고 어려웠다. 불이 켜지자 세 식구는 신나게 걸어 나왔다. 이상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불이 켜진 건 인터미션(중간 휴식시간) 때문이었다. 처음 본 공연이라, 모르고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세 식구가 누린 해방감의 서사는 뚜렷이 남았다.


이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 박준 시인의 시와 산문을 읽다보면 아버지의 젊은날이 궁금해집니다.


“그 시절에는 다들 어려웠어요. 서울 변두리 종암동에 살았는데, 국민학교(초등학교) 마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이스께끼’를 팔았는데, 며칠은 견습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이스께끼 통을 메고 나가서도 ‘아이스께끼 (사세요)!’ 말이 안 나와서…. 1년 정도 하다가 고물 줍는 일을 했어요. 그러다 아는 누나가 ‘메리야스 공장 가볼래?’ 해서 취직했지요. 공장이 을지로 6가에 있었어요. 거기서 10년쯤 일했나 봐요.”


박준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는 ‘노동자 아버지’의 구체적 삶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동대문이나 청량리, 멀리는 창동까지 동네 아이들과 함께 고물을 주우러 다녔”고 “메리야스 공장에 취직을 해 10년 넘게 일”했으며 “구청 기능직 공무원으로 일하며, 환경미화원들이 리어카로 수거해온 생활쓰레기를 트럭에 싣고 난지도 매립지를 오갔”다.


- 청년 시절 문학과 음악을 좋아했다고 들었습니다.


“계간지도 보고 ‘현대문학’인가 월간지도 보고 했어요. 청마 유치환의 시가 눈에 쏙 들어왔어요. 그다음엔 노산 이은상이 좋아졌고…. 라디오에서 폴모리아 같은 외국 악단의 음악을 듣곤 했죠. 포크송을 좋아해서 기타도 배웠어요. 아주 간단한 코드 정도 쳤지요.”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종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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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들은 아버지보다 훌쩍 커버렸다. 박준 시인(왼쪽)과 아버지 박상수씨가 지난 16일 경기 고양시 박 시인 집 앞에 섰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 우철훈 선임기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울남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눈물이 많다. 배우 최진실이 세상을 떴을 때 아버지는 ‘저렇게 이쁜 사람도 세상에 살지 않는데, 나도 살 자격이 없지 않으냐’며 울었다. <운다고 달라지는…>에는 ‘그만 울고, 아버지’라는 글이 실려 있다. “나중에 내가 고아가 되면 (영화) <푸른 하늘 은하수>도 구해 봐야지. 그때는 내가 아버지처럼 엉엉 울게. 그래. 끊어. 그만 울고, 아버지.”


아버지는 섬세하고 예민하다. 아들이 일곱 살쯤 됐을 무렵 서울 성북구청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아들을 태우고 난지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정릉 언덕길을 내려가며 말했다. “무거운 짐을 실었을 땐 트럭이 잘 멈추지 못해. 그러니까 신호등은 물론 사람들도 함께 봐야 한다. 저 아래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차도에 가까이 붙어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보행신호가 켜진다는 뜻이니까 미리 속도를 줄여야 해. 반대로 사람들이 횡단보도에서 얼마쯤 떨어져서 다른 곳을 보고 있다면 보행신호가 꺼진 지 얼마 안 된 거니까 잘 살펴 통과하면 되지.”


박준의 작품에서 아버지는 늘 일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마을버스와 덤프트럭을 몬다. 때로는 연탄을 나른다. 때로는 진폐증에 시달리는 지친 광부다. 물론 어떤 얼굴은 아버지의 진짜 얼굴이 아니다. 이 땅의 수많은 노동자의 얼굴을 박준은 아버지에게 포개놓는다.


- 박 시인의 산문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휴학하고 새벽시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감기에 걸렸는데 아버지에게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운전을 않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정도로 몸이 안 좋다고 운전을 안 할 수 있나. 아프다고 해서 안 해도 되는 일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아’ 하며 웃었다.” 일에 대한 철학이 담긴 것 같습니다. 일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내게 주어진 삶이니까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박 시인이 거들었다. “일에 인이 박인 분입니다. 지금도 마을버스 운전 하겠다고 하셔서 계속 말리고 있어요.”


박상수씨는 4년 전 평생의 노동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해부터 경기 파주 한마음성인중학교에 다닌다. 배움의 시기를 놓친 성인들을 위한 중학교 과정이다. 올해 2학년이다. 그는 길거리 영어 간판의 뜻을 알고 싶었다고 했다. 예컨대 ‘Speedmate’를 보면, 스피드메이트로 발음할 줄은 아는데, 의미를 몰랐다고 했다.


- 같은 반에 몇 명이나 있습니까.


“20명쯤 돼요. 다 80대 누님들… 나만 남자고….”


- 인기가 좋으시겠어요.


“난리 났지.”(웃음)


코로나19 때문에 요새는 학교에 못 나가서 안타깝다. 등교 대신 ‘줌’으로 수업한다.


- 아드님을 제외하고,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


“김훈 선생님이요. <칼의 노래> <자전거 풍경> 등 김 선생 작품은 거의 다 읽었어요. 글이 예사롭지가 않아요.”


아버지는 아들의 ‘제1 독자’일 때가 많다. 박준은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내기 전 아버지에게 원고를 보여줬다. 아버지가 키우는 개를 그린 ‘단비’라는 작품이다. “올해 두 살 된 단비는/ 첫배에 새끼 여섯을 낳았다// (…)// 마지막 새끼를/ 보낸 날부터// 단비는 집 안 곳곳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밤이면/ 마당에서 길게 울었고// 새벽이면/ 칠 년 전 자식을 잃은 아버지와…”. 아버지는 “칠 년 전 자식을 잃은 아버지와”라는 문장을 보고 ‘시가 너무 직접적이지 않느냐’고 했다. 결국 “올해 예순아홉 된 아버지와”로 고쳤다. 시인은 다음달 초 <우리는 안녕>이란 첫 시 그림책을 출간한다. 역시 ‘단비’의 이야기다.


시인 아들, 그리고 시인보다 더 시인 같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 많은 남성들이 ‘중학생이 된 이후론 아버지와 일상적 안부 외에 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두 분의 관계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박준 = “아버지와 저는 ‘정보’가 아니라 ‘정서’를 주고받는 것 같습니다. ‘저거 예쁘지 않냐?’ ‘뭐가 예뻐?’ ‘이래서 예쁘지’ 하는 식이죠. 정보를 주고받다 보면 정보가 달라서 부딪칠 수 있어요. 하지만 추상적인 정서는 그럴 일이 없죠. 엄마는 우리를 보곤 ‘왜 그리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시지만요.”


박상수 =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유전자가 두 사람한테 있는 것 같아요.”(웃음)


- 두 분도 물론 갈등이나 충돌을 겪었겠지요.


박준 = “갈등까지는 아니고요… 아주 작은 일에서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왜 운전을 안 하고 대중교통을 타는가’, 아버지는 제게 ‘너는 왜 독한 술을 마시는가’ 이런 식이죠.”


- 그럴 땐 어떻게 합니까.


박준 = “문제풀이의 방식은, 서로 말을 끝까지 다 하는 겁니다. 각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 되풀이해서요. 예컨대 4대강사업 할 때 아버지는 경인아라뱃길 이야기를 하고, 저는 4대강사업 반대하는 이야기를 하는 식이죠. 지치도록 끝까지 다하는 겁니다.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며 이야기할 때가 많아요.”


아들이 유명 작가가 되면서 강연할 기회가 많다. 아버지는 아들의 차를 타고 전국을 같이 다녔다.


박상수 = “제가 같이 따라다니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어느 날은 아들이 피곤하다고, 저 보고 운전하래요. 그러면서 ‘나, 잠은 다 잤네’ 해요.”


박준 = “처음 운전을 배울 때, 아버지가 ‘조수석의 사람이 잠들 수 있어야 운전을 완벽하게 하는 거다’ 했는데 그 말을 담아두고 있다가 복수한 거죠.”(웃음)


서로에게 바라는 게 있는지 궁금했다.


박준 = “요즘엔 ‘물건 뚜껑을 잘 닫자, 물건을 썼으면 제자리에 두자’ 이런 걸 바랍니다. 일상과 관련된 감각이 조금씩 둔해지고 계시거든요. ‘미리 보는 나’ 같아서 더 신경이 쓰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은 e메일로 추가 답변을 보내왔다. “제가 요즘 라디오 프로그램(CBS 음악FM <시작하는 밤 박준입니다>)을 진행하는데, 실시간 게시판에 아버지가 신청곡을 남깁니다. 1960년대 팝송이나 가요가 대부분인데요. 저는 자주 들어서 좋아하는 곡들이지만, 한 번도 그 신청곡을 튼 적은 없어요. 다른 청취자 분들에겐 너무 생소할 테니까요. 그래서 노래는 그만 청해주셨으면 합니다.”


박상수 = “다정하고, 음식도 잘하고, 더 바랄 게 없어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살라는 이야기는 합니다.”


“방에

모로 누웠다


나이 들어 말이 어눌해진

아버지가 쑥을 뜯으러 가는 동안


나는 저녁으로

쑥과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일 생각을 한다


내가 남도에서 자란

얼굴이 검고 종아리가 두꺼운 사내였다면

된장 대신 도다리 한 마리를 넣어

맑게 끓여냈을 수도 있다


낮부터 온 꿈에 그가 보였지만

여전히 말 한마디 없는 것에 서운하다


서향집의

오후 빛은 궂기만 하고


나는 벽을 보고 돌아누워

신발을 길게 바닥에 끌며

들어올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쑥국’)


김민아 선임기자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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