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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스시·비트 소금구이… 4시간 이어진 경이로운 맛 탐험

프랑스 가스트로노미

 

아르페주, 23년간 ‘미쉐린 3스타’

‘세계 톱 10’ 소박한 최고급 식당

붉은 육류 요리 없애고 모두 채식

프랑스 음식사에 큰 획 그은 사건


미각·식감을 창의적으로 끌어내

“원래 이런 맛이었나” 황홀한 경험

경향신문

단골손님들과 대화하는 알랭 파사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평범한 회색 시멘트 건물 앞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다 보니, 모퉁이에 보일 듯 말 듯 붙은 작은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르페주. 1996년 이후 지금까지 23년간 ‘미쉐린’ 3스타를 굳건히 유지해왔으며 월드 레스토랑 랭킹 10위(2018년에는 8위) 정도를 유지하는 세계 최고급 식당이지만, 너무 소박해서 찾기가 힘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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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피타이저로 나온 토마토 스시.

12시 정각에 들어서자 직원이 예약을 확인한 후 질문을 했다. “4시까지 시간 있으시죠? 런치 코스는 최소 3시간 반, 보통은 4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기대감을 품고 자리에 앉자 직원이 테이블마다 채소를 두어개씩 올리기 시작했다. 내 앞에 놓인 것은 노란색과 초록색 작은 오이들이었다. 식당 장식은 최대한 배제하고 소박하게 유지하면서, 자신의 농장에서 직접 기른 채소만 4시간 내내 바라보게 하다니. 참으로 본질에만 집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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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애호박 안에 담긴 라타투이.

오이, 사과, 블루베리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아뮈즈부슈(식전 한입 먹거리)를 보니, 셰프의 미학을 좀 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토마토 스시를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아아, 이것이 바로 토마토 본연의 맛이구나! 깊은 깨달음이 왔다. 토마토와 쌀밥은 상상도 못해본 조합인데 어떻게 이렇게 섬세하고 조화로운 맛이 날까. 이후 차가운 토마토 수프, 토마토를 얇게 썰어 최소한의 향신료와 레몬을 섞어낸 요리, 다양한 품종의 토마토를 최소한의 소스와 함께 낸 샐러드에 이르기까지, 토마토라는 재료로 가능한 맛의 극한까지 탐험하는 느낌이었다. 토마토 말고도 다른 채소와 과일이 만들어낸 모든 맛이 신선하고 정갈했다. 그 다양한 채소와 과일의 식감을 어찌 그리 완벽하게 살려내면서 최고의 맛까지 뽑아냈는지, 요리 하나하나가 어찌 그리 섬세하면서도 창의적인지 경이로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모든 요리가 채식이다 보니 일반적인 코스 요리와는 문법이 다르기도 했지만, 끝없이 많은 코스가 이어지는 듯했다. 나중에 사진으로 확인해보니 거의 4시간 동안 아뮈즈부슈를 포함해 총 20접시나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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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붉은 양배추, 사과로 만든 퓌레.

차가운 크림에 따뜻한 거품수프가 함께 나온 순백색 요리는 형언할 수 없이 기품 있는 맛이었고, 토마토, 붉은 양배추, 사과의 정수만 뽑은 퓌레로 3중 동심원을 그린 요리는 톡톡 씹히는 굵은 소금과 너무나 어울리는 순수하고 깊은 맛이었다. 첫 번째 라비올리는 채소의 정수가 담긴 맑은 콩소메의 맛이 너무나 그윽했고, 두 번째 라비올리는 각각 다르게 톡 터지는 독특한 맛이 재미있어 감동이 왔다. 디저트로 과자 위에 올린 생크림은 태어나서 먹은 크림 중 가장 순수한 맛이었고, 자두 셔벗은 설탕이나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가지 않은 정직하면서도 딱 적당하게 시큼 달콤한 맛이어서 감탄했다.


황홀경에 빠져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 가끔 말을 건네던 아저씨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 빨리 사진 찍어. 저 사람들 ‘6스타’란 말이야!” 그의 뒤로 남자 넷이 앉은 테이블이 보였다. 그러잖아도 그 중심에 있던 멋있는 신사가 아르페주의 오너 셰프인 알랭 파사르와 진하게 볼키스를 하며 껴안는 게 눈에 띄었다. 알랭 파사르가 특별한 요리와 와인을 들고 그 테이블만 자꾸 찾아가 자상히 설명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궁금하던 차였다. 옆 테이블 아저씨가 감동에 젖어 알려준 내용에 의하면, 그 멋진 신사는 또 다른 미쉐린 3스타 셰프인 야닉 알레노였다(그는 최근에 잠실 롯데월드타워에 위치한 호텔 시그니엘서울 81층에 ‘스테이’라는 식당을 열어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 그렇다면 함께 앉은 세 남자는 모두 1스타 셰프라는 말이렷다! 이 아저씨가 스타 셰프들을 단박에 알아본 이유는 그 자신이 미식가이기 때문인 듯했다. 그와 함께 온 우아한 어머니가 셰프 알랭 파사르와 볼키스도 하고 오랫동안 수다를 떨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이런 문화 속으로 섞여 들어가고픈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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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로 나온 밀푀유.

알랭 파사르는 모든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쾌활하게 인사를 했고, 나에게는 자신의 책 <알랭 파사르의 주방> 한글판에 사인을 해서 선물했다. 이렇게 소탈하지만 그는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홈페이지에 의하면 “수십년 동안 글로벌 파인다이닝 세계에서 최상급의 자리를 지킨 몇 안되는 셰프”이다. 유명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을 보면 그런 성취를 가능케 한 그의 창의성이 잘 나타난다. 어떻게 발레 공연을 보면서 남자와 여자의 몸과 몸이 만나는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것을 요리로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만들어낸 메뉴가 닭과 오리의 절반을 실로 묶은 ‘오리닭’이다. 또한 죽은 동물과 피를 다루는 것이 고통스러워진 그는 붉은색 뿌리채소인 비트도 고기처럼 소금구이를 할 수 있고, 샐러리도 훈제할 수 있으며 양파 플랑베(재료의 표면에 알코올을 뿌리고 불에 그을린 요리)나 당근구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음식비평가들은 미쉐린 3스타 식당이 고기 요리를 중단한다는 것은 프랑스 문화에 대한 모욕이며 프랑스의 정신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범죄라고까지 비난했지만, 그는 3스타를 받게 해준 모든 요리를 과감하게 없애고 거의 채소만으로 메뉴를 채웠다. 프랑스의 음식 저널리스트 로랑 세미넬이 1393년부터 2015년에 이르는 프랑스 음식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사건들을 정리한 연대기에 포함시킬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2001년 알랭 파사르가 그의 레스토랑 아르페주에서 더 이상 붉은 육류 요리를 서빙하지 않기로 함.”


그의 창의성은 농장 세 곳을 사서 직접 채소를 재배한 데서도 드러난다. 순무의 예를 들면, 모래가 많은 토양, 충적토, 진흙으로 이루어진 세 군데 농장에 각각 같은 순무씨를 심어 수확한 뒤 이렇게 평가했다. 잘라보고, 질감을 느껴보고, 향도 맡아보고, 날로도 먹어보고, 익혀서도 먹어보고, 즙을 짜 주스를 마시는 실험을 모든 채소와 과일에 적용하면서 제일 적합한 재배 장소와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사람들이 최고급 그랑크뤼급 와인을 이야기하듯 당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길 바랐다는 그의 엉뚱하면서도 창의적인 욕망 덕분에 나는 그랑크뤼급 토마토의 맛을 평생 기억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사실 미쉐린 3스타에 월드 레스토랑 랭킹 10위권이면 미식여행에서 1순위로 방문해야 할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미쉐린 3스타는 그 식당을 방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식당에 주어지며,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은 말 그대로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을 뜻하기 때문이다. 알랭 파사르의 레스토랑을 소개하는 데에 “1996년에 첫 미쉐린 3스타가 되어 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거의 매일 식당에서 직접 요리한다”는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리스트의 추천사를 덧붙이고 싶다. 이렇게 세계 최정상급의 셰프가 직접 만든 요리를 먹고, 함께 편하게 이야기하고, 그의 단골 손님들과 음식으로 마음을 터놓는 경험을 어디서 또 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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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소메에 담긴 라비올리.

고급음식에 별로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프랑스의 문화 정체성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식당에서 한 번 식사해보기를 추천한다. 프랑스인에게 미식이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018년 프랑스문화연구에 게재된 이채영의 논문 <가스트로노미의 의미 연구(2018)>는 이렇게 설명한다. “유네스코는 ‘프랑스인들의 가스트로노미(gastronomie) 식사’를 세계문화유산 무형문화 부분에 등재하면서 와인과 요리의 조화, 잔과 접시 등 식기의 테이블 세팅, 나이프의 날과 포크 날을 각각 안쪽과 아래쪽을 향하게 놓는 방식, 손님 초대 때 메뉴를 인쇄해 나눠주는 예절, 전식, 본식, 후식으로 이어지는 식사 코스 등 식사의 실제뿐만 아니라 좋은 음식을 찾고 먹는 것, 축제로서 테이블(연회)의 분위기, 맛의 즐거움, 음식을 나누는 동안 함께 나누는 대화, 지방색 등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인들이 식탁을 즐기기 위한 다양한 문화적 실재들 모두가 프랑스인들의 가스트로노미 식사라고 했다.”


일본의 요리연구가 야기 나오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먹는 것에 관한 막대한 지식·기술의 집적에 머무르지 않고 미적 가치의 추구까지 포함해서 먹는 것을 의식적으로 세련되게 하고 고도로 연구한 끝에 도달한 유별난 프랑스적인 문화”라 할 수 있다. 프랑스가 예술인문 2급 훈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한 셰프 알랭 파사르의 식당 아르페주에는 이러한 문화의 정수가 깊이 배어 있다. 이곳에서 나는 프랑스 문화를 오감으로 체험하고, 한 단계 더 깊이 이해하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이민영 | 관광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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