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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대지진·전염병, 묵시록은 오늘도 계속된다

아포칼립스와 포스트아포칼립스


묵시사상 ‘아포칼립스’ 재난·재해 ‘파국적 상황’ 전제

문명 총체적 몰락 과정 묘사,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만나


포스트아포칼립스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잠시 등장

살아남은 자들의 삶 자체 강조, 거대 권력 해체…새 세상 재건


2000년대 9·11테러·금융위기… 지구 종말에 대한 공포 만연

아포칼립스 ‘파국 서사’ 득세, 현재 회피하는 결말 ‘큰 약점’

현대 포스트아포칼립스 서사선, 종말에 생존·재건 숙고하게 해

경향신문
19세기 중반 프랑스 삽화가 구스타프 도레(Gustave Dore)의 ‘계시록에 묘사된 죽음’.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의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는 대목을 묘사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속 심판·종말의 상상력, 즉 ‘아포칼립스’는 문학과 영화 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세계가 총체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등장하는데, 한동안 맥이 끊겼던 종말의 서사는 2000년대 이후 변종 바이러스 확산 등에 대한 공포가 커지면서 재등장하고 있다.

파국적인 세상을 그린 대표작으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와 이 두 소설에 영감을 준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을 꼽을 수 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을 국가가 악용해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이 기본 플롯이다. 1920년대 과학문명의 발전과 세계대전의 쓰라린 아픔, 구소련의 전체주의가 이런 장르를 가능케 했는데, 이 장르는 흔히 ‘아포칼립스’라 불린다.

아포칼립스, 숨겨진 것을 드러내다!

‘아포칼립스’는 그리스어로 ‘숨겨진 것을 드러냄’을 뜻한다. 이것은 종교문학의 한 장르로 시작되어 ‘심판’ ‘종말’ ‘말세’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 채 보통은 ‘묵시사상’이라 번역된다. 기원전 6세기 유대의 바빌론 포로기에 시작된 묵시사상은 일부 예언서에 대한 유대인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1세기 로마의 속주 시절까지 계속돼 ‘아포칼립시스’가 제목과 서두에 나타나는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다. 이때 ‘계시’란 말이 ‘아포칼립스’다.


그런데 유대 민족의 고리타분한 이야기에 불과했을 ‘묵시’에 대한 주제는 2000년대 이후 유대 사상과는 무관하게 줄곧 문학과 영화에서 활발하게 다뤄지고 있다. 세계 문학에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2009), 율리 체의 <어떤 소송>(2013) 등이, 한국 문학에서는 정용준의 <바벨>(2013), 손홍규의 <서울>(2014), 유진목의 <디스옥타비아>(2017), 장은진의 <날짜 없음>(2017),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2017) 등이 있다.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들도 파국을 주제로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는데, 우리나라만 봐도 <연가시>(2012), <타워>(2012), <더 테러 라이브>(2013), <감기>(2013), <부산행>(2016), <터널>(2016), <판도라>(2016) 등이 그렇다. 이제 곧 세상에 파국이 닥친다는 ‘종말론’과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저항하여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를 만난다는 내용이 ‘묵시문학’의 흔한 줄거리다.


미국의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1934~)의 저서 <정치적 무의식>에 따르면, 문학에서 ‘아포칼립스’는 세계가 총체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에 대응하여 등장하는 ‘종말의 상상력’이다. 특히 이 상상력은 텍스트를 해석할 때 “드러난 의미 뒤의 잠재적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종말의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는 텍스트의 표면에 드러난 내용이 내포하고 있는 심층의 잠재적 의미와 다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빈번한 만남 속에서 ‘아포칼립스 상상력’은 손해를 입지 않으려는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도에서 아포칼립스의 전통이 자연스럽게 생겼고, 이것은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미래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묵시문학’은 재난과 재해라는 파국적 상황이 전제되고, 그것의 비밀을 벗겨 해석하는 ‘파국’과 ‘계시’의 이중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비밀을 벗겨낸다는 점에서 제임슨이 말하는 ‘아포칼립스 상상력’은 앞에서 언급한 유대의 묵시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묵시사상은 유대인들이 70년 예루살렘을 로마에 빼앗기면서 끝났지만, 중동 지역의 민간신앙과 초대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이후 서구문명 전역으로 퍼져나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반복되고 있다. 인간에게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자연 재해를 계속 겪으면서 그 뒤에 이루어질 미래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 즉 ‘파국’과 ‘계시’ 구조가 상존한다.

‘포스트아포칼립스’ 시대의 권력 해체

경향신문

좀비를 소재로 2016년 개봉한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 <부산행> 의 한 장면(왼쪽)과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룬 영화 <워킹데드> 의 원작만화 국내 번역판 표지.

‘아포칼립스’의 또 다른 형태가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에 ‘포스트아포칼립스’의 형태로 잠시 동안 등장했다. 이것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와 인간의 반인륜적인 만행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주제는 냉전 종식 이후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잠시 주춤했다. 이윽고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유토피아 담론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2000년대에 이르자 맥이 끊긴 것 같았던 ‘파국 서사’가 다시 득세하면서 ‘아포칼립스’와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가 함께 공존하게 되었다. 2001년에 발발한 9·11 테러를 필두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2011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변종 바이러스의 확산 등 지구 종말에 대한 공포가 그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앞서 언급한 ‘아포칼립스’가 문명이 총체적 몰락으로 향하는 과정을 묘사한다면, ‘포스트아포칼립스’는 문명이 몰락한 이후 생존한 인간들의 삶을 다룬다. ‘포스트아포칼립스’에서는 종말의 끝에 완성될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자들이 재건하는 삶 자체에 강조점이 있다. 살아남은 자들 중에는 생존자를 대신해 죽는 희생자들, 다양한 목적을 가진 소규모 집단들, 파국으로부터 생존자들을 구원한 지도자들, 해체된 정부 세력 등으로 범주화된다. <워킹데드>와 같은 좀비서사를 비롯한 살아남은 자들의 각종 이야기가 이에 속한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자원의 부족 속에서 생활하는데 환경 담론이 주로 다뤄진다. 환경 문제가 ‘아포칼립스’와 ‘포스트아포칼립스’에서 파국의 원인으로 제시된다는 점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파국 이후 생존하는 경우 환경 담론은 인간과 자연의 분리에 대한 자각을 통해 자연과 다시 공생하려는 의지로 표출된다. 또한 생존자들에게 자원이 부족한 이유는 본인들 자신이 환경에 대한 책임을 등한히 한 것과 관련된다.


지구온난화, 오존층 감소, 바이러스 실험, 살충제 및 살균제의 오남용, 핵전쟁과 같은 이슈가 심심찮게 파국 서사에 나타나는 것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하나의 경종을 주기도 한다. 공공정책과 생활방식에 즉각적인 변화가 없으면 전 지구적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인간과 관련된 환경 문제 외에도 홍수, 태풍, 대지진, 화산 폭발, 전염병 등 자연재해와 행성 충돌, 외계인 침공으로 인한 문명의 몰락이 파국의 원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포스트아포칼립스’는 거대 권력을 해체하여 새로운 세상을 재건하는데, 흔히 자본가들이 거대 권력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파국 서사’에 자본주의를 해체한다는 내용이 많은 것일까? 1989년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에 이어 1991년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하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세계 도처에 퍼져나갔다. 거의 모든 국가는 금융자본주의 체제로 진입하였고, 자본의 실체는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자본을 축적한 금융자본가들은 공정한 경쟁 대신 기득권을 이용해 세습을 더욱 공고히 해나갔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는 ‘세습자본주의’라는 단어도 이런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 자본주의 체제가 더 이상 다른 체제로 바뀔 수 없다는 절망감은 앞에서 제임슨이 말했던 ‘아포칼립스 상상력’을 곤란하게 한다. 신분과 계급이 핏줄에 따라 결정되던 시대는 이미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또다시 세습의 성격을 지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주었다. 이런 상황이 자본가의 해체라는 상상력을 자극하여 ‘포스트아포칼립스’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디트가 나올 때, 비로소…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1942~)은 철학자로서는 특이하게 ‘종말론’의 문제를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는 그동안 서구 전통은 신의 구원이 종말에 이루어진다고 오해하여 마지막 날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현재보다는 종말 이후 삶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은 현재가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신의 ‘통치(il Regno)’가 계속되는 값진 시간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발터 베냐민은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사도 바울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한 후에 ‘매일, 매 순간이 메시아가 도래하는 작은 문’이라고 기록했다. (…) 결론적으로 바울은 시간의 끝점인 마지막 날이 아니라 계약을 맺어 종말을 시작하는 시간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니까 (종말의) 시작 시간과 마지막 사이에 남겨진 것이 메시아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조르조 아감벤, <교회와 통치(La Chiesa e il Regno)>).


아감벤은 종말을 시작과 끝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남겨진 것이 메시아의 시간”, 즉 “메시아가 날마다 도래하는” 시간이라고 해석한다. 특히 그는 <통치와 영광(Il Regno e la Gloria)>에서 독일의 문학평론가이자 철학자였던 발터 베냐민(1892~1940)이 ‘종말론 사무소(il bureau escatologico)’를 다시 개업하려 했다고 은유적으로 말한다. 이전에 ‘종말론 사무소’가 문을 닫았던 이유는 서구 전통이 종말의 끝에만 주의를 기울여 다룰 업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감벤의 암시적 표현에 따르면 베냐민은 이것을 다시 개업하여 “매일, 매 순간 메시아가 도래하는 작은 문”을 만들려고 했다. ‘종말론 사무소’의 주요 업무는 종말의 끝이 아닌, 시작과 끝 사이의 시간인 현재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의 시작이 아닌 그 끝에만 주의를 기울인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 생각에 그것은 바로 ‘묵시사상’ ‘아포칼립스’ 때문이다. 유대교가 바빌론 포로 시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묵시사상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서기 1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유대인들에게 묵시사상은 전쟁 이후 마지막 날에 신이 다스리는 유토피아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 로마의 통치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유대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로마에 패배하여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묵시사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대교는 그제야 기존 질서와 가치 체계, 사회를 부정하는 묵시사상의 위험성을 알고 구약성서(마소라 사본)에서 묵시문학을 모두 제거했다.


‘아포칼립스’는 유토피아가 됐든 디스토피아가 됐든 그 종말의 끝에 맞춰져 결국 현재를 무시하고 회피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이런 커다란 약점을 막을 수 있는 길이 현대의 ‘포스트아포칼립스’ 서사에 나타난다. 항상 그렇듯 문학이나 영화에서 디스토피아로 끝나도 또다시 도전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포스트아포칼립스’다. 그 서사는 종말의 때에 생존과 재건을 숙고하도록 만든다. 파국의 시대라도 끝까지 남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 용기를 준다. ‘아포칼립스’였다면 하나의 대안을 그 완성으로 삼고 끝났을 것이지만 ‘포스트아포칼립스’는 하나의 대안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현실, 그것이 전염병과 같은 자연재해든 인재든 아니면 그 무엇이 가로놓여도 끝까지 생존하도록 할 것이다.


영화 스크린에 ‘The End’가 보여도 자리를 뜨지 않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 수 있고 때로는 잠시 지난 후 재밌는 쿠키 영상도 볼 수 있다. ‘포스트아포칼립스’가 그렇다. 그것이 ‘생존자’로 현재를 사는 베냐민과 아감벤 식의 ‘종말론 사무소’의 주 업무이자 재건의 시작이다. 이 사무소의 업무로, 종말은 계속된다.


김동훈 서양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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