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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장사씨름대회… 사랑받다 사라진 모든 것들에 대하여

한번 멸종위기에 몰렸던 대상, 이번엔 무력하게 보내지 않으리

경향신문

설날인지 추석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중학생 시절 어느 명절, TV 속 모래판에선 소년 장사로 유명했던 백승일이 화려한 기술로 상대를 꺾고 천하장사인지 백두장사인지를 따냈고, 함께 경기를 보던 큰아버지는 “백승일이 이만기 뒤를 이을 재목”이라 크게 칭찬하셨다. 학교에서 씨름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는 당시 기술 씨름의 대가였던 한라급 이기수의 팬이었다. 고등학교 땐 집에서 멀지 않은 시립체육관에서 열린 구리장사씨름대회를 보러 가기도 했고, 집 근처 LG 씨름단 숙소에 있던 김경수 같은 선수들도 가끔 마주쳤다.

추석 연휴였던 지난 13일 전남 영암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위더스제약 2019 추석장사씨름대회’에서 임태혁 선수(수원시청 소속)가 라이벌 최정만 선수(영암군민속씨름단 소속)를 이기고 금강장사 타이틀을 획득했다. 두 선수의 경기는 ‘기술 씨름’의 진수를 보여주며 큰 화제를 모았다. KBS 중계화면 캡처

스무 살이 될 무렵 KBS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캠퍼스 영상가요’ 울산대학교 편에선 현역 씨름선수였던 신봉민이 현장을 급습해 진행자이던 강호동과 급작스러운 씨름 대결을 펼쳤고, 체격이 훨씬 작았던 강호동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졌다.


그 장면에 대한 기억 이후로 20여년, 씨름 경기에 대해선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종목에 대한 인기가 시들해지며 프로씨름단이 하나둘 해체됐고, 최홍만을 필두로 이태현, 김영현 등 직장을 잃은 씨름계의 스타들이 입식격투기나 종합격투기에 진출했고, 전성기 최홍만을 제외하면 거의 다 많이 맞고 많이 졌다.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 시대가 저물었고, 새 시대의 문턱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으므로.


얼마 전 열린 금강장사 결정전

역동적이고 화려한 기술 씨름은

다시 대중적 관심을 불러냈다


프로레슬링·프로복싱·실업농구

취향과 팬덤의 속에서 사랑받다

기억 저 멀리 잊혀진 많은 것들

오판·오만이 유발한 씨름의 위기

지금은 프로야구도 같은 처지다


부흥을 기대하는 생각을 넘어

영상·사진 하나라도 더 공유하자

사랑했던 대상이 모두에게

사랑받고 더 자주 회자 되도록


그래서 얼마 전 열린 2019 추석장사씨름대회, 더 정확히는 금강장사 결정전 TV 중계와 함께 씨름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인기가 급증한 모습은 반갑고도 놀랍다. 인기의 이유는 꽤 명확하다. 우리가 기억하던 이태현, 신봉민, 김경수 등 백두장사들의 살집과는 달리 90㎏ 이하 금강급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식스팩까지 드러나는 근육질 몸매에 역동적이면서도 화려한 기술 씨름을 보여줬다.


프로씨름의 몰락이 체중 제한이 거의 없는 백두급 선수들의 비대화와 그로 인한 기술 씨름의 쇠퇴 때문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과거 비인기 체급이었던 금강급을 통해 다시금 씨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건 아이러니하면서도 필연적으로 보인다. 멋진 기술 씨름으로 금강장사를 차지한 임태혁 선수의 하이라이트 영상은 유튜브에서도 높은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8강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그의 시합은 과거 한라급의 이기수가 그러했듯 거의 모든 순간이 하이라이트 필름 수준이다. 다시 말해 재밌다.


이번에 씨름의 세계에 빠진 사람들, 혹은 지난 몇 년 사이 금강장사를 중심으로 관심을 보이며 꾸준히 응원해온 사람들, 그리고 과거 씨름이 프로야구와 쌍벽을 이루며 인기를 이루는 시기를 경험했던 이들 모두 이번 추석장사씨름대회를 기점으로 좀 더 많은 프로모션과 중계를 통해 씨름이 다시 부흥하길 바라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씨름처럼 이미 한 번 멸종위기에 몰렸던 대상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취향과 팬덤의 역사엔 사랑받다 사라진 것들의 명단이 길게 기록되어 있다. 1970년대 전 국민을 사로잡았다던 프로레슬링은 지금 어디 있나. 장정구와 유명우 등 수많은 세계챔피언을 배출하던 프로복싱 중계도 이젠 찾아보기 어렵다.


아이돌에 가까운 인기를 끌었던 연세대 농구단과 실업농구의 인기와 현재 한국 프로농구의 처참한 시청률을 보라. 단지 시대별 인기 종목이 있다는 설명은 안일하다. 꽤 긴 암흑기를 지나 부활해 800만 관중 시대를 열었던 프로야구 역시 올해 양극화된 경기력과 스타플레이어의 부재, 팬서비스 부족 등의 문제로 꽤 급격한 인기 하락을 겪고 있다. 그러니 저질 경기를 보고 분노에 차 KIA 타이거즈 해체를 외치면서도 걱정하는 것이다. 우리 팀 경기를 매일 TV로 볼 수 있는 시대란 건 생각만큼 당연한 게 아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출판 만화 시장의 부침을 경험해봤던 작가와 편집자들은 웹툰 시장의 부흥 속에서도 항상 거품과 과도한 희망을 경계한다.


인간의 생애란 꽤 길어서, 사랑받던 무언가가 기억 저 멀리 잊히고 대세였던 것이 몰락하는 것을 서른 이전에 한 번 이상 경험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프로레슬링이든, 만화든, 헤비메탈이든. 어른이 되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일정 이상의 불안감까지 껴안는다는 뜻이다.


사랑받지 못하면 잊히고 잊히면 무의미해진다. 이것은 스포츠를 비롯한 모든 엔터테인먼트의 본질이다. 그깟 공놀이, 그깟 샅바 싸움이기에 사랑받지만, 또한 그깟 공놀이에 그깟 샅바 싸움이기에 사랑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언제나 지금 같을 거라 쉽게 생각하는 순간, 행복한 동행은 끝난다. 좋았던 시절이 끝나고 어떤 것은 돌아오지만 어떤 것은 돌아오지 못한다.


씨름은 돌아올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요즘 유튜브에서 꽤 자주 재생된다고,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당연히 다시 부흥할 거라 기대하는 안일한 생각으로는 결코 씨름의 인기는 회복될 수 없다. 어떤 종목, 어떤 장르를 좋아해본 사람은 안다. 정말로 좋아하는 대상을 ‘나만 아는 ○○’로 두어선 그것을 볼 나만의 기회도 별로 없다는 것을. 팬덤의 외연이 확장되고 좀 더 대중화되었을 때 그나마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영상 하나라도 캡처 사진 하나라도 더 공유하고 더 영업을 하는 수밖에. 영화 <예스터데이>에서처럼 사라진 대상에 대한 기억을 소수가 은밀히 공유하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가장 좋은 건 사랑했던 대상이 모두에게 사랑받고 더 자주 회자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이번 추석장사씨름대회에 대한 관심을 등에 업고 씨름이 더 인기를 얻으면 좋겠다. 강호동과 이만기가 예능에서 형님 농담이나 하기보단 차라리 여기에 전문성과 권위를 보태주면 좋겠고, 스포츠 전문 채널들도 적극적으로 중계와 프로모션을 고민해주면 좋겠다. 단순히 씨름의 좋았던 시절을 기억해서, 그 시절이 돌아왔으면 싶어서는 아니다. 앞서 씨름의 몰락에 대해 한 시대가 저물었다고, 새 시대의 문턱에서 탈락한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다고 말했다.


분명 시대의 변화는 개인에게 다분히 불가항력적이다. 하지만 수많은 오판과 오만이 프로씨름의 위기로 이어졌고 또한 최근 프로야구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처럼, 그것들을 바로잡고 갱신할 기회 역시 순간순간 존재했고 존재한다. 그 기회에서 각 개인의 의지와 노력과 아이디어가 모여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과정을 무력하게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을 넘어 종사자와 팬들이 현재진행형의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감정이 배신당하지 않는 경험, 각 개인이 힘을 모아 자신들의 시대를 직접 지키거나 만드는 경험. 2019년의 어떤 시기 우연처럼 씨름이란 종목에 아주 작은 희망과 기회가 생겼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사랑했던 대상이 다시 사랑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다시 한번, 인간의 삶은 사랑했던 많은 것이 사라지는 것을 수없이 확인할 만큼 길다. 하지만 나이 먹고 어른이 되어 삶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사라짐에 익숙해진다는 것만을 뜻한다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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