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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우가 이 책을 읽었다면"···기혼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진짜 '부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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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너미는 기혼 여성들이 모여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자신들의 언어를 찾아가는 모임이다. 지난해 가정 내에서 육아와 돌봄에서의 성차별, 경력단절 등에 대해 이야기한 책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를 펴낸 데 이어 지난 4월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를 펴냈다. 왼쪽부터 은주, 유지은, 이성경 대표. |이상훈 선임기자

“지선우가 이 책을 읽었어야 했는데.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면서 정말 답답했거든요. 유능한 의사인데, 지선우가 요리고 집안일이고 그림자 노동을 혼자 다 하고, 이태오는 음식이나 뚝뚝 흘리잖아요. 지선우가 이태오랑 싸우는 장면에서 이 책을 던지며 말했어야 했는데. ‘이 책의 두 번째 챕터를 읽어봐!’”(이성경 부너미 대표)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본 독자가 말했다. “진짜 ‘부부의 세계’는 이 책 안에 있다.” 기혼 페미니스트들의 모임 ‘부너미’가 낸 두 번째 책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이야기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 열풍이 뜨거웠다. 하지만 그 안에서 기혼 여성들은 자신의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비혼·비출산이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자 대안으로 여겨지면서, 기혼 여성들은 손쉽게 ‘가부장제 부역자’라 불리고, 남자 아이는 ‘한남 유충’이라고 불렸다. 또 다른 혐오와 차별의 언어였다. 부너미는 ‘자신들의 페미니즘’이 있다고 믿었다. 치열하게 읽고 쓰고 고민하며 ‘결혼한 여성들의 언어’를 만들어냈다. 지난해 첫 번째 책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페결)를 펴낸 데 이어 지난 4월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를 펴냈다. 책을 함께 펴낸 부너미의 이성경 대표, 은주, 유지은, 김은희씨를 지난달 24일 서울 마포구 합정에서 만났다.

“당신 페미니스트야?” 한 마디에서 시작된 페미니즘 공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이성경은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었다. 건축 설계일을 했다. 회사에서 일만 한 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다. ‘사내 커플’이 되어 결혼을 했다.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첫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합해 15개월이 지났을 때, “여전히 혼자서는 무능한 상태”인 아이를 두고 출근하기 힘들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하루종일 맡겨 놓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3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출근하는 남편의 등을 보면 아쉬움과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하루는 운전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김여사’ 농담을 두고 남편과 논쟁을 벌였다. 남편이 툭 던진 한 마디가 인생을 바꾸었다. “당신, 페미니스트야 뭐야?” 페미니스트가 도대체 뭐길래 상대방을 비난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건가.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 지선우가 읽었어야 했다는 책의 두 번째 챕터는 김은희(가명)의 ‘남편의 혼외 섹스는 성차별에서 시작된다’다. 김은희는 부너미의 후원자이자 독자였다. 2019년 부너미의 첫 책 <페결>을 펴내기 위한 크라우드 펀딩에 후원자로 참여했다. 당시 ‘기혼’이었던 김은희는 다음 책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필자로 참여했을 땐 ‘이혼’ 상태였다. 두 아이를 데리고 ‘홀로서기’를 했다. 부너미를 통해서 남편의 혼외 섹스라는 사건뿐 아니라 연애 시절, 이혼, 현재의 삶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경험을 재해석하게 됐다.


물결에 물결이 더해지면 파도가 된다. 개인이 느낀 부당함을 풀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가 함께하는 공부가 됐다. 책을 냈고 독자가 필자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재해석하고 나아가는 동력으로 삼는다.


부너미는 ‘공부’에서 그치지 않고 삶을 바꾸고, 주변을 바꾼다. 이성경은 부너미에 대해 “곁을 바꾸는 페미니즘”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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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너미 회원들이 첫 번째 책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를 펴내기 위한 준비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부너미 제공

‘가부장제 부역자’? 기혼 여성의 페미니즘 언어 찾기

“페미니즘의 ‘페’도 몰랐어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내 이야기라 생각했고, 다른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됐죠. 낮에 아이를 보며 행복하다 저녁에 남편이 오면 너무 화가 나는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구조적인 틀 안에 있는 저를 보게 됐어요.”


그런데 왜 ‘기혼 페미니스트’의 모임이 필요했을까. 이성경은 “처음엔 비혼 여성들과 다같이 공부를 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나와 처한 상황이 너무 달랐다. ‘비혼·비출산’이 답이라고 하는데 ‘기혼·유자녀’ 입장에선 이미 선택하기 어려운 답이었다. 내 삶에서 오늘 하루하루 내가 풀어야 할 문제들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페이스북에 부너미 페이지를 만들고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쓸 사람을 모집했다. 이성경과 같이 마음 편히 숨 쉴 공기, 자유롭게 말할 언어가 간절했던 여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2017년 12월 첫 부너미 모임을 열었다. 이곳에 은주도 “뭔가에 홀린 듯” 참여하게 됐다.


부너미의 첫 책과 두 번째 책의 마지막 챕터를 장식하는 필자는 은주다. 은주는 여성학을 부전공한 비혼주의자였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메갈리아 논쟁에 이어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페미니즘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을 때, 은주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아기띠를 한 채 아이를 재우며 홀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페미니즘 논쟁을 따라가기가 힘들었어요. 내가 공부했던 페미니즘과 지금의 페미니즘은 다른가? 페미니스트로서의 저도 다시 ‘리부트’되는 기분이었어요.”


은주에게 페미니즘은 결혼 이후 더 절실한 문제로 다가왔다. 20대의 페미니즘이 ‘글로 배운 페미니즘’이었다면, 결혼과 출산 이후엔 페미니즘적 사고를 요하는 상황이 일상의 매 순간순간 벌어졌다. “아이를 낳고 본격적으로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가족 안에서 가사와 육아 등 돌봄을 담당하고 있는 기혼 여성들에게 ‘성차별’은 가족 내에서, 일상 속에서 부딪치는 매일매일의 일들이었다. 기혼 여성을 ‘가부장제 부역자’라 부르고, 아들을 ‘한남 유충’이라 부르는 혐오의 언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들이 어떤 언어로 발화할 수 있을까? 부너미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며 이들은 자신의 언어를 찾아갔다.


“<빨래하는 페미니즘> <아내가뭄> 등을 함께 읽었지만 다 외국 책이었어요. 당장 한국 사회에서 제가 처한 현실과 거리감이 느껴졌죠. 반면 국내 페미니즘 이슈는 학자 중심, 비혼 여성 중심으로 다뤄졌어요. 엄마는 분석이나 통계의 대상이었죠. ‘엄마’를 희생적 모성이나 ‘맘충’, 아니면 일에 미친 엄마 등으로 퉁쳐서 집단화해서 보는 시선이 강했어요. 다양한 여성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첫 책 <페결>은 이렇게 탄생했다. 지난해 2월 크라우드 펀딩으로 목표액 1127%를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출간했다. ‘말하는 힘’이 생긴 부너미들은 그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첫 책 출간 뒤풀이 겸 워크숍을 1박2일로 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 이성경이 말한다. “다음 책은 섹스 이야기로 내는 거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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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너미에서 <여자들의 섹스북> 을 펴낸 한채윤씨를 초청해 북토크를 하고 있다. 한채윤은 남성중심적인 성문화에서 여성들의 성에 대한 지식이 금기시된 사회에 문제제기하며 여성들의 주체적인 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부너미 제공.

이것이 진짜 ‘부부의 세계’

“출산 후 몸이 망가지고 수면 시간도 부족한 엄마가 ‘맘카페’에 남편 성욕 걱정하는 글을 올린 걸 보고 너무 화가 났어요. 남녀의 섹스에 대해서 불평등하다고 느끼는데, 이걸 풀 언어를 못 찾고 있었죠. 부너미에서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았어요. 내가 읽고 싶은 책인데 없으니까 직접 만들자고 생각했죠.”


‘부부생활’을 섹스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한국 사회지만, 부부 간의 섹스는 농담의 대상이 될지언정 진지한 논의나 성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동등한 관계, 동등한 즐거움을 위한 기혼 여성들의 섹스 말하기’란 부제를 달고 있는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는 섹스리스부터 남편의 혼외 섹스, 성매매, 피임 수술, 출산한 몸에 대한 혐오 등 다양한 이슈를 다루며 이것들이 남성중심적인 성문화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김은희의 ‘남편의 혼외 섹스는 성차별에서 시작된다’는 남편의 ‘외도’와 이혼 과정에서 겪은 일들에 분노해 시작된 글이다. “상대방이 술집 여자더냐” “실수로 사고 친 거지”라는 부모님의 말, 부부상담사가 ‘섹스 횟수’를 물으며 “남편 분이 힘드셨을 수도 있겠네요”한 말에 화가 났다. 김은희는 남편의 혼외 섹스라는 명백한 잘못 앞에서조차 이해와 용서를 요구받았다. 김은희는 “처음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분노해서 쓰기 시작한 글이었는데, 부너미에서 글을 쓰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남성 중심의 성문화 속에서 나도 눈 감고 지나간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험을 전반적으로 재해석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길이 험난하더라도 삶과 생각이 너무 멀어지는 건 막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부부의 세계>엔 “남성의 섹스는 배출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이 나온다. 은주는 이는 남성에게도 ‘모욕적’인 말이라고 말한다. 그는 “남성의 성이 그런 식으로밖에 치부되지 않는 것에 대해 남성들도 화를 내야 한다. 여성의 성욕에 순결과 정조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다면 남성의 성욕도 동물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그렇게밖에 교육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는 올바르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유지은의 글이 좋은 참고가 될 만하다. 유지은은 아이가 없어서 첫 책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두 번째 책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는 한국에 ‘여성들의 즐거움’을 소개하고자 바이브레이터를 수입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성경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 적극적으로 우리의 즐거움에 대해 함께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교육과정에도 없고 사적으로도 이야기할 수 없는 주제였다. 동등한 관계에서 동등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일상의 평등한 관계를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 부부들뿐 아니라 예비부부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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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너미 제공.

성평등 육아·교육으로 확장…부너미로 바뀐 삶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부너미를 통해 이들의 삶도 바뀌고 있다. 이성경은 서울시에서 성평등 교육활동가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폭력예방강사 과정을 수강 중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교육으로 확장되고 있다. “페미니스트 엄마들은 점처럼 흩어져 있는데 아이들이 자랄수록 학교 교육, 또래 영향을 많이 받아요. 제도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n번방’이 또래들 사이에서 ‘후진 문화’로 여겨진다면 그런 일에 동참하지 않겠죠.”


유지은은 성평등 그림책 큐레이션 서비스 ‘우따따’를 만들었다. 부너미를 통해 영유아 시절부터 성별 고정관념이 강하게 형성된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성평등 그림책을 소개하는 ‘우따따’를 기획하게 됐다. “한국에 성평등 그림책이 부족한 반면 이런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는 양육자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학교에서 성평등 교육이 의무화되고 성범죄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등 제도적으로 교육과 처벌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 전반의 변화가 이뤄지면 좋겠어요.”


은주는 페미니즘에서 불평등과 환경 등으로 관심을 확장해 문화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현재 열두 명의 전혀 다른 여성들이 모여 여성·생태·교육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뉴스레터를 준비하고 있다.


김은희는 또 다른 페미니즘 공부 모임을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근엔 장영은의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추천해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쓰고, 싸우고, 자신의 삶과 주변을 바꾸는 실천적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은 기혼 여성의 페미니즘을 주변의 가족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곁을 바꾸는 페미니즘’, 가까운 사람들과의 하루 하루 관계 안에서 싸우며 실천해야 한다는 점에서 ‘혼란의 페미니즘’, 미래 세대 아이들을 성평등하게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희망의 페미니즘’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페미니즘’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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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너미


‘결혼한 여성의 언어를 탐구하는 모임’이다. 한옥의 아궁이에서 발생한 열기가 방으로 넘어가는 통로 ‘부넘이’에서 따왔다. 따뜻한 공기가 역류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부넘이처럼, 페미니즘을 통해 ‘백래시’ 없이 가정 내 공기를 바꾸자는 의미에서 이름 지었다. ‘읽는 부너미’ ‘쓰는 부너미’에 이어 ‘걷는 부너미’가 있어서 함께 책을 읽고 쓰고 운동도 한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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