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구덩이' 조선시대 병역 면제 혜택 누가 받았을까
[경향신문]
2002년의 ‘유승준 사건’에서 보듯 다른 잘못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도 있지만 병역 관련 의혹은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사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이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는 언행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지만 말입니다. 병역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태어난 이 땅 남자들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굴레인 것 같아요.
1697년(숙종 23년) 작성된 병적기록부. 거주지와 신장, 나이 얼굴생김새, 신체적 특징 등의 신상정보를 자세하게 담겨있다. 마맛자국과 얼굴흉터, 수염유무 등까지 기록되어 있다.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
■16~60세까지 감당한 병역
아마 조선시대 사람들은 ‘라떼’를 외쳤을 것 같아요. 요즘은 육군을 기준으로 ‘18개월 복무’로 깔끔하게 끝나지만 조선시대 때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 나이는 16~60살이었거든요. 1년에 2~6개월씩 교대하기는 했지만 호호백발 할아버지(60살) 때까지 의무를 감당해야 했으니 그 괴로움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죠.
징집대상이 되는 일반병의 대상자는 기본적으로 양인(良人)계급 남자들이었는데요. 천민은 병역에서 제외됐어요. 물론 군적에 속했다고 모두 일반병으로 입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직접 군인이 되어 병역의 의무를 치르는 이를 정군(正軍)이라 했고, 징발자들을 경제적으로 뒷바라지 해야 하는 부류를 보인(保人)이라 했어요. 요컨대 정부가 병역을 담당해내는 정군(병사)의 월급을 주지 않고, 병역 담당자들의 상호 부조에 의존했던 겁니다. 병역면제의 기준은 물론 있었습니다. 지체장애인과 현직 관료, 그리고 학생(성균관과 사학 유생, 향교 생도)과 2품 이상의 전직 관료 등은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어요.
또한 7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신 경우는 아들 한 명, 9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신 경우는 아들 모두를 면제시키는 등의 규정도 있었습니다. 국가 유공자의 자손은 3대까지 병역면제의 혜택을 받았구요. 도첩(승려자격증)을 받은 승려들도 군역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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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 같다’는 병역 의무
그랬으니 갖가지 불법과 편법으로 면제혜택을 받으려고 혈안이 됐죠. 오죽하면 “병역의 고통을 마치 ‘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처럼(如坑穽)’ 여긴다는 여겨 온갖 구실과 핑계를 대서 죽기를 각오하고 빠져 나간다”고 했을까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불과 4개월 전인 1636년(인조 14년) 8월 20일이었는데요. 대사간 윤황(1572~1639)은 “백성 10명 중 무려 7~8명이 병역 면제를 위해 승려가 되기를 자청한다”고 개탄하는 상소문을 올립니다.(<인조실록>) 아닌게 아니라 ‘병역 기피 수단으로 승려자격증(도첩)을 받는 사례가 많았는데요. 한 집안에 2~3명씩은 보통이었답니다. 성종 때인 1479~1483년 전국적으로 승려가 40만명을 웃돌아서 가짜 중을 색출하고 대처승을 병역에 편입시켰지만 역부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궁궐 수축 공사에 동원한 2000여명을 격려한다는 명목으로 도첩을 남발했답니다. 이때 대소신료들은 “그렇게 쉽게 도첩을 준다면 백성들이 힘써 농사를 짓겠느냐”면서 “종신토록 병역에 복역하는 양민들에게 전하께서 장차 무엇으로 보상하시겠느냐”고 질타했답니다.(<성종실록>) 조선시대 내내 ‘승려’는 “병역을 기피하려고 승려가 된 자들은 쌀을 훔쳐먹는 도적”(1616년·광해군 8년)이라는 원성의 대상이 되었답니다.(<광해군일기>)
군복무기간이 점점 짧아져서 현재는 18~21개월로 조정됐다. |병무청 자료 |
■병역비리의 온상이 된 학교
성균관과 사학, 지방 향교가 병역 비리의 온상이 되었는데요. 1462년(세조 8년) 7월 “연장자나 재주없는 자들이 병역면제를 위해 향교에 등록한다”면서 “40살이 넘은 늙은 학생들이나 40이 넘지 않았더라도 학습진도가 부진한 자들은 충군(充軍·범죄자들로 구성된 군대)에 속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답니다.(<세조실록)
1493년(성종 24년) 벼슬에 오르지 못한 지방 유생이 대리 수강을 통해 향교 교사에 올라 병역을 회피한 일이 문제가 됐습니다. 현직관리가 되면 병역을 면할 수 있다는 특례규정을 이용한 거죠. 1495년(연산군 1년) 충청도사 김일손(1464~1498)은 “뇌물청탁으로 향교 선생이 되는 자들은 경전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해서 도리어 학생이 선생보다 실력이 나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개탄하는 상소문을 올립니다. 심지어 최고 학부인 성균관의 유생이 됐는데도 소년들의 학습서인 <소학>의 첫구절도 외우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네요. 역시 병역기피를 위해 불·편법으로 성균관 학생이 된거죠.(<인조실록> 16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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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인 승격자가 도로 천민을 자청한 이유
신분이 천민의 경우 병역을 원천적으로 면제 받았습니다. 그런데 1473년(성종 4년) 천민이었다가 ‘이시애의 난’(1467년) 때 진압군에 자원 종군한 공로로 양인이 된 손장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감격적인 신분 상승이었을 테죠. 그러나 손장수는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천민이 되겠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은 소장을 병조에 제출합니다. “너무 가난해서 병역을 감당할 수 없으니 제발 성균관의 노비로 살게 해달라”는 호소였답니다. 딱한 사연을 들은 성종 임금은 “그러라”고 윤허했는데요. 얼마나 병역이 괴로웠으면 차라리 노비의 신분이 낫다고 했을까요.(<성종실록>) 또 한케이스는요. 조선시대 병역법은 60세 때 병역이 완전히 면제됐는데요. 1456년(세조 2년) 충청도 관찰사가 “이덕명이라는 자가 병역면제를 위해 가짜승려가 되었으니 곤장 80대를 때리겠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세조는 외려 “65세가 된 이덕명의 병역을 면제시키는 대신 처벌하겠다니…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눈꼽 만치 없구나”라며 충청도 관찰사의 죄를 물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1466년(세조 12년) 조강지처를 상습 폭행하고 첩비와 내연의 관계를 맺은 정대희라는 못된 남편이 오히려 “아내의 품행이 방정치못하고 사내종과 친했다”고 무고한 죄로 ‘군입대 명령’을 받기도 했답니다. 아내를 구타하고 바람까지 피운 남편을 군대에 보낸거죠.
군대가 싫어 문서를 위조하는 일도 있었는데요. 1612년(광해군 4년)에 붙잡힌 문서위조범 김제세는 병역기피를 위해서 지방 훈도(학교 교관)의 임명장을 위조했다가 적발당했어요. 훈도의 임명장은 반드시 이조의 명으로 발부돼야 하는데, 위조 임명장엔 예조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또 임명장에는 ‘예조참지(參知)’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예조에는 ‘참지’라는 직함이 없었답니다. 위조한거죠.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중 탁발하는 승려 모습. 조선시대 때는 도첩(일종의 승려자격증)을 받는 승려들은 군역이 면제되었다. |
■귀화자 명씨 가문의 경우
그렇다면 귀화한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1487년(성종 18년) “귀화자의 경우 정착해서 살아갈 방도가 없으니 최소한 3대(손자대)까지는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요. 그로부터 5년 뒤인 1493년(성종 24년) 개성에 사는 명귀석이라는 자가 상소를 올렸어요. 고조 할아버지의 신분이 놀라웠는데요. 원나라 말엽 대하국(1362~1371)의 황제(재위 1362~1366)를 자칭란 인물이었답니다.
명나라는 1371년 대하국(쓰촨성·四川省을 기반으로 선 소국)을 멸망시켰는데요. 명나라는 대하국의 2대 황제인 명승(재위 1366~1371)을 포로로 잡은 뒤 “조선에서 살라”는 명을 내렸답니다. 그러면서 명 황제는 조선에 “명씨의 후손을 군인(軍)으로도, 백성(民)으로도 만들지 말라”는 조칙을 내렸답니요.
그런데 122년 만인 1493년(성종 24년) 명씨의 후손인 명귀석이 꼼짝없이 군대에 끌려가게 생기자 “명황제의 조칙에 의하면 우리 집안은 조선의 군인도, 백성도 아니니 병역을 감당할 이유가 없다”고 호소한거죠.
조선 조정은 명귀석의 호소를 들어주었는데요. 그런데 그로부터 162년이 지난 1655년(효종 6년), 명씨의 후손들이 또 한 번 상소문을 올립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란했다가 그만 명나라 황제의 조칙문서 등을 잃어버려서 신분을 확인할 길이 없어 꼼짝없이 군역을 치르게 됐다”고 재차 호소한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선 조정이 “이제 귀화한지 300년이나 지났으니 다른 백성들과 똑같이 군역을 감당하라”는 결정을 내립니다. 대대로 간직해온 가보(병역면제 서류)를 잃어버린 대가가 컸던 겁니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효자거묘’. 광해군 때 친어머니와 아버지, 새어머니는 물론이고 의인왕후(선조비)와 선조까지 모두 15년간이나 부모와 임금 부처의 산소를 지키고 상복을 입은 인물이 병역면제 혜택은 물론 벼슬까지 받았다. |
■안향, 문익점, 왕씨, 기자의 후손들까지
‘병역면제 혜택’의 가장 큰 덕목은 유교사회 답게 ‘충효’였습니다. 1610년(광해군 2년) 함열(익산) 출신 정팽수라는 인물은 친어머니와 아버지, 새 어머니 뿐 아니라 의인왕후(선조비·1555~1600)와 선조의 상까지 각 3년씩 모두 15년간 상복을 입은 공로로 병역면제 혜택은 물론이고 벼슬까지 내렸답니다. 부모와 임금 부처의 산소를 지킨 덕을 결국 본게된거죠.(<광해군일기>)
별의별 면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고려 왕조의 후예로서 선조의 제사를 지내는 왕씨의 자손들에게도 면제혜택을 주었고요. 또 1681년(숙종 7년) 병자호란의 ‘3학사’, 즉 오달제(1609~1637)·윤집(1606~1637)·홍익한(1586~1637)의 후예들에게도 “대대로 병역을 면제해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 같은 해 고려시대 대유학자인 안향(1243~1306)의 후손에게도 역시 같은 명을 내렸습니다. 유학에서 성인으로 꼽히는 기자(箕子)의 후손이라는 한(韓)씨와 선우(鮮于)씨, 그리고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1329~1398)의 후손들도 병역면제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아요. 너도나도 이 분들의 후손이라고 손들고 나선거죠. 1682년(숙종 8년) 지사 김석주(1634~1684)가 “요즘들어 안(安)씨 성을 가진 자는 다 안향의 자손이라 하고, 한(韓)씨 성을 가진 자는 모두 기자의 후예라 거짓말한다”고 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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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군대생활보다 불평등이 더 문제
‘군대’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남자들의 ‘평생 이야깃거리’라죠. 아마도 조선시대 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조선왕조실록>에만 해도 무려 4000건이 넘는 병역(군역)관련 이야기가 실려있구요.
이번 이야기도 수많은 사례 중 극히 압축해서 전해드린 겁니다. 뭐 16살부터 60살까지 지긋지긋하게 병역의 의무를 견뎌내야 했던 조선시대와, 18~21개월만 근무하면 영원히 제대하는 요즘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조선사람들이 ‘라떼’ 운운하겠죠. 그러나 아무리 편해도, 아무리 짧아도 군대생활은 고달프다고 느끼는 건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겠죠. 그것이 인지상정일겁니다.
1659년(효종 10년) 병조참지 유계(1607~1664)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선량한 백성에게만 유독 병역의무를 부담시킨다”면서 공자님 말씀을 인용하는데요. “균등하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힘겨운 병역의 의무보다 더 괴로운 것이 바로 불평등이겠죠. 우리가 이따끔 병역비리나 기피의혹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바로 이 불평등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겠죠.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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