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범죄 가해자들의 그 후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교수형을 당하는 모습을 그린 김윤보의 <형정도첩> . 성폭행죄가 바로 교형, 즉 교수형에 해당되는 중벌로 취급됐다. |
‘성희롱범에게 곤장 80대를 선고한다.’ 2012년 7월 필자는 ‘조선의 성범죄, 어떤 처벌을 받았나’라는 기사에서 <세종실록>을 인용했다.
1438년(세종 20년) 8월1일 <세종실록>에 기록된 성범죄 사건의 요지는 ‘성균관 유생 둘이 옷을 홀랑 벗고 목욕하다가 지나던 여인을 덮치려 했지만 여인이 도망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사헌부 수사 결과 문제의 유생 둘 중 실제 여인을 덮친 유생에게 <대명률>에 따라 장 80대의 형을 내렸다. 당시 조선은 모든 범죄의 판결에 1367년 제정된 명나라 형법(<대명률>)을 따랐다.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대명률> ‘형률·범간조)
필자는 이 법조항을 보고 성균관 유생 최한경에게 강간미수죄(장 100대 유배 3000리)보다는 낮은 장 80대에 처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세종실록> 1438년(세종 20년) 8월1일자 기록을 뜯어보니 이 사건이 달리 보였다. 다시 보니 ‘성균관 유생들의 성범죄’ 사건은 조선판 ‘미투’에 비견될 만 했다. 필자가 이 ‘성균관 유생 최한경의 성범죄 사건’을 6년 6개월만에 다시 살펴보고 재처리한 기사가 바로 지난 1월29일(신문은 30일자) ‘세종은 조선판 미투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였다. 세종은 조선판 미투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조선판 '미투'사건 가해자의 그후 삶
성균관 여종의 손을 잡은 공신
하지만 조선판 미투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또 한 번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범죄 사건이 1476년(성종 7년) 일어났다.
4월7일 대사헌 윤계겸(1442~1483)이 우참찬 어유소(1434~1489)을 체포해서 국문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사달은 그해 2월 성균관 대성전의 문묘(공자 사당)에서 열린 석전제가 끝난 뒤의 음복(飮福) 때 일어났다.
“어유소가 성균관 소속의 여종인 녹금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또 손을 잡아 희롱했다”는 것이었다.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또한 사건이 일어난 곳은 다름아닌 공자를 비롯한 유학의 성인들을 모신 성균관이었다. 게다가 우참찬이라면 의정부 소속 대신이 아닌가. 윤계겸은 “어떻게 그런 분이 이토록 무례하고 방자한 짓을 저질렀냐”고 탄핵한 것이다.
이 탄핵에 따라 사헌부 관리가 투입돼 국문을 열 예정이었다. 그런데 <성종실록>에 따르면 웃지못할 일이 벌어진다.
어유소가 의정부 녹사(하급관리)를 승정원에 보내 “제가 무슨 낯으로 하늘을 보겠냐. 죽을 죄를 졌다”고 인정하면서 “그러나 병이 위독해서 의원을 만나야 한다”고 아뢰었다. 죽을 죄를 졌다면서도 본인이 직접 나서지도 않고 하급관리를 시켜 ‘위독’ 운운하면서 ‘의사를 만나야겠으니 출두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칭병’하면서 수사에 불응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어유소는 하급관리를 통해 승정원에 “변방에 오래 근무했던 탓에 그 계집이 궁인(宮人)이 된 것을 몰랐을 뿐”이라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나도 모르게 실수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청금상련’. 사대부 양반위 저택 뒤뜰에서 양반들이 기생들과 의녀를 불러 희롱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간송미술관 소장 |
“술에 취해 실수한 것이다”
어유소가 누구인가. 1456년(세조 2년) 무과에 장원급제한 뒤 북방의 야인정벌(1460년)과 이시애의 난(1467년) 진압에 큰 공을 세워 1등 공신(적개공신)이 된 무장이다. 게다가 명나라가 건주위의 여진족을 정벌할 때(1467년) 조선 지원군 장수로 파견돼 큰 공을 세워 명나라 황제로부터 상품을 받았다. 그랬으니 당대 북도 방어에 없어서는 안될 무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어유소가 ‘성균관 여종 녹금 성희롱 사건’의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사헌부는 일단 어유소의 반인(伴人·개인 수행원)과 구사(丘史·공신에게 배당된 하인)를 소환해서 곤장을 때려 심문했다. 모시던 주인을 잘못 만나 횡액을 당한 것이다. 공신의 신분인 어유소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유소는 다시 하급관리를 보내 승정원을 통해 “어제 제 하인과 수행비서가 곤장을 맞았다”고 성종에게 고했다.(4월18일)
성종은 “아니 수행원이라면 주인의 죄를 감춰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왜 그들에게 곤장을 치느냐”고 어유소를 두둔하면서 오히려 사헌부를 문책했다.
그러나 사헌부 지평 박숙달은 “사헌부는 그저 석전의 음복날에 취해 녹금을 희롱한 어유소를 국문하는 것일뿐”이라고 주장했다. 박숙달은 이 자리에서 더 엄청난 어유소의 혐의를 까발렸다.
“어유소가 녹금을 희롱만 한 것이 아닙니다. 성균관 서리의 진술로는 어유소가 한달여가 지난 3월3일 성균관 유생들의 과시(일종의 월정고사) 때 의정부 당상으로 참여한 뒤 녹금의 집을 왕래했답니다. 이것은 녹금 뿐 아니라 이웃 사람들도 인정했습니다. 오로지 어유소만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어유소의 수행원들을 심문한 것입니다.”
“궁녀를 욕보인 겁니다”
핵폭탄급 발언이었다. 어유소가 녹금을 성희롱한 것도 모자라 녹금의 집에까지 찾아갔다는 것이다. 성종은 할 수 없이 “어유소를 빨리 국문하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다모(茶母·관비 출신의 사헌부 소속 여수사관) 등을 통해 이 사건을 수사한 사헌부는 총력을 다해 어유소를 탄핵한다.
“어유소는 성균관에서 녹금을 희롱한 뒤 유생의 시험날에 녹금의 어미를 불러 사사롭게 말하고는 도보로 쫓아가 집에 찾아갔다가 날이 저물녘이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4월20일)
특히 대사헌 윤계겸은 “다모의 수사와 녹금 모자의 진술을 보건대 희롱이 아닌 간통이 분명한데 병을 칭하고 수사를 불응하고 있으니 이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성균관 여종이라는 녹금이 궁녀 출신이라는 것이 더 큰 파문을 일으켰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임금의 여자이기 때문에 궁녀를 욕보이는 것은 대역죄인으로 취급됐다.
사건원 사건 박숭질(1435~1507)까지 나서 “어유소를 용서한다면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국체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면서 “죄를 주라”고 주문했다. 이에 성종은 “술을 먹고 실수했을 뿐이며, 무엇보다 어유소는 공신이 아니냐”고 두둔했다.
성종은 “어유소가 위독하다고 하지 않느냐”고 주변을 돌아보며 짐짓 “병세는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성종의 ‘더듬수’에 신하들은 요즘이라면 ‘멍미’ 하는 표정으로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성종과 눈이 마주친 원로대신이자 영사(정 1품)인 정인지 역시 성종의 역성을 들어주지 않았다.
정인지는 “녹금은 대궐에서 놓아보낸 시녀이니, 일이 과연 잘못된 것”이라고 뜻을 밝혔다.
조선시대 성추행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린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소년전홍> . 앳된 선비가 여인의 팔목을 잡아 희롱하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
“마소에 옷을 입힌 자다”
이후 <성종실록>은 “어유소를 처벌하라”는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1등 공신이 술취한 김에 저지른 일과성 사건’이라는 성종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이어졌다. “처벌하라”는 대간·간관의 상소와 “안된다”는 임금의 답변으로 점철됐다.
사헌부 집의 이형원(?~1479)은 “비록 어유소가 승복하지 않았다 해도 주변 사람들의 진술이 일치한다”면서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월22일) 사헌부 수장 대사헌에 이어 사간원 대사간 최한정(1427~1486)까지 탄핵대열에 합류했다.
최한정은 “대신이 음란해서 방탕하면 ‘마소(馬牛)에 옷을 입힌 격’이라 했다”면서 어유소를 마소에 비유했다.(23일)
“저렇게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을 주상께서는 ‘취중의 일’이라고 용서함으로써 결국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질 것”이라고 신랄하게 퍼부었다. 그래도 성종은 “공이 크고 죄가 작기 때문에 용서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간관의 공세와 성종 임금의 방어 공방은 짧게는 5월 12일까지 한달 넘게 앵무새처럼 진행됐다. 특히 5월12일에는 예문관 부제학인 손비장까지 나서 어유소의 파직을 청했다. 성종은 아예 묵묵부답으로 응대했다. 하지만 어유소 성희롱 사건은 해를 넘긴 1477년(성종 8년) 1월8일 대사간 최한정이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용서하시는 일이 많다”면서 그 사례로 시녀 녹금을 희롱한 어유소 건을 들었다.
성범죄 처벌은 원칙적으로 교수형과 능지처참형
반복해서 말하자면 조선시대 성범죄는 <대명률>에 따라 엄벌에 처했다. 특히 강간은 모반과 같은 대역죄와 존속살인 등과 맞먹는 중죄로 취급됐다. 국가의 경사 때 종종 행했던 대사면령에도 강간죄는 해당되지 않았다.
<대명률>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강간죄의 경우 교수형이 원칙이었고 강간미수죄의 형량은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였다. ‘성희롱과 강간미수의 경계선’의 처벌을 받은 성균관 유생 최한경의 형량도 장 80대였다.
실제로 ‘11살 어린 아이를 강간한 사노 잉읍금을 교수형에 처했다”(<태조실록>)거나 “죽도록 항거한 처녀를 강간한 철원사람 정경을 교수형에 처한다”(<세종실록>)의 기록처럼 극형을 받은 강간범이 제법 많았다. 심지어 부모가 죽어 삼년상을 치르려던 16살 처녀를 끌고가 강간한 가노(家奴) 형제 등 3명은 상전을 겁간한 죄로 법정최고형인 능지처참의 극형을 받았다.(<태종실록>)
군수를 지낸 황우형은 1472년(성종 7년) 자신의 처 4촌 오라비의 아내이자 사족의 부인인 반씨를 강간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 <대명률>에 따르면 강간미수죄의 형량은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였다. 그러나 황우형은 예전에도 장모를 능욕한 혐의로 붙잡힌 이력이 있었다. 성종은 “처가쪽 사촌 오라비의 아내를 욕보이려 하는 등 죄질이 아주 나쁜 자를 강간미수로만 처리할 수 없다”는 사헌부의 주청에 따라 ‘황우형의 직첩(관리임명장)을 거두고 영원히 등용하지 않으며,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내린다’고 판결했다. 성종은 이 처벌도 부족하다며 변방 중의 변방인 회령의 관노(官奴)로 쫓아냈다.
세종대왕의 손자는 천하의 난봉꾼
하지만 극형을 받는 경우는 천민이 양반을, 노비가 주인을 범하거나 친인척을 겁간하는 이른바 강상의 성범죄를 저질렀을 때 주로 적용됐다. 예컨대 부녀자 강간죄의 경우 천민은 법률에 따라 교수형으로 처벌됐지만, 양반은 태·곤장과 유배형 등으로 마무리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종친이나 부마와 같은 왕실 사람의 경우 처벌에 어려움이 많았다.
단적인 예로 세종대왕의 손자인 청풍군 이원(1460~1504·세종의 막내 영응대군의 외동아들)은 천하의 난봉꾼이었다. 정희왕후(세조의 부인)의 부음을 듣고도 7촌 숙부의 첩을 간통한 것도 모자라 연적인 부평부사 김칭과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는 등 추태를 부렸다. 청풍군은 이 일로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못말리는 난봉기질은 유배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유배지에서 청상과부를 강간한 것이다. 그 천인공로한 일로 다시 유배지를 옮겼지만 그 곳에서도 남의 논밭과 우마를 빼앗는 등 완악한 짓을 저질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탄핵상소가 빗발쳤지만 성종은 “청풍군은 세종의 손자이며, 영응 대군의 외아들이다. 어머니(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제사를 받들기를 부탁했기 때문에 특별히 사면했다”고 고집을 피웠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주유청강’. 양반들이 기생들을 불러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이다.|간송미술관 제공 |
승승장구한 성범죄 가해자
또 추상같은 처벌을 내렸다는 여러 사례도 끝까지 살펴야 한다. 지난번에 살펴봤듯이 장 80대의 처벌을 받은 성균관 유생 최한경이 훗날 첨지중추부사와 충청도관찰사, 이조참의를 거친 뒤 성균관대사성에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특히 최한경의 서예솜씨를 높이 산 단종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춘추관 기사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대간과 간관의 끈질긴 탄핵항소에도 성종 임금의 비호를 받아 처벌을 면한 어유소는 어땠을까.
역시 병조판서와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겸 도총관 등의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1489년(성종 20년) 10월 4일에 기록된 어유소의 졸기(부음기사)에도 궁녀 출신 여인 성희롱 및 강간사건 이야기는 단 한 단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지금보다 오히려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가해자가 누구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그 저울추가 오락가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한경이나 어유소나 무려 545~581년 만에 조선판 ‘미투’ 사건의 가해자로 운위되고 있다. 그 가해의 증거가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어떻게 항변할 것인가. 단 한 줄의 역사기록이라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https://leekihwan.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