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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으로 돌아온 고종의 '미국 짝사랑’…'수교조약 1조’의 배신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


1882년 5월22일 제물포 바닷가의 임시장막에서 조선과 미국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조약에 서명한 이들은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1810~1888)과 미국전권대표인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1822~1895)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해괴한 국가간 수교협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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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조선과 미국이 맺은 수호통상조약문. 제1조는 3국이 조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 미국이 자동개입해서 조선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이 남아있다|

조미수호통상 조약 1조

도장은 신헌에 찍었지만 조약의 교섭권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체결된 조미수호통상 조약의 제1조 또한 흥미를 자아냈습니다. 이 조약 1조는 ‘거중조정’ 조항이라 합니다. 맨 첫머리에 소개한 조약 1조는 3국이 조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 미국이 자동개입해서 조선을 돕는 중재자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바로 이 ‘거중조정’ 조항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미국을 향해 한없는 기대감을 표출했습니다.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않는 대인배의 나라이자 대양인인 미국’이야말로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강대국들의 야욕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름다울 미(美)’자에 ‘나라 국(國)’자 였답니다. 고종과 조선 조정은 왜 그렇게 미국을 짝사랑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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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제물포의 임시장막에서 거행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 광경을 그린 삽화.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1810~1888)과 미국전권대표인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1822~1895)가 도장을 찍었다.

<조선책략>이 던진 파문

혹시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아십니까. 1880년(고종 17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예조참의 김홍집(1842~1896)이 주일청국공사 참찬관인 황준헌(1848~1905) 등과 접촉했습니다. 이때 황준헌은 앞으로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해 취할 방안을 정리해서 김홍집에게 전했는데, 이것이 6000자에 달하는 <조선책략>이라는 책입니다.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 때문에 조선이 누란의 위기에 빠졌다”면서 “러시아에 맞서려면 조선은 청국, 일본 미국과 긴밀히 연결해서 자강정책을 확립하라”고 주문했습니다. 이것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일본과 결합·합종책), 연미국(聯美國·미국과 연대)’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친중국’이야 기존 정책이니 그렇다치고 ‘결일본’은 무슨 소리였을까요.


황준헌은 중국 전국시대 때 한·위·조·연·초·제 등 6국의 합종으로 막강한 진나라를 막아섰다는 점 등을 들어 조선과 일본이 결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황준헌은 특히 “일본은 국내문제로 조선을 해코지할 겨를이 없으며, 오히려 조선이 자강해서 일본의 서쪽 울타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일본의 침략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연미국’, 즉 왜 미국과 연대하라는 것이었을까요.


재미있습니다. 영국의 속국이던 미국은 조지 워싱턴(재임 1789~1797)의 독립 이후 예의로 나라를 세워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토지와 백성을 탐하지 않고 굳이 다른 나라의 정사에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황준헌은 “따라서 조선이 이런 공평한 미국을 우방으로 삼으면 화를 면하게 된다”면서 “미국은 대인배의 나라이자 대양인의 나라”고 치켜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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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조미수교 1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1860~1914) 등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리고 있다. 이 진귀한 모습을 신비롭게 여긴 미국 뉴욕의 언론이 삽화로 그렸다. 아서 대통령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국이 구세주다

이런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소개되자 조정이 열광했습니다.


당장 미국과 수교하자는 공론이 일었고, 고종은 “<조선책략> 검토회를 열어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까지 내렸습니다. 물론 영남유생 이만손(1811~1891)의 만인소에서 보듯 보수 유생들을 중심으로 거센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청나라의 주도로 조미 통상수호조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제2대 주미공사를 지낸 이하영(1858~1919)의 언급은 당대 조선인들의 미국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침입을…걱정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미국은 황금의 부국이니 조선은 물질적으로 덕을 볼 것이다. 또 종교지상주의 국가이니 도덕을 존중할 터라 모욕과 야심도 적을 것이다.”


여기에 서구 열강 중 가장 먼저 조약을 맺고 조약의 제1조를 ‘어려울 때 도와준다’는 거중조정조항을 삽입했으니 미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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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공사 박정양(1841~1905)이 조선에 파견된 미육군 교관에게 보낸 친필편지. “온마음을 다해 가르치셔서 조선 장정들을 정예병으로 키워달라”는 당부편지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조약체결 1주년을 맞이한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선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대통령(재임 1881~1884)에게 큰절을 올리는 모습이 화제의 사진으로 남아있답니다. 이때의 보빙사 일행은 귀국한 뒤 고종에게 “영어교육이 절대 필요하다”고 건의했습니다. 이에따라 1886년(고종 23년) 인재양성을 위한 영어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합니다. 미국이 파견한 원어민 교사도 최초로 고용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고종은 근대식 군사교육을 위해 미국에서 군사교관을 초빙하고 최초의 사관학교라 할 수 있는 ‘연무공원’도 설치 운영합니다. 최초의 근대적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이 공립외국어 전문교육이라면, ‘연무공원’은 장래 지휘관의 실전대비훈련을 위해 설립한 조선식 사관학교였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도와줄 것 같았던’ 대인배의 나라 미국을 향한 고종의 애정공세는 끝도 한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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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포함된 미국의 아시아사절단 단장격인 미국 국방장관 월리엄 태프트(오른쪽)가 일본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왼쪽)와 밀약을 맺었다. 태프트는 이 밀약을 맺고 중도 귀국했고, 앨리스 일행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 고종의 초청으로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루즈벨트의 딸을 극진히 대접했지만

그러나 말입니다. 헛된 환상이었습니다. ‘대인배의 나라’라는 미국은 조선을 위해 단 한번도 나서주지 않았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미국은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05) 도움을 주기는커녕 일본을 지지함으로써 조선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국제외교의 냉엄한 현실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고종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미국에 매달립니다. 1905년 9월 대한제국에 ‘아주 특별한 손님’이 국빈 자격으로 방문합니다. 바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재임 1901~1909)의 장녀인 앨리스 루즈벨트였습니다. 앨리스는 당시 미국의 아시아 사절단의 일원으로 필리핀과 일본·중국을 방문하던 도중에 고종의 초청을 받고 몇몇 일행과 함께 3박4일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한 건데요.


고종은 21살의 앨리스를 ‘미국 공주’로 여겨 국빈으로 대접했습니다. 거리거리마다 성조기를 매달고 황실가마에 태워 영접했답니다. 9월20일 고종은 ‘앨리스 공주’를 위해 덕수궁 중명전에서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극진한 점심을 대접합니다. 조선(대한제국) 역사상 임금(황제)이 여성, 그것도 다른 나라 여성과 처음으로 점심을 같이 먹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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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가족 사진. 장녀인 앨리스(맨 뒤 가운데 붉은 원안)가 1905년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의 나이는 21살이었다.

까맣게 몰랐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하지만 1905년 그 절체절명의 시기에 미국 대통령 딸까지 초청한 고종의 외교전은 너무도 순진했습니다.


고종은 그해 7월29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밀약의 골자가 기막힙니다. ‘미국과 일본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으니까요. 더욱 기가 찬 것은 이 밀약을 앨리스가 포함된 미국의 아시아사절단 단장격인 미국 국방장관 월리엄 태프트(1857~1930·차기 미국 대통령·재임 1909~1913)와 일본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1848~1913)가 맺었다는 겁니다. 태프트는 이 밀약을 맺고 중도 귀국했고, 앨리스 일행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가 고종의 초청을 받고 조선으로 이른바 ‘놀러 온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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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서울을 극빈 방문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를 위해 극진한 오찬을 대접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고종황제를 ‘디스’한 앨리스

그 밀약 체결소식을 까맣게 몰랐던 고종으로서는 버스 지나간 후 손을 흔든 격이 된거죠. 약혼자와 함께 여행 중인 ‘앨리스 공주’는 결과적으로 대한제국 황제를 농락한 셈이 됐습니다.


그뿐인가요. 앨리스는 1934년 출간한 자서전(<혼잡의 시간들>)에서 오찬장에서 만난 고종 황제를 한껏 ‘디스’합니다. “…키 작은 황제(고종)는 자신의 팔은 내주지 않은채 내 팔을 잡았고…서둘러 비틀거리며 매우 좁은 계단을 내려가 평범하고 냄새나는 식당으로 들어갔다”느니, “황족의 존재감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며 다소 측은하게 별다른 반응없이 멍하게 지냈다”느니 하며 깎아 내린겁니다.


점입가경은 평소에도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했던 앨리스가 서울에서도 승마복 차림에 시거를 피워가며 고종을 알현했고, 명성황후 능에 가서는 능을 지키는 수호상 위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는 등 무례를 저질렀다는 겁니다. 21살 어린 나이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남의 나라와 남의 나라 지도자를 향한 존중이 ‘1’도 없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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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을 방문한 앨리스는 시거를 피우며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명성황후의 능 앞에 설치된 수호상 위에 앉는 등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 문제는 앨리스의 방문 후 두 달도 안되어서 을사늑약(11월17일)으로 외교권이 박탈됐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미국은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교 단절 국가가 됐다는거죠. 당시 특사 자격으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밝힌 고종의 친서를 들고 미국을 방문한 호머 헐버트(1863~1949)라는 분 있죠. 그 분이 미국에 갔을 때는 상황 끝이어서 미국정부로부터 홀대만 받았습니다. 헐버트는 이렇게 분통을 터뜨립니다.


“미국은 한국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삿말도 없이…”라고요. 조미통상수호조약의 1조, 즉 ‘거중조정’ 조항을 철석같이 믿은 고종의 애정공세는 슬픈 짝사랑으로 끝나기도 했구요.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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