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희 “‘안개’는 상복 많은 노래…딴따라로 태어나 행복해요”
영화 <헤어질 결심> 테마곡 ‘안개’ 부른 가수 정훈희
가수 정훈희씨가 지난 7월 12일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정훈희와 김태화의 꽃밭에서’ 무대에서 손가락과 발장단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악 이야기를 하다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이 관객들의 호평 속에 N차 관람이 이어지고 있다. 박찬욱 감독이 여러차례 밝혔듯이 이 영화의 모티브는 고(故) 이봉조 작곡가가 만들고 가수 정훈희씨(71)가 부른 노래 ‘안개’다. 영화는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박해일 분)가 변사자의 아내(탕웨이 분)에게 미묘한 감정의 떨림을 느끼며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겪는 서스펜스 멜로물이다. 전반부는 산, 후반부는 바다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노래 ‘안개’는 1967년 열여섯 살 정훈희씨 버전과 70대의 정훈희·송창식(75)씨 듀엣 버전이 영화 중반과 엔딩 크레딧 자막이 올라갈 때 각각 배치돼 있다. 정훈희씨의 데뷔곡으로 1967년 발표된 이 곡은 같은해 개봉한 김수용 감독 연출, 신성일·윤정희 주연 영화 <안개>의 테마곡이기도 했다.
지난 7월 12일 정훈희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정씨는 임랑해수욕장이 한눈에 펼쳐지는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남편 김태화씨(73)와 카페 ‘정훈희와 김태화의 꽃밭에서’를 운영 중이다. 토·일요일 오후 3시에는 이곳에서 부부가 라이브 공연을 한다. 2층은 부부의 살림집이다.
정씨는 긴 파마머리에 긴 속눈썹까지 붙인 메이크업, 손에는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았다. 음악을 흥얼거릴 때는 엄지와 중지를 탁…탁… 치며 소리를 내고 발로 까딱까딱 장단을 맞추며 몸을 흔들었다. 나이를 잊게 할 만큼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화려한 나날과 그 못지않은 침체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사람이어서인지, 인생의 혜안이 느껴지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줬다.
정훈희·김태화씨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정훈희와 김태화의 꽃밭에서’. 2층은 부부의 살림집이다. / 우철훈 선임기자 |
부산서 남편 김태화씨와 카페 운영
주말 오후에는 부부 라이브 공연도
-‘안개’를 테마곡으로 삽입한 영화가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으니, 감회가 남다르겠습니다.
“내가 무슨 복인가 싶고, ‘안개’는 정말 상복이 많은 노래구나 싶어요. 너무 감사해요.”
-<헤어질 결심>에는 ‘안개’가 여러 번 나와요. 1967년 데뷔 앨범에 실린 ‘안개’가 극중 월요일 할머니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고 엔딩 크레딧 자막이 올라갈 때는 송창식씨와 듀엣으로 부르는 게 나와요. 듀엣으로 부른 ‘안개’는 언제 녹음한 건가요.
“올 2월에 박찬욱 감독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영화를 하나 찍었는데 제가 부르는 ‘안개’가 꼭 필요하다고요. 내 나이가 이제 70대이기 때문에 소리가 옛날 같지 않다고 했더니 지금 소리도 좋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송창식씨와 듀엣으로 불러주면 좋겠다고 해요. 그래서 미사리에 있는 창식이 형 카페로 무작정 찾아갔죠. 형은 성격상 그런 부탁을 안 받아줄 사람이지만 내가 얘기하면 허락하게 돼 있거든요(웃음). 얘기가 나오고 일주일 만에 녹음했어요.”
-녹음 전에 영화를 봤습니까.
“아뇨. 여자가 모래를 파고 들어가는 거의 마지막 장면부터 보여줬어요.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은 영화제 수상 후 열린 VIP시사회에서였어요.”
-영화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난 올 2월에 녹음한 노래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55년 전에 부른 노래도 나오잖아요. 혼자 봤으면 아마 (쑥스러워서 웃음이) 터졌을 거야. 55년 전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는 우리의 삶 자체도 안갯속이지만 그 삶 속에서의 사랑도 안갯속이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어느 쪽에서, 언제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랑도, 삶도 다름을 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를 보면 창식이 형과 내가 듀엣으로 노래하면서도 각자의 필(feel)에 따라 미세하게 어긋나게 부르는데 그것을 그대로 살렸더라고요.”
영화 <헤어질 결심> 의 한 장면. 박찬욱 감독은 이봉조 작곡가가 만든 노래 ‘안개’가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고 밝혔다. / CJ ENM 제공 |
-녹음 전부터 의도한 건가요.
“아니에요. 녹음은 우리 둘이 30분간 같이했고, 저 혼자 가서 따로도 했어요. 그런데 이런 미세한 어긋남은 녹음기술로 얼마든지 맞출 수 있는데 박 감독이 안 한 것 같아요. 영화에서 두 남녀의 사랑도 끝까지 어긋나잖아요.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니까.”
-열여섯 살 때 녹음한 ‘안개’보다 일흔한 살 때 부른 ‘안개’가 더 가슴 깊숙한 울림을 준다는 평도 많습니다.
“55년 전에는 사랑의 감정이 뭔지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 내용이 이러저러하다는 설명을 듣고 불렀어요. 지금은 내 직접적 경험과 간접적 경험을 통해 켜켜이 쌓인 감정들이 농축된 상태에서 표현하는 것이니 소리부터 다르겠죠.”
‘안개’는 박찬욱 감독이 어려서부터 좋아한 노래다. 정훈희 버전만 알다가 1975년 녹음된 트윈폴리오(송창식·윤형주) 버전을 뒤늦게 알게 된 그는 정훈희씨 목소리로 나오고, 송창식씨 목소리로 또 한 번 나오는 영화를 구상했다. 촬영을 마친 후 영화 중간에 정훈희 버전을 넣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인 안개 자욱한 해변에서 해준(박해일)이 서래(탕웨이)를 찾는 장면에 넣으려 한 트윈폴리오 버전은 결국 뺐다. 남자들이 부르는 ‘안개’가 해준에게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박 감독은 엔딩 크레딧 자막이 올라갈 때 정훈희·송창식씨의 듀엣 버전이 흐르도록 했다. 영화 개봉 후 정훈희씨의‘안개’ 원곡은 유튜브 뮤직에서 음원 스트리밍 트래픽이 23배 이상 증가했다.
-1951년 6남1녀 중 다섯째이자 외동딸로 태어났지요. 아버지(정근수)가 피아니스트였고, 작은아버지(정도근)도 피아니스트 겸 마스터(악단장)였던 것으로 알아요. 오빠와 동생도 음악을 했고요.
“아버지는 가수였어요. 김정구, 현인 선생님처럼 일제강점기 때 유랑극단에서 활동하셨죠. 우리 집에는 오르간, 트럼펫, 색소폰,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 각종 악기가 있었어요. 6·25전쟁이 터진 후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인민군에 의해 신의주까지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도망 나오셨어요. 전쟁이 끝난 후 우리 가족은 피란 내려왔던 부산에 눌러앉았고, 아버지는 서면의 하야리아 미군부대에서 노래하셨어요. 그러면서 오빠들과 네다섯 살밖에 안 된 나한테 음악과 미국식 영어를 가르치셨어요.”
-딸이 하나뿐이라 사랑을 듬뿍 받았겠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하루종일 집안일만 하는 엄마를 가리키며 ‘니 엄마처럼 살래?’ 물었어요. 내가 고개를 저으니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니가 클 때쯤이면 세상이 달라져서 여자도 능력 있으면 돈 벌면서 자기 좋은 놈하고 살고 싫으면 헤어져도 된다. 하지만 느그 엄마는 나랑 헤어지면 돈 버는 법을 몰라서 굶어죽는다. 그러니 남자에 의해 팔자가 좌지우지되는 여자가 되지 마라. 그러려면 공부를 하든지 노래를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그래서 노래를 선택했나요.
“가수를 하겠다고 했죠. KBS, MBC 부산총국 등에서 어린이 노래자랑이 열릴 때마다 우승해 공책과 연필을 받아왔어요.”
꿈의 실현은 ‘운명’처럼 이뤄졌다. 1967년 고1 방학을 맞은 그는 작은아버지가 밴드마스터로 일하던 서울 남대문 사거리 그랜드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연습 삼아 미8군 가수들이나 부르던 재즈풍의 발라드 몇곡을 부르고 있었다. 마침 나이트클럽 옆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이던 당대 최고 작곡가였던 이봉조씨(1931~1987) 귀에 그의 노랫소리가 꽂혔다. 그는 단숨에 클럽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아버지에게 “야, 누굽니까? 내가 몇곡 시켜봐도 되겠습니까?” 했다.
1967년 ‘안개’ LP판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가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어릴 때부터 ‘가수의 꿈’ 키워
노래자랑 열릴 때마다 참가해 우승
-그 자리에서 바로 이봉조씨에게 낙점된 건가요.
“며칠 있다가 이봉조 선생님은 LP판 하나를 건네주시면서 ‘니 안개라는 음악 들어봤나? 이거 한 번 들어보고 멜로디를 외우라’고 하셨어요. 선생님이 가사 없이 색소폰 연주로만 발표한 ‘안개’ LP판이었어요. 일주일 후 남산 KBS로 데리고 가더니 ‘니 멜로디 외웠제? 거기다 요 가사 붙여봐라’ 하셨어요. 밴드와 두어 번 연습시킨 후 그날 바로 녹음해 나온 게 영화 <안개> OST예요. 선생님은 반응을 보시겠다며 릴테이프 2개를 만들어 자신이 전속악단장으로 일하는 TBC(동양방송)와 동아방송국의 <세시의 다이얼>에 하나씩 줬어요.”
-그게 터졌군요.
“최동욱씨가 생방송으로 진행하던 <세시의 다이얼>은 당시 최고 프로그램이었어요. 영어 노래 외에는 안 틀었죠. 그런데 최동욱씨가 듣고는 이렇게 말하며 엔딩곡으로 ‘안개’를 틀었어요. ‘좀 전에 작곡가 이봉조씨가 곡을 하나 갖고 왔는데 개봉할 영화 주제가라고 합니다. 신인 가수인데 나이가 10대입니다. 혼자 듣기 아쉬워 여러분께 들려드립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방송국 전화통에 ‘얘 누구냐’며 불이 났어요. 선생님은 일주일 만에 LP판에 ‘안개’와 같이 넣을 10곡을 새로 만들어 녹음했어요.”
-일주일 만에 10곡을요?
“LP판에 11~12곡이 들어가니까요. 앨범이 나오자마자 하루종일 나는 길에서 ‘안개’를 듣고 다녔어요. 버스 두세 정거장마다 레코드가게가 있었는데 하루종일 ‘안개’를 틀어놨으니까요. 부르는 곳이 많아 하루 다섯군데서도 노래했어요.”
‘안개’ 앨범은 발매 즉시 40만장 이상 판매됐다. 정훈희씨는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영화 <안개>도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그는 1968년과 1970년, 1972년 군용기를 타고 월남전 위문공연을 가기도 했다. “공항에서 유서를 써놓고 나갔다”고 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다가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이 느낀 죽음의 공포에 앞서 “오빠들(그는 파병 군인들을 여전히 그렇게 호칭했다)의 핏발 선 눈, 부상당해 팔다리가 잘린 모습을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 건너 등불’이라는 노래는 도저히 부를 수 없었다고도 했다. “‘안개’를 부른 후 이 노래를 부르면 오빠들이 전부 통곡을 하니까”라고 했다.
-1970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에 출전해 ‘안개’로 ‘월드 베스트10’에 입상했지요. 국내 최초의 국제가요제 수상인 것으로 알아요. 과거 영상과 사진을 보면 국제가요제 출전 때마다 한복차림이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처음 갈 때는 서양식 드레스를 갖고 갔어요. 경연 이틀 전 파티가 열렸는데 이봉조 선생님이 ‘야, 쪼깐한 가시나가 드레스 입은 쭉쭉빵빵한 외국인들 속에 섞여 있으니까 안 보여서 내가 니 찾느라 혼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니 한복 입어야겠다’ 해요. 서울에 있는 가수 현미 언니한테 전화해서 급히 한복을 공수해왔죠. 그때부터 카메라들이 나만 찍는 거예요. 경연 날 무대에서 절부터 하고 노래했어요.”
정훈희씨는 1970년 ‘안개’로 도쿄국제가요제에 출전해(위) 국내 최초의 국제가요제 수상자로 기록됐다. 1979년에는 칠레국제가요제에 출전에 ‘꽃밭에서’를 스페인어로 번안한 ‘오늘처럼 아름다운 날에’를 불러 최고인기가수상을 수상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이봉조 선생이 LP판 주며 멜로디 외우라 하셨고,
일주일 후 가사 주며 부르게 했어요.
그렇게 나온 게 영화 <안개> OST예요”
그는 1972년에도 ‘좋아서 만났지요’로 도쿄국제가요제에 출전해 입상했다. 1971년 아테네국제가요제에서는 ‘너’로 인기상을, 1975년 칠레국제가요제에서는 ‘무인도’로 동상을 받았다. 1979년에는 ‘꽃밭에서’를 스페인어로 번안한 ‘오늘처럼 아름다운 날에’를 칠레국제가요제에서 불러 최고인기가수상을 받았다. 모두 이봉조 작곡가의 곡이다.
-‘무인도’는 김추자씨가 1974년에 앨범을 발표했는데, 칠레가요제에는 왜 정훈희씨가 출전했나요.
“나도 당연히 김추자씨 노래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봉조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야, 칠레 가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유를 안 묻는 게 좋을 거 같아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는 죽을 고비도 여러차례 겪었다. 어렸을 때 왼쪽 다리에 소아마비를 앓아 절룩이다 위험한 큰 수술을 몇차례 받고서야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그는 “만약 수술이 잘못됐으면 생명도 위험했겠지만 장애인에 대한 당시 사회의 편견으로 인해 가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1년 12월 25일 발생한 대연각호텔 화재사건도 기적적으로 피했다. 당시 그는 오빠들과 7인조 캄보 밴드를 결성해 활동 중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인 전날, 대연각호텔 21층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마친 오빠들은 룸 여러개를 예약해뒀으니 자고 가자고 했다. 집으로 가겠다는 정훈희씨의 말 한마디에 가족이 모두 살았다. 생명의 위협까지는 아니지만 1976년에는 스토커가 극장 공연을 하러 간 그의 얼굴을 돌로 가격해 흉터가 남았다.
그가 가수로서 한동안 슬럼프에 빠진 것은 1975년 12월 불어닥친 대마초 파동 때문이었다. 당시 수많은 연예인이 입건됐다. 유일하게 그만 훈방조치됐지만 방송 출연은 할 수 없었다. 1980년 5공 정권 출범과 함께 족쇄가 풀렸지만 정훈희씨는 2년간 더 방송 출연이 불가능했다. 가수 김태화씨와의 연애 스캔들 때문이었다. 그는 1979년부터 김태화씨와 동거했다. 1983년 첫 아들을 낳았을 때는 한 스포츠신문에 ‘미혼모 정훈희, 아들 낳았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3년 후 결혼식을 치렀다. 부부 슬하에는 아들 둘이 있다.
-남편에게 첫눈에 반한 건가요.
“아뇨. 1970년에 시민회관에서 같이 공연했는데 그때 남편이 속한 록그룹 ‘라스트 찬스’를 처음 봤어요. 미친놈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노래하더라고요. 다음 날 임희숙이 태화랑 커피를 마시자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넌 왜 저런 미친놈하고 노니, 같이 다니지마’ 했어요.”
-그런데 어떤 점이 좋아 연애하고 결혼까지 했나요.
“김태화씨가 노래를 정말 잘했어요. 이 사람이랑 살면 늙어 죽을 때까지 같이 노래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정훈희씨가 먼저 동거하자고 했다던데,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상당히 주체적 여성이었나 봐요.
“김태화씨는 내가 아플 때 내 친구와 같이 집에 찾아오더니, 내가 있는 데마다 따라다니며 나타났어요. 그래서 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친구의 방을 빌려 거기서 만나자고 한 거예요.”
-어린 딸에게 ‘여자도 능력이 있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와 살고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져도 된다’고 가르친 아버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다른 가족은 다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딱 세마디 하셨어요. ‘좋나?’, ‘없으면 안 되겠나?’, ‘그럼 살아라’로 끝(웃음).”
-주말에 카페에서 노래는 몇곡이나 부르나요.
“내가 30분, 김태화씨가 40~50분 정도 노래해요(음료값 포함 1만7000원만 내면 관람할 수 있다).”
-건강은 어떤가요.
“김태화씨는 두 번의 위암 수술을 받고 완치됐어요. 나는 3년 전에 뇌에 생긴 혈전으로 인해 쓰러진 적이 있어요. 119 구급차에 실려갔죠. 그날 이후 매일 약 먹으면서 관리하고 있어요.”
정훈희씨는 “감사할 줄 알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낄 줄 알고, 잘못한 일에 대해선 반성하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며 “딴따라로 태어나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 우철훈 선임기자 |
“다른 가족들은 남편과 결혼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딱 세마디만 하셨어요.
‘좋나?’, ‘없으면 안 되겠나?’, ‘그럼 살아라’”
-살면서 회한 같은 건 없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모두가 신을 만나기 위해 산 정상을 향해 올랐어요. 도착한 이들에게 신은 ‘오면서 무엇을 봤냐’고 물었죠. 열이면 아홉이 ‘죽기 살기로 정신없이 올라왔다’고 답했어요. 한 사람은 달랐어요. ‘그늘에서 낮잠도 자고 새소리도 듣고 계곡에 발도 담그며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며 올라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어요. 신은 그제야 미소지으며 ‘그래, 그렇게 느끼고 살라고 내가 너희들을 세상에 보내줬는데 전부 뭐가 그리 바쁘다고 죽기 살기로 피 말리며 살았나’ 하더래요.”
그의 눈에 다시 물기가 고였다. 그는 “그 말이 정답”이라며 “감사할 줄 알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낄 줄 알고, 잘못한 일에 대해선 반성하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고 했다. 그는 사랑에 대한 생각도 드러냈다. 부모자식, 형제, 친구, 연인이나 부부 등 많은 관계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방식을 고집하며 강요하는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너를 이렇게,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너도 당연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따진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상대방은 그 방식이 버겁거나 싫을 수가 있다”며 “이런 순간은 살다 보면 많이 온다”고 했다. 누구보다 화려한 나날과 그만큼의 깊은 골을 경험하고 수많은 희로애락의 징검다리를 건너온 인생선배의 조언인 셈이다. 그에게 바람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송해 선생님이 생전에 항상 하신 말씀이 ‘떠나는 순간까지 딴따라로 살고 싶다’는 거였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딴따라로 태어나서 너무너무 행복해요. 안 그러면 이 나이에 이렇게 속눈썹 붙이고 여러분들 앞에서 엉덩이 돌려가면서 신나게 노래할 수 있겠어요?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에요. 하하하….”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